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은 심연에게, 영은 영에게, 마음은 마음에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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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은 심연에게, 영은 영에게, 마음은 마음에게 말한다
  • 헨리 나웬
  • 승인 2020.07.28 11: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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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의 "우리를 초대한 길들"-1

평화에 대해 어떻게 말할까? 지난 수년간 나의 삶은 많은 변화를 거쳤고 자신감도 많이 잃었다. 수년 전만 해도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어떻게 평화의 사람들이 될 수 있는지 몇 가지 제안들을 내놓는 것은 꽤 쉬운 일로 보여졌다. 나는 그런 일을 수월하게 할 수 있었고 무언가 중요한 것을 말해야 한다는 확신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짧은 글을 준비하면서 나는 깊은 내적인 공허감, 말의 쓸모없음, 심지어 평화, 평화 만들기나 평화의 영성에 대해 무언가 말한다는 것에 대해 절망감까지 느껴졌다. 나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의 가난 역시 나를 마비시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지금 여기에 있고 그 이유는 나 자신의 가난을 나누기로 결정했고, 여러분들로부터 그 가난을 숨기는 것을 하느님께서 원치 않으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나는 기도, 저항 그리고 공동체가 평화를 위한 작업에서 핵심적인 측면들이라고 자주 말해왔다. 아직도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지만 그것을 말한다는 것의 가치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이런 개념들은 그것들이 표현하는 내용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나는 예전처럼 더 이상 확신을 가질 수가 없다. 하느님께서 초대하신 것처럼 우리가 당신의 백성이 되어 가는 데에 말이 도대체 우리를 도울 수 있는지가 의심스러운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번민한 후 나는 나의 현재 생활을 당신에게 조금 말하고 우리가 찾고 있는 예수의 평화의 어떤 측면을 그 삶 속에서 발견해 보아야겠다고 느꼈다.

수년 전 나는 하바드대학교에서 새벽공동체로 옮겨갔다. 다시 말하자면 최고의 똑똑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기관으로부터 정신적인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로 간 것이다. 토론토 근처에 있는 새벽공동체는 라르슈(방주)라고 불리는 국제적인 공동체연합에 속한 공동체로서 정신적인 장애를 지닌 남녀와 그들을 돕는 협력자들이 산상수훈의 정신으로 함께 살려고 노력한다. 나는 여섯 명의 정신장애자와 세 명의 협력자들과 한 집에서 살고 있다. 협력자들은 정신장애를 지닌 사람과 일하도록 어떤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았으나, 우리는 마을의 의사들, 심리학자들, 행동관리 담당자들, 사회사업가들 그리고 상담자들에게서 필요한 모든 도움을 받는다.

어떤 특수한 위기가 없을 때에는 한 가족으로서 함께 지내곤 하는데, 점차 누가 장애인이고 아닌지를 잊어버리게 된다. 우리는 그저 존, 빌, 트레버, 레이몬드, 아담, 로즈, 스티브, 제인, 나오미 그리고 헨리일 뿐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고유한 선물들, 갈등과 투쟁들, 힘과 약함을 갖고 있다. 우리는 함께 먹고 함께 놀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밖에 나간다. 우리는 일, 음식, 영화 등에 관해 각자의 선호를 지니고 있으며 장애인이든 아니든 집안의 다른 사람과 지내는 데에 모두 문제들을 겪는다. 우리는 많이 웃는다. 또한 많이 운다. 때때로 동시에 웃고 울기도 한다.

매일 아침 내가 “좋은 아침입니다, 레이몬드” 하고 인사하면 그는, “난 아직 잠이 덜 깼어요. 매일 아침 모든 사람에게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하는 것은 비현실적입니다” 하고 말한다. 지난 성탄전야에 트레버는 은박종이에 평화선물로 마쉬멜로(과자종류)를 싸서 모든 사람에게 돌렸고, 성탄 만찬 때에는 의자 위에 올라가 잔을 치켜들며 말했다, “신사숙녀 여러분, 이건 축제가 아니라 크리스마스입니다.”

