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적 급진주의자 김종철, 가톨릭과 맺은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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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적 급진주의자 김종철, 가톨릭과 맺은 인연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0.09.20 11: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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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2020년 6월 25일 이승을 떠나신 그분 장례식장에서 황대권 선생과 박병상 선생, 박승옥 선생, 이문재 시인을 만났습니다. 이분들 모두 <녹색평론> 편집자문위원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 중에 내세울만한 대학교수가 끼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녹색평론>이 얼마나 현장 지향적인지 알아보게 하는 시금석이기도 합니다. 김종철 선생이 왜 한사코 리 호이나키 같은 이를 사랑했는지 알 것만 같습니다.

2018년 여름에 돈암동 성골롬반선교센터에서 열린 가톨릭일꾼세미나에서 김종철 선생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은 이반 일리치와 그의 가장 친밀한 벗이었던 리 호이나키(Lee Hoinacki)”였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김종철 선생이 여느 지식인들과 얼마나 다른 견해를 지닌 분인지 알기 위해 그분의 발언을 길지만 여기에 소개합니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라는 책을 쓴 호이나키는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박사논문을 포기하고 ‘미국 안에서는 미국을 보기 어렵다’며 베네수엘라에 갔던 분입니다. ‘평생 망명객으로 산다는 것은 무책임하고 뿌리 없이 사는 것’이라는 생각에 다시 미국에 돌아와 박사과정을 마치고 어느 혁신적인 대학에서 교수노릇을 했지만, 결국 권위적인 학교체제와 학문에 염증을 느끼고 시골 벽지에 내려가 농사를 짓습니다.

생활비를 요청하는 딸의 편지를 받고 현금을 마련하기 위해 호이나키가 인근에 있던 대학에 취직을 했는데, 청소부로 일한 겁니다. 그중에서도 남들이 기피하는 화장실 청소를 도맡아 했다는데, 책에서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도 갑자기 화장실 청소가 하고 싶더군요. 내가 스무살 때 호이나키를 알았다면, 나는 영문도 모르고 대학 영문과에 들어가지 않았을 겁니다. 호이나키의 이 이야기는 ‘급진적 겸손함’이 뭔지 알려줍니다. 호이나키가 만난 사람 가운데 도로시 데이도 그런 사람이었죠.

호이나키는 <가톨릭일꾼> 편집자였던 로버트 콜스가 처음 도로시 데이를 만났을 때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가 처음 메리하우스(환대의 집)에 갔을 때 도로시 데이는 횡설수설하는 어느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도로시 데이는 콜스를 힐끔힐끔 쳐다보더니, 틈을 내어 다가와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두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볼 일 있습니까?’ 당연히 자기를 만나러 왔을 텐데, 도로시의 의식에서는 그 여인과 자신 사이에 구별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겸손함의 극치’입니까? 호이나키는 청소를 하면서 하느님을 만나고 여기서 무한한 희열을 느낍니다. 이 사람은 한없이 자신을 낮춘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려줍니다.

리 호이나키는 가톨릭일꾼이던 헤네시가 쓴 <또 하나의 전쟁>이라는 글을 소개합니다. 매카시 선풍이 부는 냉전시대에 미국 정부는 소련을 적으로 규정하고, 안보와 국방 운운하며 전쟁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국민들에게 방공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날도 사이렌이 울리고 사람들은 방공호로 대피했지요. 그런데 헤네시는 길을 걷다가 사이렌 소리를 듣고도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경찰이 왔지만 헤네시는 방공호로 들어가길 거부했습니다. 내가 전쟁과 냉전에 저항할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한 거지요. 친구들이 ‘네가 그렇게 해서 무슨 효과가 있느냐?’고 묻자, 헤네시는 대답합니다. ‘내가 미국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미국이 나를 변화시킬 수는 없다는 것은 분명히 보여줄 수 있다.’ 이런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생각해 봅니다. 나는 그들의 신앙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사진출처=프레시안
사진출처=프레시안

평생의 도반, 평생의 스승

공교롭게도 이반 일리치는 가톨릭교회의 사제였고, 호이나키는 도미니코회 수사였습니다. 물론 가톨릭일꾼을 했던 도로시 데이와 헤네시 역시 가톨릭 신자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김종철 선생이 유일하게 ‘스승’이라고 불렀던 분이 장일순 선생이었는데, 그분도 가톨릭 신자입니다. 장일순 선생의 세례명은 ’세례자 요한‘입니다. 

