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부동산투기를 하다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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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부동산투기를 하다니요
  • 최태선
  • 승인 2020.08.04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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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영국 의약시장 조사업체 에어피니티 집계에 따르면 미국, 영국, 일본 등 부국들이 제약사들과 계약한 코로나 백신 선구매 규모가 13억회 분량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2일(현지시간) <블룸버그>가 보도했다. 미국과 영국은 프랑스 제약사 사노피 진영, 일본은 미 제약사 화이자와 선구매 합의를 이룬 것으로 알려졌다. 선진국들의 대규모 백신 선점으로 사실상 향후 몇 년간 개발될 백신은 모두 이들 일부 국가에만 집중 공급될 것으로 보인다. 2022년 1분기까지 전세계 백신 생산 규모가 10억회 분량에 미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 기사를 읽고 강남의 비싼 집에 사시는 분들이 생각났습니다. 이 기사를 읽고 그분들이 이민을 가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집값은 무한정 오르기를 바라고 세금 내라는 정부는 공산주의라고 몰아붙이는 이분들이 이런 기사를 읽으시고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가 궁금해집니다. 저 같은 무주택자가 그분들의 고상한 사고의 흐름을 짐작하긴 어렵지만 아마도 백신을 선점한 나라들의 행태가 불의하다는 생각을 하실 것 같습니다.

정말 불의한 일입니다. 거기에 일본이 들어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겐 더 불쾌합니다. 이들 다음은 EU(유럽연합)입니다. 이 또한 당연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중국이 좀 더 세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국이 가세한다고 이런 흐름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중화사상을 가진 중국이라면 더더욱 불의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쉬울 것입니다. 그들은 사과를 모르는 (결코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민족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힘을 가진 자와 힘을 가지지 못한 자의 운명을 확인하게 됩니다. 세계사는 곧 제국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역사는 언제나 힘을 가진 열강의 입장에서 기록되기 마련입니다. 힘의 대결은 전쟁으로 치닫고 전쟁으로 희생되는 사람들은 언제나 약자들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힘을 추구하게 되고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은 언제나 정의로 위장한 채 불의를 정당화하고 고착시킵니다. 결국 이긴 자가 정의라는 불합리한 논리가 역사로 기록되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러한 세상을 ‘희생의 체제’라 이름 지었고 그것을 또한 ‘문명의 정상성’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는 바로 그러한 세상에 저항하여 하느님 나라라는 대안을 인류에 제시하신 분입니다. 물론 창세부터 하느님 나라는 존재했습니다. 그 하느님 나라의 의미를 확대하고 재해석하고 구체화하신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그 하느님 나라의 통치 강령이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제자가 되어 그 하느님 나라의 통치 강령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의 제자들을 통해 인류는 물론 온 피조세계가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 성서가 말하는 복음이며 그것을 복음이라고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강남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고, 분당이 복음화율이 가장 높은 곳이라는 현실이 의미하는 바는 오늘날의 복음이해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사용되는 '공산주의'라는 단어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얼마나 돈에 경도되었는지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힘이 지배하는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돈에 충성을 맹세하는 제국주의자들이 된 것입니다.

사실 코로나는 돈과 이기주의에 함몰된 인류에 대한 자연의 경고입니다. 욕망을 선으로 추앙하고 시장의 자유를 자유의 모든 것으로 인식하는 자본주의의 모순과 신자유주의체제의 냉혹성의 한계를 드러내고 각성을 요구하고 있음에도 또 다시 그 해결방식으로 가진 자들의 불의를 정의로 주장하려는 인류의 속성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진 자들이 가장 오래 버틸 것이라 생각하지만 결과는 공멸일 뿐입니다. 제 생각이지만 어쩌면 백신을 맞을 수 있는 사람들이 먼저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성서의 예언이 반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교훈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왜 성서에 이스라엘이 아닌 에집트나 다른 민족들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었는지가 새삼 의미있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멸망의 예언은 하느님께로 돌아오라는 부르심입니다. 하지만 다른 나라 혹은 민족에 대한 예언은 그야말로 멸망에 대한 예언입니다. 미국, 영국, 일본은 바로 그러한 예언의 당사자가 될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나라가 공정하게 백신을 공급하자는 취지의 ‘코백스(COVAX)’에 가입했다는 사실입니다. 힘을 가진 자들이 백신을 싹쓸이 하는 행위를 불의하다고 말할 수 있고 공정한 백신의 공급과정에서 본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저는 점점 더 심화되는 기상이변과 이것 때문에 빚어진 자연재해들이 심상치 않아 보입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구의 신음소리를 인류가 외면한다면 지구 종말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올 수 있습니다. 생물종의 급격한 감소는 생태계의 와해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단일 품종이 된 바나나의 경우에 닥쳐왔던 멸종의 위기는 인류의 귀중한 교훈이 되어야 합니다. ‘한 백 년’이란 인간의 희망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긴 시간이 되었습니다. 더울 것이라는 올해의 기상예보가 전혀 들어맞지 않은 것도 기뻐할 수만은 없는 멸망의 징조입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의 중심에 그리스도인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이기심을 억제할 수 있는 것도, 다른 이들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것도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단순히 제자를 삼으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종(種)의 인류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가서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그런 사람들을 견디지 못해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임합니다. 그 하느님 나라를 보고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사모하고 하느님 나라로 들어오려고 해야 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이 인류의 희망이 되고 온 피조세계를 살리는 마중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살라는 복음이 아니라 죽으라는 복음입니다. 썩을 것으로 심으라는 것은 먼저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천 년 만 년 살려는 사람들은 몇 년을 더 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영원히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꺼이 십자가에 달리는 사람은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것이 성서가 말하는 구원입니다. 제발 예수님이 다하셨다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예수님이 하셔야 할 일을 다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다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부동산투기를 하다니요. 재테크를 하다니요. 그렇게 자손대대로 천 년 만 년 살라고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고단하고 힘겨운 여정이었습니다. 그가 받은 물질의 축복은 말씀에 순종한 사람을 책임지시는 하느님의 공급하심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그에게 올무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단지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시는 “이 모든 것”일 뿐입니다. 제발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어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정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도 세상의 불의를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세상의 불의는 곧 그리스도인들이 책임져야 할 사명입니다. 세상의 불의를 종식시키는 것이 하느님의 나라와 정의를 이 땅에 구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야흐로 지구가 마지막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브레이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보아야 하는 나라는 미국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입니다. 코로나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을 채근하고 있습니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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