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잔해서 좋은 교회
상태바
쪼잔해서 좋은 교회
  • 최태선
  • 승인 2020.09.29 09: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저는 발품을 팔아 물건 값을 비교하여 가장 싼 물건을 삽니다. 불과 몇 백 원 때문에 먼 곳을 가기도 하고 갔던 곳을 다시 가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참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겨우 몇 백 원, 기껏해야 돈 천 원 때문에 그렇게 먼 길을 오간다는 것은 미련한 일입니다. 또 싸다는 이유로 무거운 상품을 먼 곳에서 사서 그것을 짊어지고 걸으며 땀을 흘리는 것도 미련한 일입니다.

때론 이러는 제가 참 쪼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그렇게 쪼잔해지는 것이 감사합니다. 쪼잔해진다는 것이 곧 작아지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곧 쪼잔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면 누구도 여기에 찬성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저처럼 쪼잔해지는 것을 감사하는 사람들이 된다면 하느님 나라가 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다시 교회를 시작하게 된다면 ‘쪼잔교회’라고 교회 이름을 짓고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 ‘쪼잔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통이 크거나 너그럽지 못하고 좀스럽다’입니다. 저는 자신이 대범하고 너그럽고 화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실제로 그런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믿지 못하겠다면 국회의원들을 보십시오. 그분들 중 아무도 자신을 쪼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하는 행동을 보십시오. 이들의 행동이야말로 쪼잔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해답을 공자님이 들려주십니다. “큰 선만을 행하려는 사람은 작은 선도 행하지 못한다.” 정말 그렇습니다.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을 큰 사람으로 여기면서 큰 선을 행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삶을 보면 정말 쪼잔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잘 보십시오. 나라를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군대도 안 가고, 각종 이권에 개입하고, 특권층의 반칙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망국병인 부동산투기에도 앞장을 섭니다.

공자님의 말씀대로 이분들은 큰 선만을 행하려 하면서 작은 선조차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셨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크게 생각하는 만큼 실제 그들의 삶은 쪼잔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들의 특권의식이나 반칙이야말로 쪼잔함의 극치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그들만의 특성이라고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공자님 말씀대로 이것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특성입니다. 스스로를 크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쪼잔한 일들만을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아무 선도 행하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반면에 스스로를 쪼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툰베리와 같은 사람이 되어 온 지구를 위해 일하고 희생하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 어떤 분의 페이스글에서 백영심 선교사를 보고 감탄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사억 원의 상금을 모두 말라위의 학교 건립을 위해 사용하고 자신은 일 달러짜리 옷을 사 입는다는 것에 감동했다는 내용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그러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백영심 선교사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늘 작은 선에 집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철두철미하게 청빈의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먹을 것, 입을 것을 아껴 말라위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그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렇게 해봐야 몇 푼어치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분의 작은 선들이 결국 하느님의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 그분을 통해 하느님께서 일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녀가 쪼잔해졌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쪼잔한 그녀를 통해 일하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르지만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백영심 선교사의 쪼잔함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쪼잔해질 때 하느님께서 일하실 수 있다는 이 영적인 진리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 반대의 길을 가기 때문에 거의 모든 교회들과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헤롯의 누룩’에 감염된 것입니다. 헤롯의 누룩에 감염된 사람들은 앞에서 예를 들었던 국회의원들과 마찬가지로 실제로는 쪼잔한 일들만 하면서도 자신들이 위대한 사람들이란 착각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아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거기에서 벗어난 백영심 선교사와 같은 분들마저 위대한 사람으로 만드는 영적인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달란트의 비유가 생각납니다. 아마도 목사들이 가장 많이 본문으로 택하는 말씀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겐 이 달란트의 비유가 항상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 하필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악하고 게으른 종의 역할로 쓸모없는 종이 되어 어두운 데로 쫓겨나야 했을까요. 한 달란트를 받은 것도 불쌍한데 왜 그렇게 모진 결과를 받아야 했을까요. 고통 받는 작은 자들의 신음소리를 듣고 반응하시는 하나님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은 아닐까요.

