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새벽이라는 걸 당신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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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새벽이라는 걸 당신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 헨리 나웬
  • 승인 2020.08.24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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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의 "우리를 초대한 길들"-4

아담은 헨리 나웬이 하버드대학교를 떠나 아버지의 집으로 삼은 토론토 근처의 라르슈공동체에서 만난 가족 중에 가장 약한 사람이었다. 그는 25살 된 남자로, 혼자서 말하거나 옷을 입거나 벗거나, 혼자 걷거나 먹거나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울거나 웃지도 않았고 간혹 가다 눈맞춤만 할 뿐이다. 그의 등은 뒤틀렸고 팔과 다리 동작도 제멋대로 이다. 그는 매우 심각한 간질로 고통을 겪고 있으며 약을 엄청나게 많이 투약해도 “대발작” 없이 지나가는 날들이 별로 없다. 때때로 갑작스레 몸이 굳어지면 그는 울부짖는 신음소리를 내고, 몇 번 그의 뺨 위로 흘러내리는 큰 눈물을 본 적도 있다. 아담을 깨우고, 약을 먹이고, 옷을 벗겨 목욕탕으로 데려가서 씻기고 면도를 해주고 양치질을 하고 옷을 입혀서 식당으로 데려가 아침을 먹이고 휠체어에 앉혀서 하루종일 치료를 받고 연습하는 곳으로 데려가는 데에 한 시간 반이 걸린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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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평화의 세 번째 측면이며 가장 만져질 수 있는 것 같은 측면은, 하는 것보다 존재하는 것에 더 뿌리를 두고 이성보다 마음에 더 뿌리를 둘 때에 평화가 언제나 공동체를 만들도록 요청한다. 라르슈에서 사는 동안 가장 인상적인 측면은 장애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가족으로 한데 붙들고 있으며 가장 장애가 심한 사람들이 함께 하는 우리들의 삶의 중력에 있어 가장 중심에 있다는 측면이다.

너무나 부서지기 쉬운 존재인 아담이 우리에게 한 가족이 되도록 요청한다. 실제로 공동체 형성의 관점에서 볼 때 아담은 모든 것을 거꾸로 돌려놓는다. 가장 약한 식구들이 협력자들이다. 우리는 제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다 -브라질, 미국, 캐나다, 네덜란드 등- 우리들의 결단, 투신은 매우 모호할 뿐이다.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오래 머물지만, 대부분은 일 이년 후에 떠나간다.

중심에 가까이 있는 친구들은 레이몬드, 빌, 죤 그리고 트레버인데 이들은 비교적 독립적이지만 아직도 많은 도움과 주의를 요한다. 그들은 가족의 영구회원들이다. 그들은 우리와 일생을 함께 있을 것이고 우리가 정직하도록 해준다. 이들 때문에 갈등은 절대로 오랫동안 지속된 적이 없으며, 긴장이 있으면 내놓고 말하고 일치가 안 될 때에는 될 때까지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 공동체의 중심에는 로즈와 아담이 있다. 그들은 모두 심각한 장애를 지니고 있고 그 둘 중에서도 더 약한 이는 아담이다.

아담은 우리 가운데에서도 가장 약한 존재이나 어떤 추호의 의심도 없이 우리들을 가장 강력하게 결속시켜 준다. 아담 때문에 공동체에는 늘 한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아담 때문에 집에는 조용한 리듬이 흐른다; 아담 때문에 침묵과 고요함의 순간들이 있다; 아담 때문에 애정, 온화함, 그리고 부드러움이라는 말이 늘 있다; 아담 때문에 인내와 끈기가 있다; 아담 때문에 모든 이에게 웃음과 눈물이 허락된다; 아담 때문에 상호용서와 치유를 위한 공간이 늘 마련된다... 그렇다, 아담으로 인해 우리들 가운데에는 평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나 많은 다른 나라들과 문화들의 사람들, 그렇게나 다른 성격들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그렇게나 다양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 정신장애든 아니든, 이 평화 속에서 어떻게 함께 살 수 있겠는가?

