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어떻게 인권운동을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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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어떻게 인권운동을 하는가
  • 오창익
  • 승인 2020.10.05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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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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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인권운동을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다만 사회운동을 하고 싶었다. 내 또래에는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운동을 해야 한다고 여겼던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대개 광주학살의 영향이었을 게다. 운동을 제대로 하려면 직업이 운동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첫 직장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사제단)이었다. 열심히 일했다. 좋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고 덕분에 성장할 수 있었다. 반면교사도 적지 않았다. 덕분에 단단해지는 걸 느꼈다. 그러나 딱지는 상처 다음이었다.

두 번째 직장은 천주교인권위원회(인권위)였다. 단체 이름에 ‘인권’이란 말이 들었으니, 인권운동을 맘껏 할 수 있었을 텐데, 단체는 민원 위주로 돌아갔다. 물론 특수에서 보편을 뽑아내듯 민원 활동을 통해 제2, 제3의 피해를 막고 우리 사회를 더 안전하게 한다면야 민원 업무도 마다할 까닭이 없다. 공허한 이념형 운동보다는 이런 실질이 더 바람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게 꼭 ‘천주교인권위원회’의 일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일은 열심히 했다. 당시엔 억울한 사람들의 하소연이 물밀 듯 들어왔다. 감옥에는 여전히 양심수들이 있었고, 수십 년째 복역 중인 장기수들도 많았다. 학교에서 쫓겨난 교사들, 체제 홍보에나 동원될 뿐 최소한의 대접도 받지 못하는 탈북자들, 군대에서 죽어가는 수백 명의 젊은이들까지, 챙겨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서준식이 이끄는 인권운동사랑방 등의 단체들이 있었지만, 맏형 역할은 인권위의 몫이었다. 인권위가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유력 인사들의 지원을 끌어낼 수 있었고, 그나마 인력과 재원을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999년 봄, 인권위를 그만두었다. 그렇지만 함께 일하던 동료들은 한날한시에 쫓겨났다. 전격적인 해고였다. 천주교사회운동을 한다는, 그러나 예전에 운동을 했던 추억만 있을 뿐, ‘지금 여기’가 없는 선배들은 나를 쫓아내기 위해 열심이었다. 왜 미운털이 박힌 걸까. 사업하다 채권채무 관계로 알게 된 누군가의 전화번호를 주면서 정보과 형사를 통해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아내라는 채근을 거부했던 일, 선배들의 언더모임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선배들을 정부나 정당에 추천하는 모임에 빠진 일 따위가 떠올랐다. 이런 핍박이야말로 영광스러운 훈장이라 여겼다. “누가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이냐?”고 되물었던 예수님 말씀이 힘이 되었다.

스스로 그만두었지만, 사실상 쫓겨난 것이기도 했다. 활동기반을 송두리째 빼앗긴 허탈감은 컸다. 먹고사는 문제도 심각했다. 결혼을 했고 아이도 둘이었다. 그래도 인권운동은 계속 하고 싶었다. 왜 일까? 세상을 바꾸겠다는 호기도 있었지만, 소외된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싶다는 막연함도 있었다. 인권위를 그만둔 지 한 달 만에 새로운 인권단체를 만들었다. 천주교라는 든든한 뒷배도 없었다. 최소한의 물적 기반도 없었다. 그래도 활동을 멈출 수는 없었다. 단체 운영비를 마련하고, 먹고 사는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게 벅찼지만, 그래도 인권운동을 하고 싶었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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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활동가가 새로 만든 인권단체를 후원해 줄 사람은 별로 없었다. 당시엔 자동출금시스템(CMS)도 없었다. 지로용지나 무통장 입금으로 회비를 받아야 했는데, 모두 은행을 찾아가야만 했다. 그렇게 회비를 내는 일은 매우 성실한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다.

당장 먹고 사는 일은 노점부터 시작했다. 스카프, 목도리, 손수건, 넥타이 등을 팔았다. 남들만큼 일했고, 딱 그만큼 힘들었다. 힘들었지만 정치나 자본권력에 투항하지 않았고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제 잇속만 챙기려 들지도 않았다.

1999년 새로운 단체를 만들며 생각했던 것은 국가기관에 대한 감시활동이었다. 경찰, 검찰, 국가정보원, 감옥, 군대에 대한 감시, 이들 기관에 의한 피해자 구조, 그리고 정책 대안을 제시하여 국민의 신뢰받는 기관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돕겠다는 포부였다. 포부를 뒷받침할만한 인력이나 시스템은 전혀 없었다. 필요한 것들은 그때그때 공부했고, 아쉬운 것은 현장에서 부딪히며 보충해갔다. 다른 한 축으로는 인권교육을 열심히 해보고 싶었다.