저는 그 해답을 백영심 선교사와 같은 분들이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백영심 선교사와 같이 쪼잔해진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가 만일 다른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자처럼 한 달란트를 남겼다면 그것은 한 달란트가 아니라 사억 달란트가 되었을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오직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일하실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자신을 크게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이 받은 한 달란트에 신실하지 못하고 위대한 기회를 날려버린 것입니다. 만일 그가 자신의 쪼잔함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신실할 수 있었다면 그는 백영심 선교사와 같은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제 아내는 저를 인정해주는 사람입니다. 아내는 늘 저를 밴댕이에 비교합니다. 저는 언제나 밴댕이 소갈머리입니다. 저의 진면목을 알아주는 아내가 고맙습니다. 아내만이 아닙니다. 매주 만나는 죽마고우인 친구도 저를 벼룩에 비교합니다. 제가 무얼 주거나 사주면 늘 벼룩의 간을 빼먹고 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오히려 밴댕이와 벼룩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괜히 저 때문에 쪼잔해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사람들에게 위대해지라고 말합니다. 사나이로 태어나 천하를 호령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그 말에 속아 사람들은 작은 선도 행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위대해지는 반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쪼잔해지는 것이야말로 인류와 지구를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위대한 국회의원들이 아무리 법을 열심히 만들어도 결국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쪼잔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분리수거를 잘 하고, 교통법규를 잘 지키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변화시킵니다.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가까운 거리는 걸어서 가는 사람들이 지구를 살립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쪼잔한 하느님의 백성이 될 때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쪼잔한 하나님의 백성은 한 달란트로 사억 달란트를 남길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들이 이 쪼잔함을 이해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을까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며칠 전 저는 동네 농협에서 과일을 사다 직원들에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저는 상하거나 모양이 기형이라서 헐값에 파는 과일을 사다먹습니다. 그런데 그런 과일들은 잘 보고 사야합니다. 특히 복숭아는 겉으로 보아 조금 상해보여도 전체가 상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복숭아를 하나씩 뒤집어보고 있는데 직원이 만지면 상한다고 만지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직원이 자신들이 먹을 만한 것만을 골라놓았다며 그 직원을 편들었습니다. 졸지에 저는 몰염치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 제가 쪼잔해졌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할 말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과 싸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조용히 복숭아를 내려놓고 나왔습니다. 속으로 내가 이런 물건을 사니 나를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도 나고 비참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럴 땐 심호흡을 몇 번 하고 예수기도를 외웁니다.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이 불쌍한 죄인을 긍휼히 여기소서!”

몇 번을 반복하자 마음에 평화가 찾아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쪼잔함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지금 저는 그렇게 절약한 돈으로 노숙자 선생님들에게 만 원씩을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제가 쪼잔해져서 하느님이 그런 저를 통해 일하신다면 저도 백영심 선교사님처럼 민들레국수집 서영남 대표님처럼 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쪼잔교회’를 하고 싶습니다. 쪼잔해진 사람들이 모이고 그 교회에 오면 누구나 쪼잔해지는 그런 교회를 하고 싶습니다. 지지고 볶고 닦달을 해도 쪼잔한 사람들이기에 괜찮은 ‘쪼잔교회’를 꼭 하고 싶습니다. 주님이 코로나로 가일층 어두워진 이 땅에 ‘쪼잔교회’를 세워주셨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우리의 마음에 하느님의 꿈이 새겨질 때

어제 섬 생활을 주제로 한 티브이 프로그램을 보다 제가 일할 수 있는 나이가 십 년도 안 남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미역을 따는 일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위험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갯바위에서 미역을 따다 파도에 휩싸여 바다에 빠지는 일은 다반사였습니다. 수영을 잘해도 거친 파도에 떠밀려 바위에 부딪히면 생명을 부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곳 주민들은 75세가 넘은 분들은 미역을 따지 못하도록 하는 규약을 만들어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이해가 갔습니다.

이제 저도 그 75세라는 나이에 한 자리 수만 남았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런데도 제게는 교회에 대한 열망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제게 그것이 집착이라며 이제 그 집착을 내려놓으라고 조언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것이 저의 집착이라면 내려놓을 것입니다. 그냥 편하게 시골로 내려가 농촌생활을 하려고도 했습니다. 아내도 아이들도 모두 거기에 토를 달지 않았고 아내는 날마다 시골의 부동산을 조사하느라 여념이 없기도 했습니다. 저도 적당한 거처가 정해지면 이사를 갈 요량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라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변수가 등장했습니다. 물론 오래 전부터 교회의 부패와 타락은 문제로 지목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예배 자체가 문제가 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감염의 위험 때문에 예배금지와 비대면 예배 등의 조치가 내려지자 진정한 예배에 대한 성찰이 시작되었고 교회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재해석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그동안 말이나 글로 이야기해왔던 것들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과격하다고 사람들이 오히려 그런 말을 하는 저를 교만하다고 지적했는데 제가 하는 말들에 공감하는 분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쓰는 글들로 예배를 드렸다는 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적어도 이십여 년 전부터 교회에서 이탈한 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분들은 개혁을 말하면서 새로운 교회를 꿈꾸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분들의 시도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곳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뿌리를 내리기에는 한국교회가 너무도 공고했습니다. 결국 그런 분들의 개혁은 유야무야 되었고 그 일을 주도하는 분들 역시 변방의 사람들이 되어 오히려 반기독교적이라는 판단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작은 흐름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마침내 몇몇 대형교회들의 세습이나 돈 문제 혹은 성범죄와 같은 불의가 사회적 지탄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일들 역시 이탈한 사람들이 없었다면,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결코 문제가 되지 않았을 일들입니다. 한동안 떠들썩하다가 수면 아래로 사라질 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변화의 원동력이 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교회가 문제 있는 곳이라는 인식이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여전히 견고해 보이지만 둑이 무너지는 것이 눈에 보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코로나 사태로 인해 마침내 가시권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제가 그런 교회들에서 탈출해야 한다고 말해도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제가 한 말들과 똑같은 말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미 교회를 떠난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이 나가던 교회를 이런저런 이유로 떠났지만 그렇지 않은 교회들을 찾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던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나가본 교회들 역시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던 교회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자 마음에 맞는 사람들이 모여 자기들끼리 예배를 드리는 곳도 생겨났습니다. 그런 분들 가운데는 자신들의 모임을 와서 보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감을 드러내는 곳들도 생겨났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자신이 교회를 하나 세워야겠다는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몇몇 마음에 맞는 사람들이 모여 기존 교회에서 드리던 형식과 같은 방식의 예배를 드린다고 그것이 교회가 된 것일까요. 교회가 정말 마음만 먹으면 아무나 세울 수 있는 것일까요. 교회가 그렇게 간단한 문제일까요.