아담은 진실로 이 잡다한 그룹의 낯선 이들을 자신의 주변에 한데 모아 모두를 하나의 가족으로 융화시킨다. 아담은 참다운 우리의 평화지기이다. 하느님의 길들은 얼마나 신비스러운가:

“하느님께서는 지혜 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또 유력한 자를 무력하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곧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니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1고린 1,27-30).

아담은 바오로 사도의 이 말에 살을 주고 있다. 그는 공동체의 참다운 신비를 나에게 가르쳐준다.

성인으로 사는 동안 내내 나는 혼자서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려고 애써왔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저 나의 외로운 길에서 뒤에 있으면 된다고 여겨왔다. 나를 도와준 사람들은 개인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긴 여정에서 내가 살아남기 위하여 강하고 독립적이며 스스로 움직이고 창의적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나는 스스로 만족하는 스타가 되고자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나의 지적인 동료들은 그러한 욕구를 나와 함께 공유하였다.

그러나 지적으로 높이 훈련된 개인들인 우리 모두는 오늘날 전적인 파멸의 벼랑끝에 놓여진 세계에 직면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평화를 만들기 위하여 어떻게 힘을 모을까 고민하기 시작한다. 어떤 종류의 평화가 가능할 것인가? 모두 다 중심자리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의 초상화를 누가 그릴 수 있는가? 탑을 세우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누가 아름다운 교회를 지을 수 있겠는가? 케이크에 그저 촛불만 켜려고 하는 사람들과 함께 누가 생일케익을 구울 수 있는가? 우리 모두는 문제를 알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마지막을 장식하는 평화지기가 되는 명예를 원할 때에 평화는 결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아담은 많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아무도 어떤 것을 결코 자랑할 수 없다. 아담은 절대로 “치료되지 않을 것” 이다. 그의 잦은 발작은 의료적인 방법들이 오히려 사태를 더 악화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성공이라고 주장할 만한 것이 전혀 없으며 아담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그저 조금씩만 할 뿐이다. 그의 삶에서 내가 하는 역할은 아주, 아주 적다. 어떤 이들은 그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다른 이들은 빨래를 해 주며, 어떤 이들은 마사지를 해 주고, 또 어떤 이들은 음악을, 산책을, 수영을, 드라이브를 해준다. 어떤 사람은 그의 혈압을 재주고 약을 정기적으로 챙긴다. 또 어떤 이들은 그의 치아를 보살핀다.

이 모든 도움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변하지 않으며 자주 완전한 소진의 상태에 빠져버리지만, 평화의 공동체는 그의 주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은 빛을 바구니로 덮으려는 공동체가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초대한 평화공동체는 그곳에 단지 아담만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모든 동료들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공동체는 하느님이 전적인 약함과 부서짐 속에서 우리 가운데 계시기 위하여 내려오시기로 선택하셨고 이렇게 우리에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로 하셨다는 사실을 선포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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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당신이 보는 바와 같이 아담은 이 세상 것이 아닌 평화에 대하여 점차적으로 나에게 무엇인가 가르쳐주고 있다. 그것은 삭막한 경쟁, 경직된 사고, 그리고 개인적인 스타들에 의해 건설되는 평화가 아니라 단순히 서로에게 현존함으로써 이루어지는 평화이며,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첫째 사랑에 대하여 말해주는 평화, 우리를 끊임없이 공동체로, 약한 이들의 우정으로 초대하는 그런 평화이다. 아담은 나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는 앞으로도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매일 밤 그를 재우면서 나는 “고맙다”고 그에게 말한다. 살이 되어 우리 가운데 머무시는 말씀에 누가 아담만큼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겠는가?

나는 아담과 아담의 평화에 대하여 당신에게 말했다. 그러나 당신은 라르슈의 일부가 아니며, 새벽공동체에서 살지도 않는다. 당신은 아담의 가족도 아니다. 그러나 나처럼, 당신도 평화를 추구하며 당신의 마음속에서, 당신의 가족 안에서, 세계 속에서 평화를 찾고 싶어한다. 그러나 세상 속에서 우리들 주변을 바라보며 우리는 수용소와 피난민 구호소를 본다; 우리는 넘치는 감옥들을 본다; 우리는 마을이 불타고, 인종학살, 유괴, 고문 그리고 살인을 본다; 우리는 굶주리는 아이들, 버려진 노인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식량, 거처 혹은 일이 없는 것을 본다.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자고 있는 것, 어린 소년 소녀들이 다른 사람의 쾌락을 위해 몸을 팔고 있는 것, 폭력과 성폭행 그리고 수백만의 두려움과 외로움에 지친 사람들을 본다.

