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훈과 그의 사람들, 예배를 드릴수록 자아만 커지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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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훈과 그의 사람들, 예배를 드릴수록 자아만 커지는 사람들
  • 최태선
  • 승인 2020.09.08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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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저는 흠이 많은 사람입니다. 많은 흠들 중에 가장 큰 흠은 남의 말을 잘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왜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을까요. 그건 제가 스스로를 잘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남보다 더 많이 알고 남보다 더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자아가 커져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의 말을 다 듣기 전에 제 말을 쏟아놓곤 합니다.

그래서 저는 도로시 데이를 제일 좋아합니다. 아니 존경합니다. 그녀가 한 노숙자와 대화를 하는 사진 한 장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세상에 그 노숙자 한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그에게 주목하며 그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진 한 장이 저를 항복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도 그녀처럼 다른 이들의 말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아직은 원함일 뿐 실제로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다 말을 자르기도 하고 더 큰 소리로 제 말을 하기도 합니다.

전광훈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퇴원을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은 정말 하느님을 졸개로 부릴 정도로 대단한 분이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날뛰는 것은 그분이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부흥사로 지내오면서 자아가 커지셨습니다. 자아가 커지면 본성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실낙원한 것은 곧 하느님을 떠났다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하느님의 자리가 없어지고 그 빈자리를 자아가 채웠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하느님이 된 인간은 스스로 모든 것을 통제하고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타인을 만나면 그를 자신에게 종속시키거나 제거하려 하기 마련입니다. 종속된 인간도 자기를 종속시킨 인간과 마찬가지로 타인을 종속시키는 존재가 됩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힘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떠난 인간은 힘과 권력을 추구하기 마련입니다. 힘과 권력의 크기만큼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다스리게 되는 것을 질서로 인식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광훈만 날뛰는 것이 아니라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도 그처럼 그렇게 날뛰게 되는 것입니다. 코로나에 확진된 사랑제일교회 신도가 격리를 위해 온 사람들을 껴안고 침을 뱉으며 너희들도 격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모습은 그 신도 한 사람의 특별히 못된 인격 때문이 아니라 자아가 커진 사람의 일반적인 행태일 뿐입니다.

지금 말씀드리는 이 사실은 대단히 영적인 이야기입니다. 교회를 다닌다는 것,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아가 작아지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좇은 사람들은 신앙이 깊어짐에 따라 자아가 완전히 사라져 마침내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곧 타인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초기교회에는 아무도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다닌다는 것,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알았고 기꺼이 가난과 환난에 자신을 맡김으로써 자아가 작아지고 작아져 마침내 자아가 사라진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영적 여정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주의해야 할 것은 넘어짐입니다. 깨어있다면 넘어지는 것을 인식할 수 있지만 깨어있지 못하다면 넘어짐을 인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여정에서 넘어짐은 망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하고 성취하는 순간이라는 사실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넘어짐을 넘어짐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넘어짐을 은혜로 여기며 오히려 그 넘어짐을 하느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을 가지고,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하여 영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을 그들은 은혜로 여기지만 사실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그런 순간이 넘어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자아가 커지는 것을 은혜로 아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말이 생각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감히 단언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하신 그 일로 내가 여러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것입니다.”

그는 복음을 증거하면서 각종 위험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그가 열거하는 위험들은 어느 하나 만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 죽음의 위협을 날마다 겪으면서 그의 자아는 점점 더 작아집니다. 그의 자아가 작아지자 그가 자랑으로 알았던 것들이 배설물처럼 여겨지기 시작합니다. 그가 배설물처럼 여기는 것들이 무엇이었나를 잘 공부해보십시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그처럼 얻고자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자랑으로 여기는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의 자아가 작아지고 사라지자 그의 자아를 크게 느끼도록 만들어주었던 모든 것들이 배설물처럼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점잖은 성공한 목사님들이 전광훈을 선지자라고 하면서 그를 지지하는 것을 매우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자세히 보십시오. 그 사람들도 모두 자아가 커졌다는 사실을 발견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말에 절대성을 부여하면서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성공이 그들의 안락함이 그들의 영혼을 썩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보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이상하게 들린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느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모습과 사람의 모양이 의미하는 바를 깊이 묵상해보십시오. 그것은 희생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입니다. 주님은 그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작아져야 가능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 정 반대의 길을 갑니다.

그래서 전광훈과 같이 자아가 커진 만무방이 독립투사라도 된 양 날뛰는 것이며 그렇게 만무방으로 날뛰는 그를 지지하는 점잖은 목사님들이 그처럼 많은 것입니다. 바야흐로 자아가 커진 분들의 행진이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자아가 커진 사람인지 작아진 사람인지를 시험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를 보면 됩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면 일단 올바른 방향이 잡혔다는 생각을 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목사들만이 아니라 예배에 중독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대면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것을 힘들어합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예배를 열심히 드리면서도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자아가 커지는 사람들을 보시고 코로나라는 은혜의 시간을 주신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고 있는 이 시기에 멀리 다니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닐 것입니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근처 조용한 공원이나 뒷산을 걸어보십시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그리스도를 들이마신다는 생각으로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자아를 조금씩 날숨으로 뱉어내십시오. 자기를 비우신 그리스도의 평안이 여러분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작아짐의 은혜가 임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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