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정작 중요한 선택, 그리고 기쁨의 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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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정작 중요한 선택, 그리고 기쁨의 의무
  • 로버트 엘스버그
  • 승인 2020.09.29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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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엘스버그의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보는 것을 배우기(8)
by LACW artist Sarah Fuller
by LACW artist Sarah Fuller

나는 척 매타이를 28년 전 어느날 밤, 그가 나의 대학 기숙사 방에 나타났을 때 처음 만났다. 나는 그가 누구이고 어디서 왔는지 몰랐으나, 어쨌건 그의 방문은 나에게 때맞춘 방문이었다. 그 해 겨울 18살이 되어가면서 나는 양심적인 병역거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며 위기를 겪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가던 시절, 내 주위에는 이 병역거부의 문제가 왜 중요한지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척은 이해하고 있었다. 나의 딜레마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는 차를 얻어 타고 주를 넘어 나를 보러 왔다.

나중에 알았지만, 척의 이런 태도는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는 도덕적인 갈림길에 선 젊은 사람 누구에게나 자석처럼 달라붙었다. 어떤 문제이든, 그는 다가와서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상대방이 더 깊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숙고해 보도록 이끌었다.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그의 엄청난 에너지, 사명에 대한 의식, 보다 나은 세상에 대한 비전에 매료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척과 같은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날 밤 우리는 밤새도록 얘기를 나누며 그의 철학과 삶의 여정에 대하여 나누었다. 나는 그가 자신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대학을 그만두기로 결정하고, 병역징집서를 불태우며 이동하는 평화조성가의 삶을 택했는지 들었다. 할 수 있는 대로 철저하게 그는 비폭력의 정신으로 살았고, 간디, 톨스토이, 도로시 데이 등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그의 가장 중대한 주제는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우리의 응답과 태도를 취하는데 있어 항상 가져야 할 자유였다.

나는 그가 엄격한 채식주의자로서 일주일에 하루를 단식하고, 모든 쇼핑은 값이 싼 떨이시장에서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소유물이라고 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고행은 어떤 도덕적인 명분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훈련과 단련의 문제이기도 하며, 어떤 고행이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야 가능한 고행이다. 그러나 그에게서 어떤 완고함이나 도덕주의적 느낌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아타나시우스 성인이 안토니오 성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처럼, “그는 전혀 걱정스러워 하지 않았다. 그의 영혼은 차분하고, 전혀 우울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의 마음은 쾌활하다.” 척은 여정에서 만나는 누구에게나 자유와 책임의 정신을 전했고, 결국 각자의 이상에 따라 사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표현했다.

이러한 척의 모범에 힘입어서 나는 대학을 떠나 뉴욕에 있는 가톨릭일꾼으로 가서 도로시 데이와 함께 일했다. 그 후 수년간 척의 여정과 나의 여정은 자주 마주쳤다. 도로시 데이를 존경했지만, 그의 영적인 감수성은 퀘이커의 정신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 그는 “내적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영혼과 다른 이들의 영혼 속에 있는 “하느님의 씨앗”을 배려하였다. 실제로 척은 종교적인 표시를 피했고, 심지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지 조차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가 알고 있는 그 누구보다도 산상수훈을 더 철저하게 살았던 사람이었다.

꽤 오랫동안 척의 평화조성 에너지는 대안적 경제분야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비폭력의 원칙들을 가난한 이들의 삶을 진정으로 바꿀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구체화시키고 싶어했다. 그 목적을 위하여 그는 투자기금, 토지신탁, 그리고 기타 프로그램들을 설립하여 수많은 가난한 가족들과 어려운 공동체들에게 혜택을 주었다. 과제나 도전이 어떻든지 그는 항상 온 힘을 다해 성심껏 일했다. 그의 어머니가 나중에 말했던 것처럼, “그의 삶은 그의 일이었고, 그의 일은 그의 삶이었다.”

이제 그런 삶이 끝나가고 있었다. 갑상선암으로 오랜 투병을 해 왔던 척은 이제 먹을 수도 없게 되었고 더 이상의 치료를 거부하면서 시골집으로 돌아가 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서 나는 서둘러 그를 보러 떠났으나 만나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다음날 도착했을 때, 그는 컴퓨터를 무릎 위에 놓고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그는 매우 늙고 약해 보였으나 그 익숙한 정신은 여전히 그의 눈 속에, 그리고 겨우 키보드를 약하게 쳐서 모니터에 나타나는 글 속에 남아 있었다.

나는 그가 아플 동안 너무나 소원했던 것을 사과했으나 척은 그런 말을 흘려 들으면서, “우리 둘은 너무나 적절하게 다 바빴다”고 하며 타자를 치면서 “그렇지만 지금 너는 이 곳에 있잖아! ” 하고 응답했다.

