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블루 시대, 종교지도자들의 민낯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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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블루 시대, 종교지도자들의 민낯이 드러난다
  • 최태선
  • 승인 2020.09.20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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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제겐 사실 고민이 별로 없습니다. 오래 전 들은 이야기가 하나 생각납니다. 목사님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본문으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교인들을 향해 “원수가 없는 분 있으면 손을 들어보십시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가 크게 웃었습니다. 안도와 동료의식의 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분이 손을 들었습니다. 나이 드신 할아버지였습니다. 목사가 그분에게 “어르신은 정말 원수가 없으십니까?”하고 묻자 고개를 끄덕이며 “오래 사니까 원수들이 먼저 다 죽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어르신은 정말 원수가 다 죽어서 원수가 없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원수는 죽었지만 그분이 살아계시는 한 원수들은 그분의 마음속에 살아 있습니다.

그냥 웃자고 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수라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마음의 문제라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고민이 별로 없다는 것은 마음을 조금 비워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별로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기대하는 것이 없으니 실망할 일도 없습니다. 특히 가난과 무력함을 적극적으로 원하게 된 이후에는 오히려 다른 분들이 기뻐하는 일들이 제게는 고민거리가 될 뿐 무엇이 부족하거나 힘이 없어 무엇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제 고민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러한 부족함과 해결되지 못한 일들은 저에게 주어진 은혜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전광훈처럼) 저를 날뛰지 못하게 하고 저를 교만하지 못하도록 해주는 정말 귀중한 은혜의 방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무력함 속에서 저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게 됩니다. 어찌 생각하면 제가 니힐리스트와 사디스트가 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저만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온갖 걱정을 다 끌어 모아 제 걱정으로 삼습니다. 특히 요즈음처럼 ‘코로나 블루’라는 말이 실감나는 시절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걱정도 팔자라는데 정말 제가 그렇습니다. 정부가 국민에게 지원하는 재난지원금을 선별지원금으로 결정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정부로서는 고민의 산물입니다. 하지만 정부가 정하는 기준에는 항상 억울한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억울한 사람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기준이라도 있으니 억울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정말 힘들고 어려운 사람은 그러한 기준에 아예 접근조차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저는 지난 번 재난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살고 있는 집에 주민등록을 할 수 없는 신용불량자이지만 그래도 제 이름을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해 준 친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이득을 보았습니다. 제 주소가 다른 곳으로 되어 있어서 딸의 소득 때문에 받을 수 없는 서울시의 재난지원금 삼십만 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이유로 아예 주소가 말살된 분들은 재난지원금을 받지 못했습니다. 노숙자 선생님들은 대개 주소지가 등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 분들은 구걸을 하고 있어도 재난지원금을 신청조차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코로나 블루’로 불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해마다 해외나들이를 하던 사람들이 해외를 나가지 못하면 답답합니다. 해마다 관광지를 방문하던 사람들도 관광을 못하면 답답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답답한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영업자들이 힘들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몇 백만 원씩을 지원해주자는 생각도 좋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돈을 받으면 가장 먼저 그 돈이 밀린 임대료를 갚는 데 사용될 것입니다. 결국 가장 힘든 사람들에게 지급한 지원금이 또 다시 가만히 앉아 있어도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의 주머니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임대료가 걷히지 않아 힘든 것도 힘든 일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그런 힘든 일을 생존을 위협받는 사람들 앞에서 운운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또 자영업자들보다 더 힘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코로나 블루로 일자리를 잃은 일용직 여성 노동자들입니다. 이분들은 자영업자들이 문을 닫기 전에 이미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수가 37만 명이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제 아내도 그 숫자에 포함되었습니다. 한참을 놀았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굶는 것을 걱정하지 않으니 감사하다고 생각하며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추석선물 매장에 이주일간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파는 물건이 많이 팔리면 몸이 힘들고 안 팔리면 눈치가 보입니다. 이래저래 힘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일자리마저 경쟁이 심해지니 분위기가 살벌해졌습니다. 조그만 일에도 서로 싸우게 되는 그런 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 코로나 블루가 아니라 코로나 레드라고 이름을 붙여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불같이 분노하지 않으면 제 밥을 못 찾아 먹는 그런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전 국민 지원이 옳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런 걸 결정하는 건 국민의 힘을 내세우는 정당이나 정치가들의 몫일뿐입니다. 만일 ‘국민의 힘’이 정말 국민들의 힘을 믿었다면 강력하게 전 국민 지원을 주장했어야 합니다. 그들이 믿는 국민의 힘은 진짜 국민의 힘이 아니라 전광훈식의 국민의 힘일 뿐입니다. 자기들의 구미에 맞고 자기들의 정적에 대항할 수 있는 힘으로서의 국민의 힘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정말 국민의 힘을 대변하는 정당이 되고자 한다면 국민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거기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처럼 기득권자들인 자신들의 권리 유지를 위해 국민의 힘을 이용하려 한다면 그들은 국민의 힘에 의해 퇴출을 당할 것입니다. 그것은 여당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권력의 속성이며 가진 자들의 사고의 한계입니다.

