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징조를 묵상하는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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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징조를 묵상하는 그리스도인
  • 박철
  • 승인 2020.09.14 1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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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대에서 날마다 일기예보를 하는 것은 무슨 산통을 흔들어서 나오는 점괘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니요, 과학적인 정보를 수집하여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예보를 하려면 세계의 여러 곳에 생겨나는 기상의 상황을 정확하고 신속하게 파악해야 하며, 그러려면 현대적인 첨단장비와 학문적 분석 능력과 끊임없는 연구 노력이 동반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런데 가끔 기상대의 예보가 빗나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는 일이 있다. 아무튼 일기 예보를 하는 이유는 앞으로 생겨날 기상변화에 올바르게 대비해 불의의 인명, 재산 등의 손실이나 재화(災禍)를 미리 방지하고 좀 더 안전하고 실효성 있는 생활을 영위하려는 데 있다고 하겠다. 장차 생겨날 갑작스런 변화에 대비하지 않으면 무슨 불행을 언제 당하게 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옛날 사람들은 이 점에 매우 마음이 쓰이기는 하였으나, 과학적인 일기예보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자기들의 오랜 경험을 통하여 때의 표상을 이해하고 미리미리 일기의 변화를 내다볼 줄 알았다.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고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이렇게 알았다. 그것은 단순히 오랜 세월을 살아온 옛 사람들의 경험을 통하여 얻어진 지혜로운 상식이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기상의 예언은 중동 지역의 경우에 거의 적중하였다고 한다.

루카복음서에 보면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서풍은 비를 몰아오는 바람이요, 동남풍을 열기를 실어 왔다고 한다.(12,54-56) 팔레스타인의 서풍이란 지중해를 거쳐 오는 습도 높은 바람이기에 비 오기가 알맞고, 동남풍이란 건조하고 뜨거운 사막 지대에서 오는 바람이므로 날씨를 무척 덥게 만들어 주었다. 그것은 모두 그들의 경험에서 얻은 상식적 이해였다.

아무튼 기상대의 경우이거나, 상시적인 이해의 경우이거나 장차 생겨날 일들을 미리미리 알아차려서 그것에 알맞게 대비하려면 거기에는 반드시 예민한 통찰력과 기민한 판단력, 감득력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옛날의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란 역사의 앞날과 민족 사회의 미래에 대한 그러한 예민한 통찰력을 가졌던 사람들이었으며, 또 어느 사회의 지도자이든 지도자의 자질이란 그처럼 예민한 감득력(感得力)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려 민중을 바로 인도할 수 있어야만 한다. 지도자가 우매하여 내일의 문제를 바로 이해하지 못할 때 생겨나는 결과가 얼마나 큰 불행과 비극의 원인이 되었는지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다.

한창 이스라엘 민중 앞에서 인기 절정에 있었던 나사렛 젊은이 예수는 당시의 지도자로 자처하던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사두개파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질시하고 제거하려는 흉계를 꾸미기까지 했다. 그들은 예수를 직접 대면한 자리에서 질문 공세를 폈다. “당신이 민중을 선동하거나 어떤 교설을 퍼뜨리고 있는데 그런 일들이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다고 할 만한 무슨 표적이 있느냐? 있으면 내보이라.”고 협박하였다.

실상, 바리새파나 사두개파는 자기들끼리도 서로 이념과 사상과 주장과 생활에서 서로 정반대의 입장에 있었다. 바리새파는 극단적 보수파요, 사두개파는 합리적 사고를 한다는, 이를테면 진보주의자들이다. 바리새파는 표면상 민족주의자들이요, 사두개파는 자신의 부(富)나 지위를 계속 누리기 위해서 로마 정권에 밀착한 친(親)로마파이다. 바리새파는 메시야를 기다렸으나, 사두개파 사람들은 그런 일에 무관심하였다.

이렇게 서로 상반되는 입장이었지만, 예수를 적으로 여긴다는 점에서는 일치했다. 그래서 예수를 제거하려는 흉계를 꾸미는 일에 공동보조를 취한 것이다. 예수는 그들 모두에게 가장 큰 위협적인 존재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미 있는 체제나 사고방식에 영합하려 하지 않고 새롭고 과감한 정신적 혁신을 촉구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다. 천국이 임박했다고 강조하였다. 그가 선포하는 천국이란 공허란 개념이 아니다. 추상(抽象)에 머무른 공상적 유토피아의 선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체제를 얼마간 바꾼다거나 생활양식을 약간 변화시킨다는 일 따위와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실로 인간의 내면적인 의식구조와 인간성 자체에 이르기까지의 근본적인 변화, 근본적인 뒤집힘을 의미하는 일이다.