생각해보면 저는 적어도 40년 이상을 교회와 씨름해왔습니다. 제가 씨름을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저를 그렇게 인도하셨습니다. 제게 교회를 보여주시고 문제점을 발견하게 하시고 당신이 원하시는 교회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시고, 제가 직접 교회를 운영함으로써 그것들을 시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교회를 떠나 생각하고 바라보게 하심으로써 교회에 대해 더 많이 알게 해주셨습니다. 물론 신학교를 가고 목사가 된 것도 그 과정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의 가장 핵심은 가난이었습니다. 적지 않던 제 전 재산이 사라지고 아무런 대책 없이 맨 땅에 내던져진 그 상황이야말로 복음을 알게 되고 복음에 대한 열정이 제 마음에 자리 잡게 된 가장 결정적인 훈련이었고 저는 그것을 하나님의 학교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부족하고 저는 충분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주님의 일을 하려면 반드시 하느님의 학교를 다녀야 합니다. 모세 역시 사십 년을 이 학교에 다녔습니다. 이 학교의 특징은 커지는 것이 아니라 작아지는 것입니다. 모세처럼 학문과 무예에 능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일은 인간의 그런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모세는 그 모든 것을 버려야 했습니다. 모세 자신은 정말 그것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침내 모세 스스로도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부르십니다. 그러나 그 부르심에 응하려면 그가 이제까지 배우고 경험했던 모든 것들을 벗어버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른 지팡이 하나를 든 하느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스스로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결국 돈으로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장소를 마련하고 사람들을 모으고 함께 예배를 드리면 교회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모여 욕심 부리지 않고 민주적으로 교회를 운영하면 좋은 교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렇게 되면 좋은 교회가 될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교회를 세우려면 신학교를 나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신학교육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진짜 교회가 이루어지려면 모세와 같이 하느님의 학교를 나와야 합니다. 그 기간을 자신이 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이 부르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모세는 팔십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가 지은 시편 90을 보면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의 인생은 끝났습니다. 75세에 미역을 벨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더 이상 무언가를 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를 하느님이 불러 당신의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여기서 교회의 주권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교회의 건설은 주님이 직접 하시는 일입니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자신이 교회에 대한 열망이 있다면 충실하게 하나님의 학교에 임하는 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날마다의 삶을 감사하게 받아 충만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르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아무리 더디더라도 기다려야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모두 사라지고 온전히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할 수밖에 없는 무력한 존재가 되었을 때 하느님께서 모세를 부르셨듯이 그 사람을 부르실 것입니다.

교회는 여러 가족들이 평화롭게 모이는 모범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가난한 사람들이나 이런저런 장애와 경제적 빈곤 등의 어려움으로 고생하는 이들에게 특별한 봉사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우리가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인 공교회는 어제나 오늘이나 그 어느 때든지 공고합니다. 우리가 그곳으로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할 때,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하느님의 꿈이 새겨질 때 주님은 그런 우리를 불러 당신의 몸의 지체로 삼아주시고 우리가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아주실 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모여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살게 되는 곳입니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도로시데이영성센터-가톨릭일꾼 후원하기
https://v3.ngocms.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hva82041

종이신문 가톨릭일꾼(무료) 정기구독 신청하기 
http://www.catholicworker.kr/com/kd.html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