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하 음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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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하 음반 있습니까?
  • 김유철
  • 승인 2020.09.29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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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서 다행인 사람

<가톨릭일꾼> 여름호에 실린 한상봉 칼럼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 중에 안치환이 부른 ‘편지’의 작곡가 고승하 선생이 인용되어 깜짝 놀랐다. 내친김에 한번 독자들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고승하를 아시나요?”라고 말이다. 선생은 1948년생이니 올해 칠십하고도 몇 년 넘었다. 그는 음악으로 평생을 살았고 한국민예총 이사장을 역임한 예술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아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물론 이것은 순 필자의 생각일 수 있다.) 사실은 소수만 안다고 하는 것이 다행이기도 하다. 이름 없는 곳에 한가로움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고승하는 여전히 개구쟁이처럼 동요, 시노래, 가요, 성가를 분별없이 짓고 부르면서 살아가고 있다.

오래전 일이지만 등단 30년 동안 시집을 내지 않았던 정공채 시인의 첫 시집 <정공채 시집 있습니까>를 출간한 것이 1979년이다. 시인의 시를 읽고 싶은 독자들이 책방에서 시인의 시집을 찾으면서 물어본 말이 첫 시집이 제목이 된 것이다. 어쩌면 고승하는 그 이상이다. 아무리 큰 음반매장이라도 <고승하 음반 있습니까>라고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NO일 것이다. 고승하 음악인생 50년을 기념한 헌정공연이 2019년에 있었지만 고승하의 이름으로 된 음반은 단 하나도 없다. 그가 게을러서인지, 후배들이 불성실해서인지 모르지만 고승하는 분명히 가난해서 행복하다는 예수의 말씀을 몸으로 살아내는 그리스도인이다.

 

1984년 새로운 세상을 만나다

고승하는 우여곡절을 겪고 난 후 30세가 넘은 1979년 늦깎이 대학생이 되어 음악을 공부하게 되었다. 창원대학교 음악과를 졸업한 후 고승하는 남해상고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하고 곧 마산여상으로 옮긴다. 마산여상이 그의 교사생활 하이라이트이자 끝이기도 하다. 1984년 여름방학을 맞아 교사 연수에 강사로 온 성래운 선생에게 ‘시로 엮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배울 기회를 갖는다. 알다시피 성래운 선생은 참교육 실천과 전교조 탄생에 주춧돌을 놓은 분이었는데 마산여상의 일반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교사연수에 이 분을 모신 것 자체가 참으로 묘한 인연의 시작이다. 암튼 이날 고승하는 석가세존이 보리수 아래에서 득도한 것 이상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촌놈’ 고승하 벌판에 서다

고승하는 서울에서 막 태동한 <민요연구회>에 1984년 이후로 드나들기 시작했다. 민요연구회는 민예총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명목은 ‘민요’를 내세웠지만 장르를 막론하고 군부독재시대에 배제된 문화예술인들이 관계하고 있었다. 그 모임에서 이름만 듣던 신경림, 백기완, 황석영, 김민기, 박인배 등을 만날 수 있었고 고승하는 ‘촌놈’이지만 이 모임에 꾸준히 참가하며 <민요연구회> 창간 회지에 고승하 작곡, 민영 시의 <엉겅퀴야> 악보가 당당히 실렸다.

당시 운동권 안에서 노래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작곡자는 드물어서 작곡이 가능한 고승하의 존재는 문화예술인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고승하는 <우리 노래를 일구는 작곡가 모임>과 <민족음악인협의회> 등의 대표로서 활동하게 된다. 데뷔한지 얼마 되지 않은 고승하가 그런 중책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시대 이미 좀 논다(?)는 사람들은 공안당국의 주목을 받은 반면 고승하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고, 말썽 일으키질 않을 순박한(!) 사람을 고르다보니 그가 얼굴 마담으로서 중앙 무대에 필요했다. 어쩌랴? 이렇게나 저렇게나 ‘촌놈’이 제대로 된 중앙판에서 놀 수 있었으니.

<아름나라>를 시작하다

고승하는 마산지역 민중교회였던 ‘두레교회’에 다니는 아이들과 참교육 학부모회 아이들을 주축으로 1989년 <회원동 아이들>이란 어린이합창단을 만든다. 후일 이 합창단이 유명한(!) <아름나라>가 된다. 그해 겨울 무렵 고승하는 황선하 시인의 시 ‘가자 아름다운 나라로’를 노래로 만들며 전국적으로 알려지는 계기를 맞는다. 그렇지만 이후에도 <회원동 아이들>이란 이름으로 활동했는데 1992년 진주 경상대에서 펼쳐진 행사에서 합창단 이름이 <아름나라>로 불려 지게 되었고, 이후 <아름나라>는 고승하의 표현대로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나가 전국 30곳 이상의 지역에서 어린이합창단 <아름나라>가 조직되었다.