오늘 우리는 중요한 정치적, 사회적 변화의 과정에 들어서 있다.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지을 것 같은 중요한 시점이 바로 오늘이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 낡은 체제의 망령이 되살아나 역사가 미래를 향하여 진일보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 후퇴하고 있다. 권력을 향유하고 그 그늘 속에서 톡톡히 덕을 보고 재미를 본 자들이 구실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게 분명하다.

예수의 복음은 혁명적이었다.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어찌하여 시대의 징조는 분별하지 못하느냐?” 하셨다. 그리고 계속해서 “보여줄 징조가 있다면 요나의 징조밖에는 없다”고 말씀하셨다. 요나의 징조란 구약성서에 나오는 요나라는 한 예언자가 고기뱃속에 삼켜져 있다가 사흘 만에 살아 나왔다는 고사(古事)를 인용한 것인데, 그것은 예수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과, 의를 위해 사흘 만에 살아나실 것을 의미하는 말씀이었다.

이를테면 인간의 존엄한 삶 자체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신 일, 그리고 그의 희생을 패배나 멸절(滅絶)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과 연결시키는 부활이요 영생이라는 점을 보여주신 말씀인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삶이 보여준 모습이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을 노예화하고 사회를 권력의 난무장(亂舞場)으로 만들고 있는 낡은 체제에 대한 예수의 도전이요 개혁운동이었다고 하겠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는 그 이념이 서로 다르면서 예수의 선포를 거부하고 배격하는 일에 야합하였다. 자기들의 현재적 기득권(旣得權)을 잃게 될 위험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들의 눈은 어두웠고, 그들의 마음을 폐쇄되었으며, 그들의 감득력, 판단력은 마비되었고 무기력해졌던 것이다. 마침내 그들은 시대의 징조를 내다볼 아는 기능을 상실한 자들이 되고 말았다. 오늘처럼 낡은 세계를 뚫고 밀려드는 새 시대의 물결을 감촉하거나 인식하지 못하고 현재 자기들이 쌓아 놓은 사회적 특권의 자리에 계속 안주하려는 생각에 연연할 따름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도처에 창궐하고 있다. 좀처럼 그 기세가 꺾일 줄 모른다. 코로나 바이러스 이후 세상은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 앞으로 교회의 존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아무 것도 예측할 수 없다. 오늘 우리 민중도 정확한 일기예보를 기다리고 있다. 시대의 징조가 올바르게 이해되기를 갈망한다. 과정과 향방이 불투명할수록 그 요구는 더욱 절실하다. 낡은 질서가 파괴되고 새로운 물결이 밀려들 때 그런 상황은 어딘지 모르게 우리에게 불안을 실어다 주는 것이 사실이다.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 밝음과 어두움이 모두 뒤섞여 있어서 일대 혼란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현실을 바라보면서 역시 우리에게 한 줄기의 빛을 던져 주는 시대의 징조-그것은 역시 요나의 이적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참된 삶의 빛, 곧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통하여 제시된 인간 승리의 길, 거기에 우리와 우리 민족의 희망의 거점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요 작가였던 쟝 폴 샤르트르(Jean-Paul Sartre)는 약소민족의 집단 저항과 폭력투쟁까지 일생 동안 찬양하고 편들어 왔다. 그러나 그가 노숙하며 자기의 철학이 완숙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그는 그러한 과격한 저항을 이해하기는 하면서도 마지막에는 그런 것으로는 우리에게 얻어지는 것이 별로 없고 결국 사랑과 박애정신만이 자기 목표로 삼는 휴머니티에 이르는 길이라고 주장한 것은 매우 흥미롭다. 그는 그리스도교와 관계 없는 사상가였지만, 한 인간이라는 면에서 그의 사상적 편력이 마침내 박애정신, 곧 사랑을 마지막 단계에서 강조한 것으로 종결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 이 시대,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우리들은 우리 민족의 내일을 위하여 매우 소중한 존재들임을 자각해야 한다. 우리 앞에는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위협이라고 착각하고 방해하려는 낡은 체제의 망령이 백주에 출몰하고 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위대한 사랑의 화신인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뜨거운 민족애를 살려, 온갖 구조적 죄악의 세력을 박멸하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데 앞장서는 의식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박철 목사
탈핵부산시민연대 상임대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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