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시성 운동, 미국에서 급물살을 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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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 시성 운동, 미국에서 급물살을 타다
  • 마크 패티슨
  • 승인 2020.09.20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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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일꾼운동의 공동 창립자인 도로시 데이의 시성추진위는 바티칸 시성성에 보낼 모든 문서가 내년 중으로 준비될 것으로 믿는다. 그것은 비공식적으로는 1997년에 시작되었지만 2002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노력에 정점을 찍을 것이다. 나머지 과정은 주로 바티칸의 손에 달려 있지만 또한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을 것이다.

메리놀외방선교회의 출판사인 오르비스 북스의 발행인 로버트 엘스버그에 따르면 도로시 데이 사후 얼마 되지 않아 글라렛수도회가 자신들의 잡지 <미국 가톨릭과 소금>을 통해 그녀를 성인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엘스버그는 그의 저서 <모든 성인들>(All Saints)에 데이를 포함시켰고, 1997년 출판 직후에 그녀가 시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연설을 하였다.

1980년대에 도로시 데이의 시성에 대한 의견을 표명한 바 있는 뉴욕의 존 오코너 추기경은 도로시 데이 탄생 100주년 기념 미사에 엘스버그와 그의 가족을 초대했다. 미사 후 오코너 추기경은 그에게 다가와 데이가 정말 성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엘스버그가 그렇다고 말하자, 추기경은 도로시 데이를 아는 다른 사람들을 모아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요청했다. “그는 사람들의 말을 정말로 듣고 싶어 했죠. 추기경은 ‘내가 도로시 데이에게 얼마나 큰 호의를 베풀고 있는지’ 내세우는 식으로 행동하지 않았어요.” “그는 말했죠, ‘나는 하느님께서 원하는 일을 내가 하지 않았다는 양심의 짐을 지고 싶지 않다.’” 엘스버그가 <가톨릭뉴스서비스>(CNS)에 전한 말이다.

가톨릭일꾼운동을 시작하기 전부터 도로시 데이는 굴곡이 많은 삶을 살았다. 도로시 데이 길드(Guild)의 뉴스레터 편집자인 캐롤린 자블로트니는 1918-19년 독감 대유행 시기에 도로시 데이가 간호사로 일했던 이유로 데이의 시간을 (코로나가 유행하는; 역자 삽입) 현재와 연결시킨다. 그녀는 또한 여성 참정권 운동가이자 기자였다. 낙태를 했고 그 경험이 너무 괴로워 두 번 자살을 시도했다.

1934년 창립한 가톨릭 일꾼에서 그녀는 (장차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 참전을 반대하게 될) 자신의 평화주의적 견해뿐 아니라 빈곤층과 노동자들을 돕기 위한 직접적인 행동의 장을 발견하였다.(교황 비오 12세는 1955년 5월 1일을 노동자들의 수호자 성 요셉 대축일로 선언하였다.)

걸려온 전화를 받은 것이 도로시 데이와의 유일한 만남이었던 자블로트니는 어린 시절의 가톨릭 신앙은 “지적인 것”이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믿음을 암기했어요, 그렇죠?” 그러나 1960년대 대학 시절에는 “사회적 동요와 정의를 향한 절규”로 인해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해 보였다. 그녀가 다니던 맨해튼빌 칼리지에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가톨릭 정기간행물”이 있었다. “그 중에 <가톨릭일꾼> 신문이 있었어요. 윤기 나는 표지도 아니었고 크기도 크지 않았죠. 그래서 책장 제일 꼭대기에 놓여 있었는데 그걸 집으려면 자그마한 동그란 의자 하나가 필요했어요.” 자블로트니가 말했다.

“고등학생 때 언니가 어머니께 드릴 선물로 도로시 데이의 자서전 <오랜 외로움>을 가져왔던 것이 기억나요. 어머니가 그 책을 좋아하셨죠. 아마도 세상 물정에 밝은 한 수녀님이 그 책을 언니에게 소개했던 거겠죠. 그들의 설렘을 느꼈어요. 그래서 나도 그 책을 읽었는데 고등학생이 이해하기엔 벅찼죠... 행간의 의미를 읽어야 하잖아요? 하지만 대학생이 되자 ‘그게 그 말이구나.’ 하고 알아차렸어요. 10대 때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도발적인 제목이었음을 깨달았죠.”

매사추세츠 주 우스터에 있는 성 십자가 대학(College of the Holy Cross)의 은퇴한 교회사학자 데이비드 오브라이언은 이렇게 말한다. “그녀를 몇 번 만난 후로 내 인생이 바뀌었어요. 내 학생들 중 많은 이가 평생 가톨릭 일꾼이 되었죠.” 잡지 <공공복리>(Commonweal)에 데이의 부고 기사를 썼던 오브라이언은 그녀를 당대 미국의 “가장 흥미롭고 영향력 있는” 가톨릭 신자로 불렀다. “그녀는 (트라피스트 수도승이자 데이와 동시대인이었던 토마스) 머튼처럼 세상과 떨어져 살지는 않았어요. 대신 도시의 한 가운데서, 그리고 그 시대의 주요 쟁점들 한복판에서 살았죠.” 그가 <가톨릭뉴스서비스>에 한 말이다. “비폭력은 그리스도교 가르침의 가장자리에서 중심으로 옮겨 갔다.”고 오브라이언은 말했다. “가톨릭 가르침에 역전이 온 것이죠. 도로시 데이의 급진적 평화주의는 상당히 용감했습니다. 왜냐면 그것을 옹호하는 어떤 의미 있는 가톨릭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성운동의 부청원자(副請願者)인 조지 호튼은 무보수로 일하고 있다. 그의 아내 자블로트니는 도로시 데이 길드의 뉴스레터를 편집하고, 이 단체의 유일한 고용 직원인 제프 코르겐은 이냐시오 자원봉사단과 몇몇 뉴욕 대교구 직원의 도움을 받아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다. “내가 사람 쓰는 데는 재능이 있다니까.” 웃으며 그가 말했다.

