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함의 신학은 약골들의 신학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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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함의 신학은 약골들의 신학이 아니다
  • 헨리 나웬
  • 승인 2020.09.29 11: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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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의 "우리를 초대한 길들"-8

하느님은 약한 분이시다

우리의 세계는 분리시키고 파괴하는 악마적인 힘들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다. 무력한 예수님 안에서 그리고 그런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은 이런 힘들을 무력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신비는 우리에게 새롭고도 매우 어려운 질문을 제기한다: 이 세상 속에서 무력한 하느님을 어떻게 증언하며 사랑과 평화의 그분의 왕국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무력함의 의미는 우리가 권력에 굶주린 사회 속에서 흙털개의 구실로 전락하는 것인가? 부드럽고 수동적이며 비굴하게 되는 것이 좋다는 의미인가, 늘 어둠의 세력들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도록 허용하면서? 경제적 약함, 체제적 약함, 신체적 정서적 약함이 이제는 갑자기 덕이 된다는 의미인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그들의 과제에 대하여 준비가 빈약하고 제대로 조직화되지 않은 사람들이 이제는 그들의 가난을 감사해야 할 축복으로 자랑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고린 12,9)는 바오로 사도의 말을 볼 때에 당신은 자신의 낮은 자존감을 마치도 복음을 선포하는 조건으로 주장하는 약골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의 힘은 약함 속에서 완전하게 됩니다”(2고린 12,9)

우리는 여기에서 약함의 신학이 지니고 있는 가장 위험스러운 함정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약함의 노예가 되는 것만으로 세계의 억압적인 세력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다면, 차라리 하느님의 편보다 사탄의 편에 머무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약함의 신학이 약골들을 위한 신학이 된다면 그런 신학은 부적당함, 복종, 자기비하 그리고 모든 분야의 패배에 대한 편리한 변명에 불과하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볼 때에도 전혀 가능하지 않다. 재정적, 지적 그리고 영적인 약함을 거룩한 은혜, 특권이라고 해석할 수 없다; 고통받지 않으려고 하기보다 하느님을 위해 고통받는 것이 더 낫다는 확신으로 적절한 의학적 심리학적 치료를 지연시키거나 피하는 것은 전혀 적절한 자세가 못된다; 신중한 계획, 적극적인 기금모집 그리고 미래를 위한 지적인 전략 짜기가 무력함이라는 이상에 대한 충실성의 결여라고 생각되어 불쾌하게 여겨져서는 안 된다. 아픈 이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그리고 고통받는 모든 이들이 그들의 운명으로부터 해방되도록 많은 도움을 받지 못하면서 하느님의 특권 받은 아이들로 낭만화 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니체는 적절하게 약함의 신학을 비판하였다. 그에게 있어 약함의 신학은 가난한 이들을 가난 속에 그대로 있게 하며 종교계지도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신자들”을 복종적인 순명 속에 머물게 하는 종교적 근거를 준 것이었다. 참으로 무력함, 약함, 작음의 영성에는 극히 위험스러운 함정이 있다. 특히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부름을 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약함의 영성을 지니고 있을 때에는 더욱 더 위험하다. 그들에 대해 예수는 말씀하신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마태 23,4).

약함의 신학은 약함을 사회와 교회의 권력자들에 의해 우리가 조작되는 것을 허용하는 세상적인 약함으로 보지말고,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상처를 치유하고 지구의 얼굴을 새롭게 하는 거룩한 힘의 창구가 되도록 해주는 하느님께 대한 전적이고 무조건적인 의탁으로서의 약함으로 보라고 도전하는 것이다. 이처럼 약함의 신학은 힘, 하느님의 힘, 모든 것을 변혁시키는 사랑의 힘을 주장한다.

진정으로, 약함의 신학은 권력게임의 덫에 걸려 있는 인간을 위해 울고 계시는 하느님, 그리고 이 권력게임이 소위 종교계사람들에 의해 탐욕스럽게 이용되고 있는 것에 분노하시는 하느님을 보여주는 신학이다. 참으로 약함의 신학은 하느님이 온전히 약함의 모습으로 역사 속에 들어오심으로써 세상과 교회의 권력게임의 실체를 어떻게 드러내시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약함의 신학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이 우리 인간에게 거룩한 힘을, 머리를 세우고 지구상에서 자신있게 걸어가는 힘을 주시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하느님은 힘있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마르 9,1).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거룩한 힘이 체험되었다.