전화를 하고 있던 어떤 식구가 협력자의 담배연기 때문에 힘들어지자, 화가 나서 “담배 그만 피세요! 들을 수가 없잖아요” 하고 소리질렀다. 그리고 저녁식사에 초대되는 모든 손님은 빌에게서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접대를 받는다, “안녕하세요, 조마조마 하고 있는 칠면조가 무엇인지 나에게 말해주실래요?” 새로 온 손님이 모르겠다고 자백하면 빌은 얼굴에 큰 미소를 띄고 “내일 말해 줄께요” 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너무나 크게 웃기 시작하므로 방문객도 농담이 재미있든 없든 같이 따라 웃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라르슈 공동체이고 새벽공동체이다. 이것이 내가 밤낮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열 명이 함께 살고 있는 가족이다. 이처럼 소수의 가난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가족이 우리가 찾고 있는 그리스도의 평화에 대하여 무엇을 밝혀줄 수 있는가? 우리집 열 명 가족 중의 한 사람인 아담에 대해서 말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이 세상으로부터의 평화가 아닌 다른 평화를 그가 어떻게 침묵으로 말하고 있는지 보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전혀 일해본 적이 없었던 나는 이 낯설은 세계에 들어가기가 걱정될 뿐 아니라 두렵기조차 했다. 이러한 두려움은 내가 아담과 살도록 초대받았을 때에도 줄어들지 않았다. 아담은 우리 가족 중에 가장 약한 사람이었다. 그는 25살 된 남자로, 혼자서 말하거나 옷을 입거나 벗거나, 혼자 걷거나 먹거나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울거나 웃지도 않았고 간혹 가다 눈맞춤만 할 뿐이다. 그의 등은 뒤틀렸고 팔과 다리 동작도 제멋대로 이다. 그는 매우 심각한 간질로 고통을 겪고 있으며 약을 엄청나게 많이 투약해도 “대발작” 없이 지나가는 날들이 별로 없다. 때때로 갑작스레 몸이 굳어지면 그는 울부짖는 신음소리를 내고, 몇 번 그의 뺨 위로 흘러내리는 큰 눈물을 본 적도 있다. 아담을 깨우고, 약을 먹이고, 옷을 벗겨 목욕탕으로 데려가서 씻기고 면도를 해주고 양치질을 하고 옷을 입혀서 식당으로 데려가 아침을 먹이고 휠체어에 앉혀서 하루종일 치료를 받고 연습하는 곳으로 데려가는 데에 한 시간 반이 걸린다.

이런 모든 행동을 연달아 하는 동안 대발작이 일어나면 더 많은 시간이 걸리며, 발작 때문에 힘을 많이 썼기 때문에 기운을 회복하려면 다시 자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담에 대한 양육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친밀한 무엇인가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한 달쯤 아담과 이런 식으로 살아가다 보니 전에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나에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심각한 장애를 지닌 이 젊은 청년이, 많은 사람들이 당황스러운 애물이라 생각하고, 뒤틀린 인간, 태어나서는 안되었을 쓸모 없는 피조물로 여기는 이 청년이 나의 가장 사랑스러운 동반자가 되기 시작했다. 내가 가진 두려움이 점차 사라지면서 풍요로운 부드러움과 애정으로 가득 찬 사랑이 내 안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아담과 보내는 시간이 다른 모든 내 과제들을 지루하고도 피상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 같았다. 이렇게 부서진 몸과 정신을 지닌 한 피조물로부터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선물을 나에게 주고있는 가장 아름다운 인간존재가 다가왔다. 이 체험을 표현할 적절한 말을 찾기가 어렵지만, 어쨌건 아담은 자신이 누구였고 내가 누구였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내가 그의 벗은 몸을 목욕통 속에 넣고 물이 그의 가슴과 목 주변을 빠르게 왔다 갔다 하도록 큰 파도를 만들고, 그의 코를 닦아주면서 그와 나에 관한 온갖 이야기들을 말할 때 나는 두 친구가 생각과 감성의 영역을 훨씬 초월하여 서로 통교하고 있음을 알았다. 심연은 심연에게 말하고, 영은 영에게 말하며 마음은 마음에게 말한다. 나는 지식이나 감정을 함께 나누는 것에 근거하지 않고 인간성을 함께 나누면서 서로 사랑할 수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내가 아담과 더 오래 머물수록, 그는 나의 부드러운 교사가 되어 어떤 책이나 학교, 혹은 교수가 가르쳤던 것보다 더 좋은 것을 나에게 가르치는 존재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어떤 추한 것으로부터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이런 상황을 낭만화 시키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너무나 심각하게 지체된 정신장애자의 아버지가 되고 싶은 욕구를 투사하고 있는 것인가? 사실은 무슨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막아야 할 수치스러운 인간의 조건, 상황을 영적인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런 질문들을 제기할 만큼 지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충분한 훈련을 받은 사람이다. 최근에 -이 이야기를 쓰는 동안- 아담의 부모가 방문했다.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아담이 집에 있었던 긴 시간동안 그는 부모님에게 무엇을 주었던가요?” 그의 아버지는 웃음을 머금고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었어요... 그는 우리의 평화지기입니다... 평화의 우리 아들이지요.”

이제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 아담의 평화에 대하여 말하고 싶다. 아마도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의 평화에 말을 붙이는 것인지 모르며 이 간단한 사실이 나를 감동시킨다. 아담의 극한적인 약함 속에 숨겨진 평화의 선물은 이 세상이 주는 선물이 아니라 확실하게 세상을 위한 선물이다. 이 선물이 알려지려면, 누군가가 이 선물을 들어올려 전달해야 한다. 이것이 아마도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협력자가 된다는 것의 가장 깊은 의미일 것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도와 그들의 선물을 나누는 것이다. 아담의 평화의 선물은 존재하는 것과 마음속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항상 공동체를 요청한다. 아담의 평화에 관해 세 가지 측면들을 조금 밝혀보고자 한다.

 

[출처] <우리를 초대한 길들- 헨리 나웬 신부의 글 모음>, 1995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01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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