시성 운동이라 해도 돈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웬만해서는 여섯 사람, 어떨 땐 일곱 사람이 필요하다. 시성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 자발적 가난을 살았을 때 이것은 곤혹스런 난제가 된다. 호튼은 말한다. “우린 창립자를 시성하려는 여느 수도회와는 다르죠. 그들은 임시직이든 정규직이든 수도회의 재정에 기댈 수 있어요. 우린 그렇지 못해요. 도로시 데이의 유산은 가톨릭일꾼운동이며, 가톨릭일꾼의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고, 노숙자를 치료해 주고, 정의와 평화를 위해 시위를 합니다. 그들은 도로시가 실천했던 자발적 가난에 충실합니다.”

‘조사 책임자’ 직함을 가진 코르겐은 뉴저지 메튜첸 교구의 개발 및 계획 책임자였다. 그는 자신의 교회법 공부와 사회사목 경험을 결합하여 지금의 일을 하고 있다. 시성에 필요한 문서 준비와 관련하여 바티칸에는 엄격한 절차가 있다. 도로시 데이가 말하거나 출판한 모든 이야기를 기록하는 50명이나 되는 자원봉사자의 도움으로 이러한 준비 작업이 마무리되고 있다. 작업이 모두 끝나면 문서는 최대 3만 페이지까지 될 것으로 코르겐은 예측한다.

그는 데이에게서 어떤 놀라움을 발견했는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데이의 가톨릭일꾼 이전의 생활에 대해서는 예외적으로 언급하였는데, 그는 이것을 ‘보헤미안’으로 특징지었다. “보헤미안, 보헤미안, 보헤미안. 뉴욕에서 20대를 보내고 있는 보통의 젊은이를 생각해 봅시다. 20대라면 뭔가 대단한 것에 대해 이야기 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데이는 기자들이나 급진주의자들과 어울리며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코르겐이 말했다. “내겐 그녀의 라이프스타일이 오늘날의 20대와 크게 달랐던 것 같지는 않아요.”

하지만, 코르겐이 덧붙였다, “우리는 그녀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알 수 있는 조짐을 젊은 도로시에게서 볼 수 있어요. 밤새워 술을 마시는 날들이 이어지다 어느 날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한 교구로 여행을 가게 됩니다.” 사실혼 관계였던 포스터 배터햄에 의해 임신이 되자 그녀는 결혼을 요구했다. 배터햄은 거절했다. “그는 그녀에게 일생의 사랑이었지만 그녀만큼이나 고집스러웠다.”고 코르겐은 말했다. “우리 결혼해야 해.”, “그건 내 원칙에 어긋나.” 하지만 배터햄은 다음에 맺은 연인이 불치병에 걸렸을 때, 데이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데이는 그녀를 도와주기로 했다.

“앓고 있던 사람은 데이가 사랑했던 남자를 데려간 여자였죠. 그런데도 데이는 ‘그래, 이게 내가 할 일이야.’ 하는 식으로 그 여자를 보살펴 준 것이에요.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연애를 해 보았겠지만 이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저건 정말 숭고한 미덕이야. 이런 사람이 성인이 아니고 무엇이야?’”

엘스버그는 데이의 낙태가 성인될 자격에서 결격사유가 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누가 뭐래도 낙태는 그 자체로 논의의 여지가 없는 죄라면서, 그러면 영원한 지옥불에서 타오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죄와 구원에 대한 가톨릭적 혹은 그리스도교적 이해를 대변하지 못합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통회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돌아선다면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데이를 낙태를 한 여성의 수호성인으로 간주하여 교회와 사회에 대한 그녀의 기여를 최소화하는 것 또한 잘못이다. “그것은 마치 성 바오로가 살인자의 수호성인이 되어야 한다거나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문란한 사람들의 수호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엘스버그는 이러한 이해를 ‘피상적’이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걸림돌이 있는데 그것은 자주 반복되어 인용되는 데이의 발언이다.

“나를 성인으로 만들려 하지 마세요. 난 그렇게 간단히 성인으로 치부되기를 바라지 않아요.”

자블로트니는 이것이 모두가 그리스도교적 자선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외면하고 포기하게 만드는 걸 경고하는 말이라고 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을 숭배의 대상으로 받들며 ‘오, 도로시 데이 성인이여, 당신의 공로로 자비의 활동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식으로 처신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어요. 그렇게 되면 우리들 자신은 성인이 될 기회가 없게 되죠.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핵심적 통찰 중 하나는 우리 모두 성인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입니다.” 

[출처] <가톨릭뉴스서비스>, 2020년 4월 29일 / 이준균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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