루카 사도는 이렇게 쓴다: 

“이렇게 예수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와 누구든지 다 낫는 것을 보고는 모든 사람이 저마다 예수를 만지려고 하였다” (루가 6,19).

12년 동안 하혈로 고생했던 한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다, 예수께서 그를 고쳐주실 것이라고 믿으면서.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분명히 나에게서 기적의 힘이 뻗쳐 나갔다. 누군가가 내 옷에 손을 댄 것이 틀림없다” (루가 8,46). 예수님은 하느님의 힘으로 가득 찼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죄를 용서하고 치유하며 생명을 일으키는 힘, 그렇다, 모든 힘이 주어졌다고 주장하셨다. 친구들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은 이같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그분은 말씀하신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마태 29,12-19).

힘이 요구되고 힘이 주어진다. 무력한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은 우리를 강화시키고자 하신다. 예수님이 가졌던 힘을 우리에게 주시고 파견하신다 - 마귀를 쫓아내고, 아픈 이들을 고쳐주며, 죽은 이를 살리고, 사이가 멀어진 이들을 화해시키며 공동체를 만들고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라고.

약함의 신학은 거룩한 힘에 의해 강화되는 것에 관한 신학이다. 그것은 약골들을 위한 신학이 아니라 자신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램프에 불을 밝혀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랑의 힘을 청하는 사람들을 위한 신학이다. 그렇다, 우리들은 가난하고 온화하며, 슬퍼하고 정의를 위해 굶주리고 목말라 하며, 자애롭고 마음이 순수하며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고 늘 적대적인 세계에 의해 박해를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약골이 아니며 발털개도 아니다. 하느님나라는 우리 것이며 지구는 우리의 유산이다. 우리는 위로를 받고 우리 마음껏 가지며, 자비를 경험하고 하느님의 자녀들로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은 하느님을 본다. 그것이 바로 힘이며, 진짜 힘이고 위로부터 오는 힘이다.

무력함을 통하여 힘에서 힘으로 움직이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가 초대된 삶이다. 두렵고 불안해 하며 근심하고 상처받은 존재들인 우리는 우리주변의 세계가 여기저기에서, 아무 때나 어떤 방향으로든지 제공하는 권력을 조금이라도 붙잡으라는 유혹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다. 이러한 권력의 조각들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줄에 매달려 아래위로 잡아 당겨지는 보잘 것 없는 인형들로 만든다. 그러나 우리가 무력함으로 세례를 받으려고 감히 나서는 한, 늘 아무런 권력도 가지지 못한 가난한 이들을 향하여 움직이려고 노력하는 만큼 우리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의 가슴속으로 곧장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던 그와 똑같은 거룩한 사랑과 함께 우리의 세계에 자유롭게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며 끊임없이 하느님과 일치하면서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우리 삶의 십자가 아래에 자신 있게 서 있으면서 어두움의 골짜기를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 힘이 우리공동체의 지도자들을, 감히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시도들을 감행할 여자들과 남자들을 형성시킨다. 이 힘은 우리를 단지 온화한 비둘기가 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정부와 교회기관들에 대하여 뱀처럼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 힘이 재정적 자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돈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 우리로 하여금 주저하지 않고 올곧게 말할 수 있게 해 주며, 사람들에게 철저한 섬김을 하도록 촉구하고 오랜 기간 투신하도록 도전하고 언제나 모든 곳에서 기쁜 소식을 계속 선포하도록 해 준다. 이 거룩한 힘은 우리를 성인으로 -두려움 없는- 모든 것들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 사람들로 변화시킨다.

 

헨리 나웬(Henri Jozef Machiel Nouwen, 1932-1996)은 네덜란드 출신의 사제이며 영성작가. <상처받은 치유자로서의 사목자> <돌아온 아들> 등을 지었고, 마지막 10년동안 라르쉬 새벽공동체에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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