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높은 곳을 향해 저 낮은 곳을 바라보는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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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높은 곳을 향해 저 낮은 곳을 바라보는 신앙
  • 박철
  • 승인 2020.07.20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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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칼럼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기독교 정신으로>라는 책의 저자인 루이스 에블리(Louis Everly)는, 나쁜 종교는 늘 도피성, 소극성, 무책임성을 좋아한다고 말하였다. 이런 나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위쪽 하늘에 눈을 고정함으로써 아래쪽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보지 않는다"고 에블리는 덧붙여 말하였다.

그리스도인은 '위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도 바울로는 "여러분은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시오"(콜로 3,2)라고 권면하지 않았던가? 바울로가 여기서 말하는 '위에 있는 것'이란, 이 자상적인 것과 대조되는 하늘의 것, 물질적인 것과 대조되는 정신적인 것, 육적인 것과 대조되는 영적인 것, 사회적인 것과 대조되는 개인적인 것 등을 의미하고, 기독교인은 전자보다 후자에 관심하고 추구하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음은 의심이 없다.

그러나 이런 바울로의 말씀과 사상은 예수님의 말씀과 사상에 의해 평가되고 조건 지어져야 한다. 생명과 자유와 진리의 복음과 하느님 나라의 복을 이 땅에 선포하고 실현하기 위하여 이 땅의 구세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펴셨던 선교의 빛에서 볼 때, 콜로새 신자들에게 써 보냈던 바울로의 편지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그 타당성이 제한적인 것임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예수님은 하느님 신앙의 본질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람) 사랑의 나뉠 수 없고 동시적인 일체성으로 표현하였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의 빈곤이나 결여는 실상 다른 하나의 빈곤이나 결여를 낳는 것이다. 즉 이웃(사람, 세상)을 소홀히 한다는 것은 곧 하느님(하느님 나라)을 소홀히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모형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에 편중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의 경향(17세기,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저 낮은 곳을 향하여"의 경향과 균형이 잡혀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베드로나 히브리서 저자가 강조하고 있는 대로 '저 높은 곳'에 있는 '영원한 고향'인 하느님의 바라를 바라보고 이 지상에서는 나그네요 순례자로 살고 있다. 그러나 그 영원한 고향에 도달하기 전에, 아니 그 고향에 도달하기 위하여 인간이 이 지상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이 곧 하느님의 뜻을 이 땅 위에 선포하고 실현하는 일이다. 즉 이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사회구원이냐 개인구원이냐는 문제로 논쟁한다는 것은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그리스도인은 이런 문제를 흑백논리로 단순하게 보면 안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성서는 물론 예수님의 복음 내용을 잘못 해석하고 잘못 전달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높은 곳을 쳐다보고 동시에 낮은 곳을 바라보아야 한다. 저 멀리 지평선과 수평선 너머로부터 동터오는 하느님 나라의 시작도 볼 수 있어야 하지만 코 앞의 현실도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사람의 안(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하지만 밖(세계)도 내다볼 수 있어야 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섬김을 받으려는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철저한 자기갱신을 통하여 성도와 세상을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만일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고백한다면 반드시 주님처럼 낮은 자리로 내려가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자기를 버리고 이웃을 섬기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교회에도 어느덧 세상의 경쟁논리가 스며들어 큰 교회, 유명한 목회자, 부유하고 많이 배운 교인을 자랑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 것을 버리고 이웃을 섬긴다는 것은 용기 있는 선택이 수반되어야 하는 결단의 행동이다. 그 결단은 주님처럼 죽는 결단일 것이다.

그렇다. 한국교회가 죽는 결단을 하지 않으면 부활은 없을 것이다. 주님이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죽으심으로 부활의 영광을 체험하셨듯이 한국교회도 스스로의 살과 피를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자기갱신을 통하여 다시 한 번 우리 민족의 소금과 빛으로 희망을 주는 교회로 설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교회가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이 민족에게 희망을 줄 수 없다. 아기 예수의 성육신의 사건을 한국교회는 온몸으로 드러내야할 때이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꺼져가는 심지를 돋우고 빛을 발해야 할 것이다. 스탠리 존스(E. Stanley jones)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는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인간은 필요를 위하여 제반 조건을 변경하려는 노력에 대하여, '종교가 위험에 처해 있다'고 부르짖는 성직자보다도, 경제적, 사회적 정의를 쟁취하기 위하여 강인하면서도 따뜻한 정열을 가지고 가난한 자를 그 예속상태에서 해방하려고 애쓰는 세속주의자인 지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에게 나는 더 가까움을 느낀다."

 

박철
탈핵부산시민연대 상임대표
감리교 은퇴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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