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보다 영성을, 종파보다 종교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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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보다 영성을, 종파보다 종교성을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0.09.29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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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18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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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삿짐을 싸서 경주로 온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오늘 다시 전라도 무주 집에 다녀와야 했다. 자동차로 세 시간이나 걸리는 먼 길이다. 무주에 닿으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돌아오는 길엔 가랑비가 폭우로 변하여 양동이로 물을 쏟아붓는 것 같았다. 길이 막혀서 멈춰 서 있는 동안엔 와이퍼를 멈추고 유리창에 줄줄 흐르는 빗물을 만끽했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비는 길손의 행로를 멈칫거리게 하지만, 농부들에겐 얼마나 반가운 단비인가. 올 들어 농사를 접고 이번엔 경주의 아파트로 이사하였지만, 농사짓던 자의 관성이 남았는지 은혜를 베푸는 하늘에 대고 ‘고맙다’ 손 흔들고 싶다. 비안개가 서린 산 아래 논들이 염전처럼 물을 가득 채우고 꿈처럼 영화처럼 보기에 삼삼하다.

서둘러 무주에 다시 가야만 했던 까닭이 있다. 이사하던 날, 경주에 도착해서 짐을 풀다가 장롱을 열어 본 아내가 깜짝 소리를 질렀다. 장롱 안에서 새끼 고양이 세 마리가 오골조골 모여앉아 낑낑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무주의 우리집과 윗집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살던 고양이 순이가 낳은 새끼들임에 틀림없었다. 순이는 우리집 처마 밑에서 열흘 전쯤에 새끼를 낳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틈을 보다가 안방에 있는 반닫이 속에 새끼들을 물어다 놓은 적이 있었다. 어미 마음에 그곳이 더 안전하고 포근한 잠자리가 되리라 여겼던 것 같다. 어미 고양이를 달래서 종이상자 안에 새끼들을 담아서 재래부엌으로 보금자리를 옮겨 주었는데, 이삿날 술렁거리는 분위기 때문에 불안했던지 어느 틈엔가 잠시 열려 있던 장롱 속에 새끼들을 다시 물어다 놓았던 모양이다. 그걸 모르고 닫힌 장롱은 이삿짐센터 화물차에 실려 무주에서 경주로 넘어온 것이다.

우리가 이삿짐을 풀고 정신없이 짐 보따리를 정리하는 이틀 동안, 새끼 고양이들은 베란다 한귀퉁이에 놓은 종이상자 안에서 수시로 밤새 양양대고 끙끙거리면서 버티고 있었다. 어미젖을 먹던 새끼들인지라 우유를 주어도 제대로 먹지 않았다. 결국 새끼들을 하루빨리 어미 곁으로 데려다 주기로 하였고, 새끼 고양이들의 귀향을 추진한 셈이다.

비 내리는 광대정 산길은 찔레와 때죽나무의 흰 꽃들이 즐비하였다. 흰 꽃들을 보면 마치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 같다던 아내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텅 빈 ‘옛집’ 마루에 새끼 고양이들을 내려놓고, 아랫집에 내려가 보니 처마 밑에서 윤희 씨가 앉아서 쉬고 있었다. 비 내리는 광대정 아랫녘 숲을 생각 없이 내려다보고 있던 윤희 씨는 생각지 않았던 나의 출현을 두고, 웬 도깨비인가 싶었다고 했다. 엊그제 이삿짐을 싣고 산을 내려간 사람이 불쑥 나타났으니 그럴 법도 하였다. 옆에 앉아서 담배 한 개비를 피우고, 요 며칠 순이를 본 적이 없다는 윤희 씨에게 새끼들을 부탁해 놓고 다시 산을 내려왔다. 자동차가 지나칠 때마다 길섶의 풀들이 이고 있던 물방울들을 떨어내었다.

얼마 전 이사 준비를 하면서 생각했다. 이사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주소지를 옮기는 절차도 아니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향한 공간적 이동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사십대에 치르는 이사란 어찌 보면 생애의 한 시절을 정리하는 것이고, 다른 한 생애를 시작하는 것이다. 언젠가 지난 신문을 뒤적이다가 교육방송에서 최재천 선생이 진행하는 특강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제목이 ‘인생의 이모작’이었던 것 같다. 사십대를 앞뒤로 우리는 두 차례에 걸쳐 삶을 산다는 것이다. 이삼십 대에는 자식을 낳아 기르든 무엇을 하든 ‘생산(生産)’하는 데 몸과 마음을 쓴다면, 사십대가 되면 점점 근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좀더 정신적인 일에 매달리게 된다는 것이다. 심층심리학자인 카를 융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는 중년이 되면 사회적 성취와 외향적인 일에서 물러나 좀더 내향적이고 명상적인 삶이 요청된다고 하였다. 이 두 가지 삶의 방식은 계속되는 삶의 과정이지만, 분명히 다른 특성을 갖는 것이다.