그러한 권력의 속성과 가진 자들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역시 종교입니다. 종교는 정부가 어찌할 수 없는 사각지대를 커버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종교의 공통점 혹은 종착역은 공감이며 긍휼입니다. 공감과 긍휼이 사라진 종교는 종교로서의 존재의미를 상실한 사회악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고통 받는 사람들의 마지막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코로나 블루 시대는 모든 종교를 시험하는 시험대가 되고 있습니다.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미리엘 주교가 생각납니다. 미리엘 주교는 자비의 첫 번째 증거를 청빈이라고 여겼습니다.

"사치한 생활을 하는 사제는 하나의 모순이다. 사제란 언제나 가난한 사람과 함께 해야 한다. 노동의 먼지 같은 저 신성한 빈곤을 조금도 갖지 않고 어떻게 밤낮으로 끊임없이 일어나는 갖가지 불행, 갖가지 궁핍을 어루만질 수 있겠는가? 활활 타는 난로 곁에 있으면서 추위에 떠는 사람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용광로에서 쉴 새 없이 일하면서 머리카락이 그을지 않고, 손톱에 때가 끼지 않고, 한 방울의 땀도 흘리지 않고, 한 줌의 재도 얼굴에 묻히지 않는 노동자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미리엘 주교와 같은 종교지도자들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며칠 전 오정현 목사의 연봉이 십억이 넘는다며 분노하는 페친의 글을 보았습니다. 미리엘 주교와는 달라도 참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인들과 점심식사도 함께 먹지 않는 그가 그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오래 전 다니던 교회가 건축을 하던 당시 9층 교회 종탑 밑 작은 공간을 기도실로 꾸몄습니다. 그곳을 담임목사만의 기도장소라며 다른 사람들이 올라가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기도장소의 이름을 ‘지성소’라고 붙였습니다. 신성모독이라는 저의 지적에 얼마 가지 않아 그 이름을 지웠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목사와 그 교회 사람들의 사고는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목사들이 이따위 사고를 하기 때문에 청빈을 부인하고 청부론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청부론을 주장하는 목사가 사람들에게 많은 지지와 큰 존경을 받습니다. 그 이유를 저는 오정현 목사와 같은 사고를 지닌 목사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코로나 블루 시대는 이런 종교와 종교지도자들의 민낯을 드러나게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람들에게 그 민낯을 볼 수 있는 은혜가 임하기를 정말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무리 사랑을 말하고 아무리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말해도 미리엘 주교처럼 청빈의 삶을 살지 못하는 종교지도자는 하나의 모순일 뿐입니다. 그런 모순에도 자신들의 지도자들을 맹신하는 분들이 바로 맹신도이며 광신자입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루카 6,36)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연민과 자비를 가지고 다가갈 때, 미리엘 주교처럼 자비를 보여주는 사람으로 살아갈 때 복음은 비로소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될 수 있습니다. 상처투성이였던 얼어붙은 장 발장의 마음을 녹인 것도 미리엘 주교의 자비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영화나 소설 속이 아니라 이 코로나 블루 시대의 한복판에서 이 자비를 경험하고 변화되는 성령의 역사를 보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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