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무력한 하느님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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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무력한 하느님의 초상화
  • 헨리 나웬
  • 승인 2020.09.20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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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의 "우리를 초대한 길들"-7

세계를 지배하고 사람들과 그들의 땅을 파괴시키는 악마적인 힘에 대해 하느님은 어떻게 응답하셨고 또 지금은 어떻게 응답하시는가? 하느님은 무력함을 선택하신다. 하느님은 완전한 무력함의 상태로 인간역사 속에 들어오기로 선택하셨다. 그 거룩한 선택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을 이룬다. 나자렛 예수를 통하여 무력한 하느님은 권력의 환상이 지닌 가면을 벗겨버리기 위하여, 세상을 지배하는 어둠의 왕자를 무력하게 만들기 위하여, 그리고 분열된 인류를 새로운 일치로 이끌기 위하여 우리들 가운데 나타나셨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전적이고 완화되지 않은 무력함을 통하여 당신의 거룩한 자비를 보여주신다. 하느님의 이 철저하고도 거룩한 선택은 영광, 아름다움, 진리, 평화, 기쁨 그리고 무엇보다도 권력에 대한 완전한 박탈 속에서, 완전한 이탈을 통하여 사랑을 드러내고자 하는 선택이다. 우리가 이 거룩한 신비를 포착하기란 매우 어렵거나 거의 불가능할 정도이다. 우리는 계속 “전능하시고 강력하신 하느님”이라고 기도하지만 이 모든 힘과 세력은 “너희가 나를 보면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을 드러내는 분에게서는 찾을 수가 없다.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자 한다면, 그 전체 삶이 약함으로 포장되었던 나자렛의 사람을 찾아봐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약함은 하느님의 마음에 이르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준다.

힘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친밀함을 환영하지 않는다. 우리는 힘을 가진 사람들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우리를 다스릴 수 있고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을 하라고 강요할 수 있다. 우리는 힘을 가진 사람들을 존경한다. 그들은 우리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고 그들 마음대로 줄 수 있거나 거부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을 부러워한다. 그들은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에 갈 수 있고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가 무서워하거나, 떨어지거나, 부러워하지 않기를 바라신다. 하느님은 마치 엄마 품에 있는 아이들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친밀함 속에 쉴 수 있도록 가까이, 매우 가까이 다가오기를 원하신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그래서 하느님은 아기가 되셨다. 누가 작은아기를 무서워할 수 있겠는가? 작은 아기는 전적으로 부모, 간호원, 보살펴주는 사람들에게 의존한다. 그렇다, 하느님은 너무나 힘이 없어서 많은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먹고 마시거나, 걷거나 말하거나, 놀거나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하느님은 자라나기 위해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살고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위하여 인간존재에게 의존하셨다.

그렇다, 참으로 하느님은 너무나 무력한 처지가 되기를 택하셔서 당신 사명의 실현을 전적으로 우리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당신의 팔에 안겨 흔들거리는 아기를 당신이 어떻게 두려워할 수 있겠는가? 너무나 작고 연약한 아기를 어떻게 존경할 수 있으며, 당신의 부드러움에 그저 웃기만 하는 아기를 어떻게 부러워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육화의 신비인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 다른 인간들과 전혀 차이가 없는 인간이 되셔서 전적인 약함으로 권력의 벽을 깨뜨리셨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어떻게 끝났는가? 십자가위에서 바로 그 사람이 벌거벗기운 채, 손과 발이 못 박혀서 매달려 죽었다. 구유의 무력함이 십자가의 무력함으로 끝났다. 사람들이 그를 조롱하고 비웃으며 얼굴에 침을 뱉고 소리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구했다; 그러나 자신은 구하지 못하는구나! 저 사람이 이스라엘의 왕이래. 십자가에서 한번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고 말고”(마태 27,42).

그분은 십자가에 매달리고, 매질 때문에 살은 찢어져 떨어져나가고, 친구들의 거부와 적들의 괴롭힘 때문에 가슴은 무너지며, 마음은 번뇌 때문에 고문을 당하고 그분의 정신은 버려짐의 암흑 속에 덮여져 버렸다 - 전적인 약함이며 전적인 무력함이다. 그렇게 하느님은 우리에게 거룩한 사랑을 드러내시기로, 연민의 품속으로 우리가 돌아가게 하시기로, 그리고 분노가 무한한 자비 속에서 녹아져 내렸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키기로 선택하셨다.

"하느님은 다른 인간존재와
하나도 다르지 않게
사람이 되셨다.
전적인 무력함 속에서
권력의 벽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그러나 나자렛 예수 속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무력함에 대하여 더 할 말이 있다. 거기에는 무력한 탄생과 무력한 죽음뿐만 아니라 - 이상하게 보일지 몰라도 무력한 삶이 있다.

하느님의 무력한 아이인 예수님은 무력함 속에서 축복을 받는다. 나자렛의 오랜 감춰진 생활 후에 예수님은 사명을 시작하셨는데, 첫 번째로 당신의 자화상을 다음과 같이 보여주신다. “가난한 이들은 복되도다” 라고 그분은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힘이 없으며 그분의 사회 속에서 소외되신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오겠느냐고 사람들은 수근거린다.

“마음이 온유한 이들은 복되도다” 라고 그분은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신다. 그분은 언제나 작은 이들을 보살핀다.

“슬퍼하는 이들은 복되도다” 라고 그분은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당신의 슬픔을 감추지 않으며 친구가 죽었을 때, 그리고 당신이 사랑하는 예루살렘의 파멸을 예견하실 때에 눈물이 흐르도록 놔두신다.

“정의에 굶주리고 목말라 하는 이들은 복되도다” 라고 그분은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불의를 비난하고 굶주린 이들, 죽어 가는 이들, 그리고 나병환자들을 옹호하는 데에 주저치 않으신다.

“자비로운 사람들은 복되도다” 라고 그분은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복수를 원하지 않으시고 늘 어디서나 치유하신다.

“마음이 깨끗한 이들은 복되도다” 라고 그분은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늘 필요한 것에만 집중하시며 많은 산만함 때문에 당신의 주의가 분열되는 것을 허락지 않으신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은 복되도다” 라고 그분은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차이점을 강조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을 한 가족의 형제자매로서 화해시키신다.

“박해받는 사람들은 복되도다” 라고 그분은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성공과 인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거부와 유기 때문에 당신이 고통받으실 것을 아신다.

산상수훈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무력한 하느님의 초상화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병든 이들, 감옥에 갇힌 이들, 피난민들, 외로운 이들, 성폭력의 희생자들, 에이즈 환자들, 그리고 죽어 가는 이들을 볼 때마다 만나게 되는 초상이다.

그들의 무력함을 통하여 우리는 그들의 형제자매가 되도록 초대받고 있다. 그들의 무력함을 통하여 우리는 우정과 사랑의 결속을 더 심화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 그들의 무력함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자신의 무기를 내려놓고 서로를 용서하며 평화를 이루도록 도전 받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무력함을 통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하게 된다: “너희 어리석은 사람들아, 고통을 받고 영광 속에 들어가는 것이 필요하지 않는가?” 참으로 하느님의 무력함과 거기에 동참하는 인간의 무력함은 사랑의 집에 이르는 문이 되는 것이다.

 

헨리 나웬(Henri Jozef Machiel Nouwen, 1932-1996)은 네덜란드 출신의 사제이며 영성작가. <상처받은 치유자로서의 사목자> <돌아온 아들> 등을 지었고, 마지막 10년동안 라르쉬 새벽공동체에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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