김종철 선생은 1992년 9월 원주에서 처음으로 장일순 선생을 만났는데, 그게 마지막 만남이기도 했지만, 김종철 선생은 그분을 평생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김종철 선생은 “우리는 흔히 학교에서 가르침을 받은 사람만 선생님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데 그것도 중요하지만 진짜로 필요한 것은 사회생활을 하고 삶을 조망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구체적인 물음에 직면했을 때, 그때 진짜 스승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물으며, 자신에게는 그 스승이 장일순 선생이라 했습니다.(<월간동아> 1998년 3월호 참고)

김종철 선생은 어려운 일에 부딪히면 “장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할까?” 되묻곤 했다고 합니다. “장 선생님과 같은 나라에 태어났다는 데 고마움”을 느낄 정도였으니, 그 존경의 마음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시사인> 2009,1.17) 김종철 선생이 장일순 선생한테 감명을 받은 것은 생태주의라는 거대담론이 아닙니다. 김종철 선생은 결정적으로 자기 마음을 사로잡았던 장일순 선생의 두 가지 이야기를 전합니다. 하나는 어려서 들었던 할아버지가 아버지와 나눈 대화입니다. <나락 한 알 속의 우주>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아홉 살 땐데, ‘돈 삼백 원을 아무개가 꿔가서 안 가져 오니 제가 가서 얘기 할까요?’ 하고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여쭈었어요. 그러니까 내 조부님 말씀이 ‘너도 자식 키우잖니, 돈을 줬으면 그만이지 달라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 하시는 거예요. ‘갚을 마음이 있어야 되는 거지, 갚을 마음이 없는 사람한테 가서 돈을 달래면 돈은 받지도 못하면서 사람을 잃고, 또 갚을 마음은 있는데 돈이 없는 사람한테 가서 달래면 그 사람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워. 그러니 그런 슬기롭지 못한 짓은 하지마라.’ 하고 당신 자식을 그렇게 가르치시더라구요.”

또 한 대목은 이렇습니다. 장일순 선생의 이웃에 장사하는 할머니가 살았는데, 그만 기차 타고 오다가 원주역에서 소매치기를 당한 모양입니다. 이분이 선생한테 와서 울며불며 하소연을 했고, 장일순 선생은 그날부터 원주역 광장에 나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앉아 있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왜 앉아 있는지 더러 물어보기도 하고, 그래서 소문이 났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되는 날 소매치기가 선생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빌었답니다. “제가 소매치기를 했습니다. 일부 쓰고 일부 남았습니다. 나중에 벌어서 갚겠습니다.” 장일순 선생은 그 돈을 할머니에게 전달하고, 다음 날 소매치기를 찾아가 소줏집에 데려가 술을 사면서 이렇게 말했다지요. “내가 자네 영업을 방해했지? 용서하게.”

 

장일순 선생
장일순 선생

장일순 선생과 관련된 이런 비슷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김종철 선생이 바란 것은 삶의 스승이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시시비비를 넘어서는 연민이었습니다. 이 힘을 장일순 선생이 가톨릭(서학)에서 배웠든 동학에서 배웠든 상관없습니다. 사실 서학과 동학은 배다른 형제이고, 사람에게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영성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말과 ‘하느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말씀은, 그 말씀을 진언(眞言)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똑같은 행동을 낳기 때문입니다.