이 모든 것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세계에 평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의 마음이 가장 갈망하는 것은 바로 평화이다. 당신과 나는 아마도 돈을 주고 시위하고, 해외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하거나 그밖에 많은 다른 것들을 시도했을 것이다 - 그러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우리는 그렇게나 기다렸던 평화가 아직도 오지 않았음에 직면한다. 우리 안의 어떤 것이 점점 더 차가워지고 쓰라리며 회한에 가득 찬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철회하고 싶은 유혹에 그리고 좀 더 쉬운 개인적 생존의 과제에 기대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것은 악마적인 유혹이다.

나는 아담과 그의 평화가 우리에게 온화한 마음과 함께 조용한 안내자를 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 안내자는 우리에게 작은 빛을 주어서 이 어두운 세상 속을 걸어갈 수 있도록 해준다. 아담은 아무 것도 해결하지 않는다. 그가 받고 있는 온갖 도움으로는 자신의 극한적인 가난마저 변화시킬 수 없다. 아담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가난하게 더 가난하게만 변한다. 작은 감염들, 불행한 넘어짐, 간질발작이 일어날 때 자신의 혀를 우발적으로 삼키는 일, 그리고 다른 수많은 작은 사건들은 아담을 우리에게서 갑자기 앗아갈지도 모른다. 그가 죽으면 아무도 어떤 것에 대해서도 자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져오는 빛은 얼마나 대단한가! 그러므로 아담의 이름으로 나는 당신들에게 말한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것을 포기하지 말라. 그러나 여러분이 일하고 있는 평화는 이 세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라. 전쟁의 엄청난 소리들, 비참함에 대한 극적인 서술들, 그리고 인간의 잔인함에 대한 선정적인 표현 등에 당신 자신이 정신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라. 신문들, 영화들, 그리고 전쟁소설이 당신을 마비시킬지도 모르지만, 그것들은 당신 안에 평화에 대한 참된 갈망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것들은 수치스러움, 죄책감 그리고 무력함의 느낌들을 만들려고 애쓰며, 이러한 느낌들은 평화조성에 있어 가장 최악의 동기들이다.

평화의 왕자, 그의 거룩한 권력에 집착하지 않는 존재로부터 눈을 떼지 말라. 돌로 빵을 만들고, 높은 언덕에서 뛰어내리며 큰 권력으로 다스리기를 거부하는 존재, 그 존재가 말을 한다, “가난한 이들, 온유한 이들, 슬퍼하는 이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마태 5,3-11 참조). 절름발이, 불구자 그리고 눈 먼 사람들을 만지시는 분; 용서와 격려의 말씀을 하시는 분; 혼자 죽고, 거부당하며 멸시를 받은 존재. 가난한 이들과 함께 가난한 이가 되고 약한 사람들과 함께 약해지며, 거부당한 이들과 함께 거부당하시는 존재. 그분은 모든 평화의 원천이다.

그런데 이 평화가 어디에서 발견될 것인가? 대답은 분명하다. 약함 속에서. 무엇보다 먼저 우리 자신의 약함 속에서, 우리가 가장 부서지고 가장 불안하며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두려움을 느끼는 우리 마음속의 그 자리에서 발견된다. 왜 하필 그곳인가? 그곳에서 우리의 세계를 지배하는 낯익은 방식들이 벌거벗겨지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생각하며 우리의 자신감에 기대는 것을 그만 놓으라고 요청을 받는다. 우리가 가장 약하다고 여겨지는 바로 그곳에 이 세상 것이 아닌 평화가 숨겨져 있다.