지금도 고승하는 2006년 광주민주화운동 26주년 기념식에서 어린이가 쓰고 고승하가 작곡한 ‘선생님, 광주의 5월을 아세요?’가 불려진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아이들의 말과 글이 노래가 되어 불리는 것은 고승하의 꿈이었다.

 

사진출처=개똥이네놀이터
사진출처=개똥이네놀이터

<철부지> 세 사람

고승하를 말하려면 <철부지>를 말해야 하고, 남기용과 전정명과의 인연을 말해야 한다. 1997년 <민요연구회>시절 인연이 있었던 이오덕 선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오덕 선생은 익히 아는 대로 교육자이자 아동문학가이다. 이오덕 선생이 당시 <우리말 살리기 겨레모임>을 만드는데 고승하를 초대했다. 그 때 찾아간 곳이 서울 경복궁 근처에 있는 출판사인 ‘지식산업사’였다.

창립을 앞두고 모인 사람들 중 상대적으로 젊게 보이고, 목소리가 우렁우렁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남기용 선생이다. 이후 자주 만나면서 남기용과 고승하는 ‘죽’이 맞았다. 우리말에서 시작하여 음악, 문화, 철학 등에 대한 모든 면에서 고승하는 동료이자 스승을 만나 기분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러던 중 남기용 선생이 기타를 잘 치는 친구를 소개했는데 그가 전정명 선생이다.

평북 선천이 고향인 전정명 선생은 두 사람에 비해 보수적 관점으로 때론 언쟁을 하였지만 고승하, 남기용의 부족한 면을 보완해 줄 독서로 다져진 이른바 합리적 보수였다. 이후 남기용, 전정명, 고승하는 <동요를 부르는 어른모임>이란 이름으로 여러 곳에서 함께 공연을 했는데 어느 날 지금은 작고한 이선관 시인이 그들을 보고 “철부지들아!”라고 말한 것이 그대로 그들의 이름이 되어 ‘흰 머리·빨간 셔츠·멜빵 청바지’ 세 사람이 시대의 전설이 된 <철부지>다.

고승하는 음악이다

1995년 고승하 작곡발표회, 2009년 고승하 음악 40주년, 2019년 고승하 음악 50주년 기념공연을 열었다. 보수인 경남지역의 주류 문화예술인들에게 고승하 자신은 오랜 세월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지만 일련의 공연과 음악발표회가 진보적 문화예술계 후배들에게는 분발의 계기에 방점을 찍었다. 고승하는 자신을 위한 일보다는 늘 세상사의 관심에서 잊혔지만 마땅히 새겨야 할 시대의 스승들을 노래로서 부지런히 엮었고 현재도 그러하다. 음악으로 이오덕(교육자) 이선관(시인) 이효정(독립운동가) 등을 기리는 일에 열성을 아끼지 않는다. 2004년에는 당시 동티모르 구스마오(Xanana Gusmao) 대통령을 위해 고승하가 작곡한 <평화일꾼 사나나 구스마오>를 가수 강산에가 불렀고, <티모르 연가>는 가수 김원중이 불렀다.

고승하, 우리 시대의 ‘선생님’

‘음악인 고승하’라고 단출하게 매김 하기에는 무언가 허전하고 부족하다. 어느 사람인들 하나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으랴마는 고승하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고승하는 ‘맑다’라는 표현에 쑥스러워 하는 신앙인이기도 하고, 민예총이나 민음협의 활동가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어린이와 어른 그리고 늙은이’가 한 몸에 들어 있는 분이다. 이름 지어 ‘삼위일체’로서의 고승하다. 일상에서 ‘어린이와 어른과 늙은이’의 영성을 한 몸으로 이뤄 자신의 음악과 삶에서 지금여기를 살아내는 일은 그것이 기적이고 신비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대물림된 음악성을 어려운 환경에서도 놓지 않았고, 구두닦이, 우체국 집배원, 공장노동자를 거치면서 어느 한 순간 늦깎이 학업을 이루어내고 다시 그것을 바탕으로 교사로서 활동하고, 다시 생의 한 순간 시대와 세상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동요 1,500여 곡을 포함해 박노해의 ‘고백’을 비롯한 노동, 환경, 교육, 통일과 반전의 노래 2,000여 곡을 창작했다. 사실 전부가 얼마인지 고승하 자신도 잘 모른다.

그가 뿌린 음악의 씨앗들이 어떤 열매를 맺을지는 모를 일이다. 짧은 글에 고승하 인생을 모두 담을 수 없지만 생의 물살이 세차게 흐르는 여울목은 뒤돌아보면 ‘아름답거나, 아프거나’ 둘 중에 하나인 것이 우리 인생이다. 고승하는 평생 교회를 ‘섬겼지만’ 장로가 아닌 집사로 기쁘게 살며 식사 전 성호를 긋고 밥을 먹는 개신교인이다. 그는 마땅히 시대의 ‘선생님’으로 불려야 한다. 

 

 

김유철 스테파노 시인
한국작가회의
<삶 예술 연구소> 대표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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