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그리스도인, 철학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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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그리스도인, 철학하는 교회
  • 최태선
  • 승인 2020.08.31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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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아주 오랜 만에 만난 사람이 제게 지금이라도 철학을 해보시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을 하였습니다. 글쎄요. 지금 제게 지금이라도 다시 할 수 있는 게 남아 있을까요. 그런 열정이 남아 있을까요. 그런 사람들도 있기는 합니다. 노인이 되어 전문가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는 길은 아닙니다. 저는 이미 저를 위해 살지 않기로 방향을 정했고 또 그 방향에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 사람은 제게 철학을 해보라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그가 철학을 공부했던 적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철학은 생각하는 힘입니다. 그 사람은 제 글을 보고 제게서 그 힘을 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모름지기 철학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종교인들이라면 더더욱 그래야 할 것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도 거기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 세상이 말하는 행복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을 추구하며 살 수 있는 주체적인 사고와 입장을 지닌 사람이 철학자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개념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삶은 독창적이고 생생합니다. 비록 유치해보이기도 하고 무의미해 보일지라도 본인이 자기 삶의 의미를 알고 그것을 실천해나가는 것이라면 누구라도 그 삶을 함부로 폄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동일한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며 그것이 곧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을 일컬어 철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전혀 이런 철학자와는 관계가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이 세상을 다르게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그들이 다르게 살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도 더 앞장서서 세상이 주장하는 행복, 개념 없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왜 교회가 커지면 가난한 사람들이 그 교회를 떠나야 할까요. 왜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을 보고도 목사는 그 사람들과 함께 교회를 떠나지 못할까요. 그 이유는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교회가 부자 되는 것을 하느님의 은혜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설교하고, 그렇게 설교를 하지 않아도 부자가 되는 것이 행복하다는 생각을 바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날 교회의 부패와 타락보다 더 절망스러운 것은 생각할 힘을 가지지 못한 그리스도인을 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사고를 바꾸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부자 관원이 생각납니다. 그는 분명 종교적 관심이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실천 역시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생각하는 힘이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은 자신이 깊이 사고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들을 귀가 없었습니다. 들을 귀가 없다는 것이 바로 생각하는 힘이 없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똑같은 율법을 바라보면서도 바리새인들과 생각이 다르셨습니다. 똑같은 것을 보면서도 다른 것을 보시고 다른 생각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남달랐던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분은 관점이 달랐습니다. 율법을 해석하는 능력이 남다르셨습니다. 생각하는 힘이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의미에서 탁월한 철학자였습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다른 민족들과 비교할 수 없이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것도 이들이 철학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들의 역사에 바리새파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유산인 탈무드를 보아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율법 해설서라고 할 수 있는 탈무드는 그 양이 어마어마하게 방대합니다. 그들의 사고의 폭이 그만큼 넓다는 것입니다. 사고의 폭이 넓다는 것은 그들의 생각하는 힘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매우 중요한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각각의 탈무드에는 반드시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은 빈 여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여백이 의미하는 것은 그것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여전히 재해석의 여지가 남아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완성할 책임이 탈무드를 읽는 모든 사람에게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 여백에 자신의 시대 상황에 따른 자신들의 해석으로 그 빈 페이지를 채워갑니다. 그들은 그렇게 진리를 완성해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그 여백을 채워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책임이 바로 오늘날의 유대인의 정체성을 이어가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비극은 바로 이 여백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이 옳으냐를 놓고 토론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싸우고 갈라지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고착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백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이 철학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런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오늘 광화문에서 보는 그런 광신자들과 맹신도(盲信徒)들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 눈으로 성서를 볼 수 없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기독교는 오래도록 그것을 강요해왔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 금기는 완전히 해제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그렇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을 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자의적인 성서 해석의 위험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렉시오 디비나도 큐티도 근본적으로 그런 위험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위험성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성서 해석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은 성령을 제한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보혜사(협조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오늘날 개혁을 말하고 쇄신을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 사실을 지적하는 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성서를 많이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성령께서 가르쳐주시는 모든 것에 대해 강조하는 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렉시오 디비나도 큐티도 그 사람의 생각할 수 있는 힘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역으로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새로운 것을 보고 새롭게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서를 자기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지 그것을 제한하고 특정한 사람들에게 그 권한을 위임하는 월권행위를 멈추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 무너져가는 교회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이처럼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성서를 재해석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처럼 자신들의 시각으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신앙으로 완성해나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광화문 집회에 참석하는 이들을 광신도로 매도하기 이전에 자신에게 과연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있는가를 확인해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반드시 다르게 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렇게 다르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한 신학자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내게 프란치스코와 같은 그리스도인 열 명을 보내준다면 세상을 바꾸어 보일 것입니다.”

정말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오래 전 처음으로 프란치스코의 이야기들을 읽을 때 그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행동 하나, 하나에 담긴 의미들을 깊이 공감할 수 있습니다. 서두에 언급한 사람이 본 것처럼 제게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입니다. 그것은 가난해지고 작아지고 약해진 저를 성령이 인도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철학자 그리스도인! 이것이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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