단체 운영과 관련해서도 새로운 모범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형식에 매몰되지 않는 단체, 제대로 실천하는 역동적인 단체,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독립적인 단체를 구상했다. 일단, 대표라는 직함을 만들지 않았다. 나는 단체의 설립자이며 단체의 법률상 대표지만, 사회적으로 대표라는 직함을 쓰지 않고 사무국장이라 쓴다. 그동안 만났던 운동단체 대표들에 대한 반감도 컸다. 그들은 대개 하는 일도 별로 없으면서 단체를 과잉대표 했다. 일은 상근활동가가 만들고, 과실은 비상근대표가 챙기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정관이나 회칙도 만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매 사안마다 협의와 합의가 중요한 구조를 만들고 싶었다. 살아있는 조직이 되려면 관행과 뻔한 문구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다른 단체가 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일도 차고 넘치게 많으니 충분히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르르 몰려다니며 성명서에 연명만 하는 일도 하지 않기로 했다. 사안에 대해 정확히 알지 않으면 그 사안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관성은 운동의 적이라고 생각했다.

정부나 기업의 돈은 받지 않기로 했다. 지원금, 보조금은 물론 프로젝트나 용역 사업을 통한 간접적인 지원도 받지 않기로 했다. 인심은 곳간에서 나는 법, 어떤 방식으로든 권력에게 도움을 받으면, 운동 정체성을 잃어버릴 거라 여겼다. 구체적인 성과를 내는 것도 중요했다. 일을 시작하면 반드시 매듭을 져야했고, 누군가를 돕기로 했다면 끝까지 책임지려고 했다. 이념적 전망은 약간 모호해도 좋지만, 구체적 활동은 실용주의적이려고 했다. 새로운 단체를 만든 지 21년이 흘렀지만, 처음 먹은 마음은 대체로 지켰다. 그만큼 고단하기도 했다. 중요한 건 일이었다. 구체적인 성과를 내놓아야 공허한 말에 기대지 않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들 돈 문제가 가장 어려울 거라 말한다. 하지만 돈은 소득의 문제이기보다는 소비의 문제이고, 돈이 수단이라는 점만 생각하면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어느 날 단체 통장으로 1천5백만 원이 들어왔다. 재일교포 조작간첩 사건 피해자의 가족들이 보낸 돈이었다. 재심에서 무죄를 받고, 민사에서도 이겨서 받은 돈이라고 했다. 부인과 따님을 만나 잠깐 상담했던 게 전부였기에 그 돈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주겠다, 안 받겠다는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은 받기로 했지만, 이 돈을 망자의 이름을 따 ‘김추백기금’으로 운영하기로 했다. 다음부터 국가기관 개혁을 위한 토론회를 열 때 김추백기금을 사용했다. 결국 우리가 쓰는 돈이니 이리 쓰나 저리 쓰나 큰 차이가 없을지 모르지만, 토론회 자료집에 김추백기금으로 제작했다는 안내 문구를 넣어 가족들에게 보내주고 있다. 우리가 당신들의 돈을 함부로 쓰지 않고, 또 망자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런 식으로라도 피해자와 연대하고 싶었다.

인권운동을 하는 까닭을 헌법 제10조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요즘은 그저 ‘고통과의 연대’ 수준으로 소박해졌다. 거창한 이념이나 맹렬한 논리도 없지만, 다만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 식의 작은 마음이라도 제대로 건사하고 싶었다. 인권은 매우 진폭이 넓은 개념이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위해 필요한 목록을 모두 나열하면, 그걸 인권이라 부를 수 있을 게다. 인간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이 해당한다. 그러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은 어차피 극히 제한적이며, 뭔가를 바꾼다 해도 일부에 그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몇 가지 중요한 원칙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 원칙이 인권인지 아니면 이권인지를 가르는 잣대이기 때문이다.

사제단부터 친다면 29년 동안 직업으로 인권운동을 했고 지금도 인권운동을 하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 거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의 존재가 위협받는 시절, 아파트 평수 따위로 인간의 값이 달라지는 천박한 세상이기에 더욱 그렇다. 세상은 원래 다 그렇다는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은 모델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전에, 일단 내가 그렇게 살고 싶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많다. 더 많은 지역과 부문에 인권단체가 생길 수 있도록 돕고 싶다. 지금껏 새로운 인권단체들이 생기면 자매단체의 연을 맺고 매월 연대의 마음을 보내고 있다. 인권연대가 ‘연대사업비’를 가장 많이 쓰는 단체라는 건, 남들이 알든 모르든 우리의 자랑이다.

진짜배기 연구소도 하나 만들고 싶고, 가난한 나라의 인권활동가들과 구체적으로 연대할 수 있는 안정적인 센터도 하나 만들고 싶다. 그냥 모호한 소망으로만 머물지는 않고 있다. 연구소의 경우, 매월 단체 수익의 3%를 적립하고 있다. 지금까지 모은 게 큰돈은 아니지만, 매달 꿈을 키우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식으로 반발자국 씩만 앞으로 나가면 된다. 

 

오창익 루까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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