아담의 이름으로 나는 당신에게 말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그 평화를 주장하고 그것을 당신 자신의 평화로 간직하라고. 마음속에 그 평화를 가지고 당신은 볼 수 있는 새로운 눈과 들을 수 있는 새로운 귀를 갖게 될 것이고 점차 당신이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도 그 평화를 알아 볼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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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나는 혼두라스에 있었다. 새벽공동체에 와서 아담과 친구가 된 이후로 처음 중부 아메리카를 방문한 때였다. 갑자기 나는 정치적인 억압의 상황에 대해 분노로 거의 소진되지 않았고, 뻔한 불의들 때문에 혼란스럽지도 않으며, 혼두라스의 미래가 매우 혼미하게 보인다는 자각 때문에 거의 마비되지도 않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테구시갈파 근처의 라르슈 공동체인 매우 심각한 장애인들로 이루어진 라파엘 공동체를 방문하면서 나는 아담에게서 느꼈던 똑같은 평화를 보았으며, 불란서, 벨지움, 미국과 카나다 등지에서 온 너무나 심각한 협력자들에게 가난한 이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준 기쁨의 선물에 관해 이야기를 들으면서 평화가 똑똑하고 부유한 이들에게 자주 숨겨졌으나 표현할 수 없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드러나는 하느님의 선물임을 알았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보스니아, 하이티, 르완다의 평화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그건 전혀 다른 뜻이다. 다만 우리 자신의 고통과 가난한 이들의 고통의 토양 속에 국내, 국제 차원에서 평화의 씨앗이 이미 뿌려졌으며 이 씨앗들이 복음서의 겨자씨처럼 수많은 새들이 쉴 자리를 찾을 수 있는 커다란 나무들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참으로 믿을 수 있다는 뜻이다.

마치 평화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며 모든 것이 우리가 하기에 달린 것처럼 여긴다면, 결국 우리는 자멸의 길에 들어선 셈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하느님이 우리가 찾고 있는 평화를 이미 주셨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이 평화가 부서진 우리 인간조건의 토양을 뚫고 들어오는 것을 볼 것이며 그것이 빠르게 자라도록 그리고 심지어 우리시대의 경제적 정치적 병폐들을 치유하도록 맡길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음속에 이런 신뢰를 가지고 우리는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은 복되도다. 그들은 땅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세계의 모든 아담들이 이러한 상속을 받는 첫 번째 사람들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나에게 특별한 기쁨을 준다.

이제 글을 마치려고 한다. 끝내는 것이 어렵게 느껴진다. 말해지지 않고, 표현되지 않은 감정들, 드러나지 않은 신비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숨겨진 채 있어도 당신이 알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밤 속에서 살고 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낮 속에 산다. 우리 모두는 밤과 낮, 어둠과 빛에 대해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도 어둠과 빛이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 가족과 공동체 안에도; 우리가 사는 세계 안에도 그것이 있음을 안다. 세계가 주지 못하는 평화는 어둠을 쫓아내는 빛이다. 그런 평화는 조금만 있어도 낮을 오게 한다!

지금까지 내가 말하려고 했던 대부분을 요약해주는 유대 신비주의의 한 이야기로 끝을 맺어보려고 한다.
랍비가 그의 제자들에게 물었다: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될 때 우리는 새벽의 시간을 어떻게 결정할 수 있을까요?”
한 학생이 제안했다: “멀리서도 개와 양을 구별할 수 있을 때입니까?”
“아니오.” 하고 랍비가 대답했다.
“무화과나무와 포도덩굴을 구별할 수 있을 때입니까?” 두 번째 학생이 물었다.
“아니오.” 랍비가 말했다.
“그러면 답을 말해 주십시오” 하고 학생들이 말했다.
“그건” 하고 현명한 선생이 말했다. “여러분이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그들을 여러분의 형제자매로 알아볼 수 있는 빛이 여러분 안에 충분히 있을 때입니다. 그때가 올 때까지는 밤이고, 어둠이 아직도 우리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빛을 얻기 위하여 함께 기도하자. 그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의 빛이다.

 

헨리 나웬(Henri Jozef Machiel Nouwen, 1932-1996)은 네덜란드 출신의 로마 가톨릭사제이자 사목신학자이며 그리스도교 영성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토머스 머튼, 렘브란트, 빈센트 반 고흐, 장 바니에 등의 영향 아래 자신의 전공인 심리학을 바탕으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펼쳤으며 다양한 주제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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