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녀님들을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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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님들을 존경합니다
  • 최태선
  • 승인 2020.09.23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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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저는 수녀님들의 이야기에서 도전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래 전 은퇴한 수녀님들이 은퇴 수녀님들을 위해 마련된 안락한 복음자리를 박차고 나가 가장 가난한 사람들 곁으로 간 이야기는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은퇴한 후 거들먹거리거나 먹을 것조차 없어 빌빌 거리는 개신교 목사들과 비교하면 정말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얼마 전 잘 아는 목사와의 대화에서 목사가 은퇴한 후에 비로소 진정한 신앙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은퇴란 없습니다. 목사로서 은퇴하는 것은 단지 헤게모니(주도권)를 내려놓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헤게모니를 내려놓아야 비로소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 지도자에게 애초에 헤게모니는 없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종교지도자들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바로 이 헤게모니입니다. 어제도 나눔의 집에 관한 엠비씨의 <피디수첩>을 보면서 승려들의 권위가 정말 보기 싫었습니다. 수도원에도 교구에도 장상의 권위가 너무 절대적입니다. 개신교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거의 대부분의 종교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중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주변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큰 자가 아니라 작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이와 반대입니다. 어떻게 하든 커지려는 인간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면서 자신은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말합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수녀님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분들이 애초에 커질 수 없는 존재의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분들 가운데도 장상이 되는 분이 없지는 않지만 그런 경우도 대부분 제한을 받고 있는 것을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엄격한 장상도 등장하곤 합니다. 일종의 반작용입니다. 어쨌든 가톨릭이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이유가 수녀님들의 존재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출처=flickr.com
사진출처=flickr.com

오늘 기사를 읽다 수녀님들이 재난지원금이라는 큰돈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어서 당황했다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재난지원금을 큰돈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더군다나 그것을 마음대로 사용하라는 지침에 처음이라서 당황하는 모습은 정말 예쁘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분들이 그 돈을 사용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복음적 가치’와 ‘창조적 사랑’이었습니다. 그 방식에 따라 그분들의 재난지원금은 그야말로 생명으로 풍성해지는 일에 사용되었습니다. 이보다 아름다운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저는 정말 수녀님들에게 마음 깊이 존경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수녀님들과 달리 개신교에서는 목사 안수 문제를 놓고 총회에서 늘 대립을 합니다. 어차피 안 될 일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셔도 여성안수 반대 입장을 지닌 목사들을 설득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총회가 바른 총회입니까. 그런 총회에 속한 교회들이 정말 교회이기나 합니까. 저는 그런 총회, 그런 교회는 그들에게 주어버리고 예수님이 철폐하신 모든 사회적 장벽이 사라진 새로운 교회를 구성하고 건설하는 것이 오히려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새로 세워진 교회는 목사라는 권위 자체가 사라진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사가 다른 사람들의 종이 되어 다른 사람들의 발을 씻어주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코로나로 교회 재정이 어려워지자 제일 먼저 부목사와 전도사들을 정리했다는 기사도 보았습니다. 도대체 그런 교회에서 왜 일을 하려고 합니까. 만일 교회가 정말 교회라면 어떤 일이 벌어져야 할까요. 아마도 사람들은 상상을 못할 것입니다. 본 적이 없으니까요. 모두가 그러니까요. 그러니까 노동조합을 만들어 권리를 보장받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세상에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복음 어디에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까.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가 자기가 중심이 된 사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타인을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타인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운운하고 그것을 챙기겠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결국 악순환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재정이 어려워졌다고 부목사와 전도사를 쫓아내는 자들이나 그들이 쫓아낸다고 권리를 보장받겠다고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나 결국 자신밖에 모른다는 점에서, 복음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것의 근원은 커지려는 것입니다. 큰 자가 작은 자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려는 것입니다, 성서 어디에 그런 내용이 있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주님의 입장이 되어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뭐 하러 당신의 교회를 제자들에게 맡기셨습니까. 정말 억장이 무너지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작은 자들의 나라입니다. 교회는 그런 하느님 나라를 세상에 보여주어야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세상보다 더 커지려는 자들이 교회를 장악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전광훈 같은 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가 하는 일을 보십시오. 어디 복음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습니까. 그는 만담가요, 선동가요, 정치가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를 지지하는 그토록 많은 목사들이 있다는 이 엄연한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드릴 수가 있습니까.

저는 수녀님들의 기사에서 복음적 가치’와 ‘창조적 사랑’ 이야기를 듣고 정말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그분들이 그것으로 사랑을 감염시킨다는 말이 너무도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교회는 복음적 가치를 추구하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창조적으로 사랑하는 곳입니다. 창조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삶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곧 영과 진정으로 드리는 진정한 예배입니다.

제가 늘 이런 말을 해서 사람들이 저를 과격하다거나 교만하다는 지적합니다. 교회 아닌 곳, 아니 맘몬의 신전이 된 곳에 더 이상 머물지 마십시오. 수녀님들처럼 자신들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복음적 가치를 추구하십시오. 커질 수 없기 때문에 더 유리하지 않습니까. 또 그래도 괜찮은 것이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을 보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억울해도 괜찮습니다. 억울하기 때문에 복음적 가치를 더 보존할 수가 있습니다. 창조적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에 감염시키는 일은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입니까.

오랜만에 몸살을 앓았습니다. 지금도 정신이 좀 혼미해서 오늘 글은 갈팡질팡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정신이 혼미해도 복음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무리 몸이 아파도 미소를 잃지 않고 친절한 표정을 간직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어젯밤엔 이러다 그냥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인간이 참 연약한 존재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죽어도 후회할 일이 없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언제 죽어도 헨리 나우엔이 말한 것처럼 주님을 향해 두 손을 뻗고 공중그네를 타면 된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제가 주님의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제 두 손을 잡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생명이 있는 동안 수녀님들처럼 복음적 가치와 창조적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그분들의 종이 되어 섬길 것입니다. 제가 진짜 종이 되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종들의 나라입니다. 그 종들의 나라가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한가를 수녀님들이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분들처럼 커질 수 없다면 그 일이 가능할 것입니다. 커지지 않은 것이 은혜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라는 말은 바로 이처럼 작은 자가 되었을 때 하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 그 은혜를 사모하고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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