불경의 시대에 ‘믿음’을 말하다

김종철 선생은 “인생의 본질은 의외성에 있다”는 이반 일리치의 말에 공감합니다. 상식과 관행에서 의미를 찾지 않는 급진적인 태도입니다. 김종철 선생은 <뜻밖의 소식>(2015.6.15.)과 나눈 인터뷰에서 교황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복음의 기쁨>에서 통제받지 않는 자본주의를 경제독재라 비판하자, 김종철 선생은 “밑바닥 사람들이 해야 할 말을 교황이 한 것”이라며 “가톨릭교회의 정상에 있는 사람, 계급사회의 정점에 있는 교황이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은 뜻밖이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김종철 선생은 “종교적인 경전을 살아있는 감성으로 흡수한 사람들은 모든 것이 전문화 되고 상업화 된 지금의 산업 체제를 견디지 못하고 ‘노우’(No)했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상식과 관행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이 독실한 신앙에서 나온다는 거겠죠. 뒤집으면, 상식과 관행을 거부할 힘이 없는 이들은 사실 신앙인이라 말할 수 없다는 거겠죠.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김종철 선생이 그렇게 존경한다던 일리치와 호이나키, 도로시 데이, 장일순 선생이 제도권 교회에서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지학순 주교 같은 분을 빼면) 그 이유는 기성 교회의 상식과 관행 역시 거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김종철 선생은 가톨릭교회가 기득권층을 변호하며 권력화 된 역사를 알고 있었지만, 예수가 정치범으로 처형된 것처럼 불의한 사회에 대한 저항의 맥락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있다는 사실에 갈채를 보냈습니다. 실상 진짜 신앙인들은 교회 안에 있지 않고, 교회와 세상의 경계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김종철 선생은 일리치를 통해 통절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김종철 선생은 일리치를 사상가일뿐 아니라 제 사상을 몸으로 살아냈기 때문에 존경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를테면 뺨에 암 종양이 생겼으나 “병원이 병을 만든다”는 신념에 따라 2002년 74세로 죽을 때까지 일리치는 병원을 거부하고 진통을 완화시키는 아편에 의지해 고통을 견뎠습니다. 김종철 선생도 일리치를 알고 난 뒤로 30년 이상 병원에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백사실 계곡에서 마주한 그분의 돌연한 죽음도 평소 병원에서 건강진단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다만 김종철 선생은 고백하건대, 치통은 도무지 참을 수 없어서 치과에는 다닌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의 도반이자 스승인 일리치는 질병으로 인한 고통마저 감수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중세연구가이기도 했던 일리치는 “알몸으로 우리는 벌거벗은 그리스도를 따라야 합니다.”(Nudus nudum Christum sequi)라는 가톨릭의 오래 된 믿음을 따르는 것입니다. 일리치는 60년대에 시작된 미국의 제3세계 개발사업에 반대하고 이를 지원한 교황청 입장을 ‘문화제국주의’라고 비판하는 바람에, 1968년 바티칸의 종교심문을 받고 결국 1969년 ‘정치적인 부도덕’을 이유로 사제직에서 쫓겨났습니다. 하지만 김종철 선생은 일리치는 죽을 때까지 자신을 ‘교회의 아들’로 여겼다면서, 그의 신앙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김종철 선생은 서울 합정동에 있었던 신앙인아카데미 강연(2009,9,19)에서 오히려 “우리시대는 믿음이 없어서 촐랑댄다”고 비판합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를 개신교 장로였던 이명박 대통령에게서 발견합니다. 김종철 선생은 이명박에게는 “믿음이 없다”면서, “그를 나쁜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비판합니다. 덧붙여 4대강 사업이든 용산참사든 정치적인 문제를 넘어서 본질은 ‘종교적인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이 문제들은 “자기를 초월한 어떤 것이 있다는 것, 자기가 전부가 아니라는 믿음이 없는데서 나온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하늘을 두려워 할 줄 모르는 불경(不敬)하고 믿음이 없는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리 호이나키, 이반 일리치, 도로시 데이

주류사회와 교회를 넘어서

김종철 선생은 일리치의 견해를 따라서 제도화 된 모든 체제 자체를 문제 삼습니다. 하지만 제도는 ‘필요악’입니다. 본인은 ‘아나키스트’가 아니라고 하지만, 그이가 급진적인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김종철 선생은 필요악인 국가에 압력을 넣어 국가가 “위선적으로라도 선을 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스스로 거룩하다고 믿는 교회는 더 위험합니다. 일리치가 언급한 라틴 격언처럼 “가장 좋은 것이 부패할 때 가장 나쁜 것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때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집 안에 양초와 담요와 마른빵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문을 두드리면 양초를 불을 밝혀 그를 맞아들이고 방으로 안내해 담요를 깔아주고 먹을거리인 마른빵으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각 가정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신으로 펼치던) 구휼이 4세기 초에 그리스도교가 로마 국교가 되면서 사라집니다. (가난한 사람을) 구휼하는 것을 제도화된 교회가 맡으면서 (각 가정에서) 양초와 담요와 마른빵이 사라진 것입니다.”(<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창간기념강연,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 성당, 1009.3.27.)

