감옥에 있을 때 찾아와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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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 있을 때 찾아와 주었다
  • 서영남
  • 승인 2020.10.11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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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남의 민들레국수집 일기]
사진=서영남
사진=서영남

2000년 11월 어느 날입니다. 수도원에서 서울대교구 교정사목에 파견되어 구의동 출소자의 집에서 지내고 있다가 환속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할지 오리무중이었습니다. 지금의 코로나 19와 상황이 아주 비슷합니다. 어떻든 교회로부터 환속장을 받기 전까지는 가만히 숨죽여 기다려야 했습니다. 비승비속입니다.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인천에서 지내고 있는데, 구의동 출소자의 집에서 지내던 안드레아 형제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안드레아 형제는 청송 제2보호감호소에서 만났습니다. 보호감호소는1981년~2005년까지 운영되었는데, 보호감호 처분을 받은 사람을 수용하는 곳입니다. 안드레아 형제는 2000년 8월에 보호감호소에서 가석방으로 나왔는데 갈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출소자의 집인 구의동 <평화의 집>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제가 떠난 후에도 계속 평화의 집에서 살다가 거기서도 못 살겠다고 나온 것입니다.

고마운 분들의 도움으로 인천 송현동 성당 옆 허름한 집을 보증금 오백만원에 월세 15만원에 얻었습니다. 가전제품들은 중고로 싸게 샀습니다. 이불과 전기밥솥, 냄비 몇 개도 샀습니다. 그렇게 출소자들을 위한 <겨자씨의 집>을 시작했습니다. 출소한 형제들과 <겨자씨의 집>에 지냈습니다. 할 일이 생겼습니다. 근거지를 마련했으니 청송에 있는 재소자 형제들을 위한 일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수도자로서가 아니라 그냥 개인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겨자씨의 집>에서 출소자 형제들과 지내면서 몇 달 만에 다시 안드레아 형제와 함께 청송교도소와 보호감호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청송교도소에서 79년생 겨우 나이 스물셋인 요한 형제를 면회했습니다. 지난 해 서울구치소에서 출소한 날 함께 불고기를 먹다가 사라진 형제입니다. 한 달 만에 노랗게 물들인 머리를 하고 서울 구치소에 다시 들어왔습니다. 얼마 전에 청송교도소로 이감을 왔습니다. 2002년 5월이면 출소를 한다고 합니다. 영치금이 얼마쯤 인가 알아보니 단돈 220원이 남아 있습니다. 만원을 넣어주면서 아껴 쓰라고 했습니다. 속옷이 없다고 좀 보내달라고 합니다. 우편으로 보내주겠다고 했습니다.

요한 형제는 나이 사십이 넘은 지금도 청송교도소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곧이어 청송교도소 바로 옆에 있는 제1보호감호소에 갔습니다. 몇 달을 찾아보지 못했던 영등포 코털 아저씨를 면회했습니다. 예순이 다 된 나이인데 영등포 역 근처에서 그냥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살아온 분입니다. 영등포 구치소에 있을 때 세례를 받았습니다. 영치금이 단돈 15원이 남아있습니다. 앞으로 4-5년은 더 청송에서 살아야 합니다. 영치금을 조금 넣어주었습니다.

오후에는 청송 제2보호감호소에서 들어가서 그 동안 매달 만나던 천주교 신자 모임을 했습니다. 열 명의 형제들과 모임을 가지고 오후 세 시에 감호소를 나왔습니다. 형제들 영치금을 만원씩 넣어주고 서둘러 안동 역에서 청량리행 기차를 타고 멋진 소백산 경치 구경을 하면서 인천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환속한 후에는 출소자들과 재소자들 돕는 일을 하면서 지냈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쏜살처럼 흘렀습니다. 이십여 년이 흘렀습니다. 청송교도소는 매달 두 번씩 다니다가 몇 년 전부터는 나이 때문에 한 번으로 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매년 베로니카의 여름휴가에는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재소자 형제들을 만나러 다녔습니다. 

 

사진=서영남
사진=서영남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매달 청송으로 가는 것도 중단되었습니다. 지난 5월에는 교정대상 자애상을 받았습니다. 상금을 어떻게 쓸까 고민하다가 청송교도소(경북북부 제1교도소)에 있는 어려운 재소자들에게 영치금으로 나눠주기로 했습니다. 상금을 전해주기 위해 얼마 전에 베로니카와 모니카와 함께 청송을 다녀왔습니다. 나이가 육십을 넘기면서부터 딸 모니카의 도움을 받아서 운전을 나눠서 합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서둘러 청송으로 출발합니다. 덕평휴게소에서 간단하게 아침 요기를 하고 청송 진보에 도착하면 오전 11시쯤 됩니다. 경북북부 1교도소 민원실에 가서 코로나19 때문에 바뀐 면회 규정대로 면회를 했습니다. 그런 다음 만나지 못한 형제들에게 영치물(빵, 음료수 등)을 넣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영치금으로 넣어 줄 상금은 교도관에게 전했습니다. 인천에 도착하니 밤 아홉 시입니다. 온몸이 노곤하지만 기분은 편안합니다. 사랑은 수고를 모르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서영남 베드로
민들레국수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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