소식을 이것저것 말하면서 나는 쓰고 있는 책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리고 거룩한 사람들의 삶을 통하여 무엇이 삶을 온전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만드는가를 밝혀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그 주제에 관해 나도 많은 생각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함께 나누자고 청했다. 그는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병든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화가 나고 두려우며 회한을 느끼지 않는지 물었다. 그래서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치명적인 진단을 받으면 무엇보다 먼저 사람들은 혼자 있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다르게 살수도 있었는데 하고 방황한다. 그러나 나는 결코 혼자 있어 본 적이 없다. 나는 좋은 친구들과 공동체에 둘러싸여 살았고 의미 있는 일을 갖게 된 축복을 받았다. 나는 결코 돈이나 가장 잘난 사람이 되려는 압력 때문에 결정을 해 본적이 없다. 물론 되돌아보면 다르게 처리했었으면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만일 달랐더라면 하는 것은 내가 삶에서 배우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그는 때때로 용기를 잃게되는 유혹을 받는다고 인정했다. “도로시 데이가 <긴 외로움>의 후기에서 ‘기쁨의 의무’를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라고 썼던 것을 기억하지. 그러나 내가 누렸던 삶과 오고 있는 마지막을 묵상할 때에 나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 삶이었어. 그렇게 좋은 일과 좋은 친구들을 은총으로 받을 수 있었으니’ 하고 생각해. 나는 우리에게 한번도 의미 없는 선택은 없었다고 확신해. 그런데 우리가 속해있는 문화는 사람들을 의미 없는 소비적 선택으로 거의 질식시키면서 가장 중요한 삶의 결정에 있어서는 그들이 너무나 무력하다는 느낌을 주고 있지.­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니야.”

그는 때때로 멈추고 때로는 타자로 쳤던 말을 고치기도 했다. 그는 너무나 쇠약했다. 그리고 나서 우리 대화의 첫 번 주제에 대하여 다시 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들어오는 순간을, 또한 우리 앞에 놓여진 상황들을 선택할 수 없고, 결정을 하거나 그런 결정 때문에 직면하게 되는 결과들을 선택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는 언제나 결정할 수 있다... 우리는 결코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는 단 하나의 ‘소유물’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존엄성, 성실함, 영혼 같은 것이다. 그 점이 우리를 정의해 주는 결정이며,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첫 번째 ‘삶의 교훈’이지.”

그는 조카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매일 아침 해야 할 결정은, 내가 일어날 수 있고 나에게 주어진 것, 내가 잃은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는 결정이다. 혹은 일어나서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난 여기 있네. 움직이기 시작하자!’ 좋은 일. 좋은 친구들, 그리고 훌륭한 가족에 대해 감사하면 ‘기쁨의 의무’를 기억한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야.”

대화는 그날 늦게까지 계속됐다. 가을 해가 지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삶에 대한 전반적인 만족감을 표현하고 후회가 없다고 말했다. 척은 “도스토예프스키는 모든 시대에 소수의 바보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타자를 쳤다.

그날 우리의 대화는 가족, 친구들, 일 등 평범한 일상에 대한 것이었지만 나는 위대한 영혼과 만났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내가 묘사하려고 애쓰는 온전하고도 행복한 삶을 나름대로 찾았던 사람이었다. 28년이 지난 후에도 나는 여전히 그가 이미 찾은 것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날 밤 돌아오면서 나는 나의 아내와 잠들어 있는 아이들, 그리고 해야할 일, 또한 기쁨의 의무에 관하여 생각했다.

 

로버트 엘스버그 /1955년 미국 잭슨빌에서 태어났다. 존재의 의미와 참된 삶에 이르는 길을 찾던 그는 하버드 대학교를 다니다 2학년을 마치고 1975년 도로시 데이와 함께 5년 동안 일했다. <가톨릭일꾼> 신문 편집장으로 활동하다 1980년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모교로 돌아가 종교와 문학을 공부한 후 라틴 아메리카에서 변화된 가톨릭교회 모습을 체험했다. 도로시 데이의 작품집을 냈으며 하버드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1학년을 가르쳤다. 1987년 신학박사 과정을 마치고 메리놀 수도회 Orbis 출판사 편집장이 되었다. 지은 책으로 <모든 성인들>과 <모든 여인 가운데 복되도다> 등이 있다. 도로시 데이 시성식 추진위원회와 헨리 나웬 재단 위원이며, 현재 세 자녀와 함께 뉴욕 주 오시닝에 살고 있다.

이 글은 2003년, 미국 메리놀 출판사가 발간한 <The Saints' Guide to Happiness>(Robert Ellsberg)를 <참사람되어> 2005년 3월호에서 편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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