김종철 선생은 일리치를 통해 제도적 사랑을 문제 삼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종교전문가인 레위나 사제들이 아니라 유다인들에게 이방인처럼 취급당하던 사마리아 사람의 자발적 행동을 통해 실현됩니다. 복음에서 예수가 전한 착한 사마리아사람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자신을 경멸하던 유다인의 상처를 치유해준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은 ‘의외성’ 때문에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본질을 잘 알려줍니다.

“결국 자발성이 문제죠,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고. 배운 사람들은 다 지나갔는데, 지금의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관계처럼 유다인들에게 껄끄러운 관계였던 사마리아 사람이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이웃사랑은 국적과 혈족, 신분을 따지지 않고 하느님의 아들딸로서 벌거벗은 몸과 마음으로 다른 인간에게 다가서 돌봐주는 사랑입니다.”(<뜻밖의 소식>, 2015.6.25.)

그래서 김종철 선생은 제도를 끊임없이 의식하고 비판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관료적이고 경직된 교회 시스템을 내부에서 계속 비판할 수 있어야 그리스도교도 살고 그리스도인도 복음을 살게 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언제든지 누구나 손 내밀어 구조하려는 인간 본성을 확인시켜주는 공감능력”은 혼자서는 버겁습니다. 그래서 요청되는 것이 (제도가 아니라 또는 제도 안에서 제도를 넘어서 발생하는) 우정과 환대를 나누는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공동체는 급진적 삶을 가능케 하는 토대입니다. 세상의 상식과 관행에 대하여 ‘아니요’라고 저항할 수 있으려면 먼저 우정(friendship)으로 이루어진 그물망(networking)을 형성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저항이 혼자서 외롭게 하는 무시무시한 결단이 아니라, 유쾌하고 명랑한 발언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게 꼭 교회가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게 김종철 선생의 생각입니다. 김종철 선생이 <녹색평론>에서 줄기차게 간디가 강조했던 마을공동체의 회복에 공감하고,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인간성의 한 조각을 여전히 쥐고 있는 제3세계 사람들에게 애정을 보이는 이유입니다.

김종철 선생은 아주 오랫동안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 라다크에서 배운다>에 정을 곱들이고 있었습니다. 일리치가 중세의 비전으로 현재를 보려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가 이천 년 전 예수와 교부들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지속가능한 교회의 미래가 열리는 것처럼, 우정과 환대의 공동체가 개별화된 자본주의적 인간을 구원하리라 믿은 것입니다.

김종철 선생은 “훌륭한 삶이란 사랑으로 고무되고 지식으로 인도되는 삶”이라고 했던 버트런드 러셀을 닮았습니다. 러셀은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는 책을 쓴 것처럼 그리스도교를 비판하며 스스로 무신론자를 자처하였습니다. 하지만 김종철 선생은 어느 종교에도 속한 바 없었지만 그리스도교의 비전 안에서 급진적 견해를 지녔던 그리스도인들을 만날 수 있었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종교와 사상에 앞서 ‘사람’이라고. 어떤 이들과 우정의 그물망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느냐가 그 사람을 결정짓습니다.

김종철 선생이 장일순과 이반 일리치, 호이나키와 도로시 데이에게서 우정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지금 기억하고 있는 그런 김종철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바랐던 시인의 마음은 공경의 마음이고, 공경의 마음은 자기를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소년시절부터 시인이 되는 게 꿈이었다는 김종철 선생은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삼인, 1999) 서문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옥으로 가는 길을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방향 전환”이라고 합니다. 이 시점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내면화의 과정, 생태적 존재로서의 우리 자신의 본성을 깊이 느낄 수 있는 능력을 되찾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회심이겠지요.

“우리가 아무리 입으로 환경위기와 생태적·사회적 파국에 관해 말하고, 그것을 머리로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깊은 내면에 충격을 주지 않는 한 모든 것은 부질없는 잡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 책에서 “살아있는 생명을 돌보고 보살피면서, 어느 하나도 상처받지 않게 마음 쓰며, 상처받은 것은 깊이 위무하고 품속으로 거두어들이려는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명 가진 존재들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의 유지를 늘 중시하는 정신”을 ‘시(인)의 마음’이라고 부릅니다. 그 시인의 마음이 장일순과 일리치와 호이나키와 도로시 데이를 호명하고, 그들과 우정을 나누게 한 것입니다. 이제 이승을 떠난 선생께서 부르면 응답하던 벗들과 더불어 하느님 자비 안에서 기뻐하시길 빌어 봅니다.

 

*이 글은 <가톨릭평론> 2020년 9-10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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