이삿짐을 싸면서,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책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나름대로 원칙을 세우기를, 지난 일년 동안 한 번도 펴 보지 않았던 책은 버리기로 했다. 이사할 때마다 가장 고민되고 짐스러운 게 책이 었다. 처음엔 종이상자에 담다가, 책을 다 감당하지 못해서 나일론 끈으로 묶기 시작하고, 이것도 지치면 그저 책더미 위에 걸터앉아 한숨을 내쉬곤 했다. 이 책은 이래서 버리면 안 되고, 저 책은 저래서 버리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내내 볼 필요가 없다가도 이따금 글을 쓸 때면 이미 용도 폐기되었던 책들도 다시 쓸모가 생기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따금’을 위하여 손끝은 밀어놓았던 책을 다시 제 앞으로 끌어당긴다.

이제는 그렇게 미련을 떨지 말자고 다짐했다. 사실 책에 대한 미련은 지나간 흔적에 대한 미련이기도 했다. 서울 상계동 산동네에서 시골로 처음 이사 갈 때에는 사회과학 책을 많이 치워 버렸다. 그건 내가 몸 부대끼고 고민했던 사회운동의 흔적이었고, 내 젊은 이십대와 삼십대 초반의 자취였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산골까지 짊어지고 왔던 몇 권의 책을 경주로 가면서 마저 정리하기로 하였다. 대표적인 책이 김수행 교수가 번역한 마르크스의 <자본론>이었다. 여러 권의 고급 양장본으로 된 이 책을 무주 산골에서 꺼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 책을 구입할 당시만 해도 어려운 살림 속에 장만한 책이었고, 이런 책이 대한민국 땅에서 출간될 수 있다는 어떤 이데올로기적 해방감 때문에 구입했을 터였다. 적어도 그때만 해도 사회주의는 이른바 운동권의 변함없는 신조였으니까 말이다. 그 순수한 열정을 책과 함께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아내는 그 책을 ‘버린다’는 사실에 내내 아쉬 워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그 책을 폐지더미와 함께 끈으로 묶어 밖으로 내었다. 그래도 정표 삼아 남겨 둔 책 가운데는 칼 마르크스의 전 기와 그람시,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의 평전이 있다. 이데올로기는 가도 사람은 남는 법이다. 사상은 가도 그 ‘사람’들은 기억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다가와 겐조(田川建三) 지음 | 김명식 역 | 한울림 | 1983
다가와 겐조(田川建三) 지음 | 김명식 역 | 한울림 | 1983

이번엔 신학 서적도 많이 처분하였다. 그중에는 개론적인 성서신학 책뿐 아니라 예전에 성서만큼 귀하게 여기던 해방신학 책도 포함되었다. ‘해방자’ 예수보다 ‘치유자’로서 예수를 이해하는 데 더 마음을 쓰고자 하는 까닭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치유’의 큰 틀 안에서 ‘해방’의 말씀을 이해하고 싶었을 것이다. 시내를 건너면 더 큰 강물이 나타나는 법이고, 언젠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바다 역시 나타날 것이다.

지금은 어쩌면 예수조차도 일단 접어두고 그저 종교적 경계 없이 ‘사람’을 만나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당장에 꼼꼼히 챙긴 책들은 예술심리치료와 관련된 책들과 주로 문학서적들이다. 내가 다 경험할 수 없는 삶을 소설과 시를 통하여, 산문과 평론을 통하여 만나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이론으로도 살펴야 하지만, 생동감 있고 구체적인 글을 통해서 접하고 싶다. 그리고 교리보다는 영성을, 종파보다는 종교성을 살피는 책을 챙기고 싶다.

화물차 가득 따로 묶어 내어놓은 책을 싣고 안성면 재활용 센터로 가려는데, 아내가 그 틈에서 책 두 권을 빼어들었다. 이 책들은 그냥 놔 두자는 것이다. 일본의 다가와(田川)라는 신학자가 쓴 <예수라는 사나이>와 서인석 신부가 쓴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이다. <예수라는 사나이>라는 책을 번역한 김명식 선생은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예수는 고고한 수도자가 아니다. 그는 삶의 한가운데서 일하면서 수도하고, 민중들과 함께 고민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했던 사나이였다. 이처럼 저자는 예수를 사회현장에서 살고 싸우고 일했던 사나이로 파악함으로써, 종교의 굴레에 매여 있는 하느님의 아들이 아닌 사람의 아들 예수로서의 진면목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이다. 예수는 종교적, 정치적 우상이 아니라는 사실과 예수야말로 역사의 한가운데서 사회적 문제와 맞서 고뇌하면서 해결책을 모색했고, 지배자들과 싸웠으며, 교조적인 신앙에 반항했던 민중의 벗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지금도 그 이야기를 안고 가는 것이다. 민중을 안고 인간에게로 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젠 책을 안고 가는 게 아니라 가슴에 새기고 가는 것이다. 새로운 자장(磁場) 안에서 자유롭기 위하여 조금 낡은 책은 일단 접어두기로 한다. 이제 경주로 가서 아주 더 오래된 것들 속에서 정말 참신한 것을 찾고 싶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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