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혁명, 양말을 깁고 꿰매는
상태바
일상의 혁명, 양말을 깁고 꿰매는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0.07.20 11: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9

며칠 전에 산 아랫마을에 살던 처자가 산중턱에 자리한 우리 뒷집에 방을 한 칸 얻어 이사 왔다. 아침부터 이웃의 귀농자들이 이삿짐을 날라 주려고 모였는데, 처녀 혼자 살림하는 짐치곤 꽤 많은 양이었다. 시골살림은 그렇다. 처음엔 몸만 마을로 들어와도 한 해 두 해 살다보면, 농기구는 물론이고 살림살이가 늘어난다.

한 몸을 건사하나 두 몸을 건사하나 가스레인지도 하나 있어야 하고, 밥그릇도 여벌이 필요하고, 나중엔 쌓아 놓은 장작이라도 늘어나게 마련이다. 다른 게 있다면 이 물건들을 도시살림처럼 항상 새것처럼 깔끔하게 간수하기 어렵다는 점, 대부분의 집기들이 중고라는 점이다. 쓰기에 큰 불편 없고, 제 소용이 닿는다면 외관상의 흠집이나 사소한 고장조차 문제될 것이 없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 점에서 서울의 아파트에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싫증이 날 때마다 가구를 갈아치우고 새로 장만하는 풍속은 시골에선 이해하기 어렵다. 시골에선 망가진 전자제품이 아니라면, 버릴 게 그다지 많지 않다.

일주일에 한 번씩 강의하러 나가는 푸른꿈고등학교에서 낡은 건물을 헐고 새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나온 폐자재를 버린다기에, 오늘도 그 자재들 일부를 화물차로 실어왔다. 나무판넬 등은 창고를 짓는 데 사용하고, 영 쓸모없는 목재들은 잘라서 겨울 땔감으로 쌓아둘 셈이다. 시골집이 아파트처럼 각지고 반듯할 필요는 없다. 집이란 노동을 준비하고 오늘의 휴식을 위해 쓸모 있는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면 그로 족하다. 이 집 주변을 마을 곳곳에 지천으로 돋아나는 봄꽃들이며, 텃밭에서 자라는 작물들이 임의롭게 돋아나 아름답게 꾸며 준다. 새들은 아침마다 부르지 않아도 찾아와 지저귄다. 공간이 소박할수록 더 빛나는 환경이다. 콘크리트 담벼락보다는 귀퉁이가 부서져 나간 흙담 벽에 기대어 피는 꽃들이 더 운치 있다.

그 안에 터 잡고 사는 사람들은 제 먹을거리를 장만하느라, 해가 하늘에 머무는 동안에 밭이며 논에서 땀 흘려 일한다. 그래서 배추가 많이 나오면 지나는 길에 이웃집에 들러 나눠주고 가는 흐뭇한 순간도 있고, 팔아서 생활비를 보태기도 한다. 전기가 나가면 드라이버를 찾아보고, 벽이 부실하면 다시 흙을 이겨서 바른다. 틈나는 대로 돌담을 쌓고, 집 주변에 꽃나무도 심고, 헛간도 짓고 창고도 만든다. 솜씨 좋은 사람들은 닭장은 물론이고 사람 사는 집도 손수 짓는다. 물론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마감이 깔끔하지 않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문을 하나 달아놓고도, 제 딴엔 흐뭇해서 몇 번이고 쳐다보면서 스스로 감탄한다. 이만하면 그럴듯한데, 그런 투다.

도시처럼 남이 와서 살림을 돌보아 주면, 내가 할 일은 어렵사리 마련한 돈을 셈하여 치르는 일뿐이다. 나는 밖에 나가 뼈빠지게 돈을 벌고, 남들은 내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 좀 억울하다 는 느낌이 들 것 같다. 누가 뭐라 해도 제 생존의 큰 부분을 자신이 직접 감당할 수 있다면 그는 복된 사람이다. 내 일상을 내가 스스로 돌 볼 수 있을 때, 나랏일도 스스로의 몫으로 여기고 성큼 나설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나랏일이 잦아들면 다시 내 일상의 다복(多福)한 주변을 끌어안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일상과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사정을 내가 직접 봐줄 수 있다고 확신할 때, 우리의 자존심은 상처받지 않는다.

 

<간디 자서전>을 읽어보면, 소박한 삶에 대한 몇 가지 일화가 실려 있다. 간디가 남아프리카에서 변호사로 일하던 시절이었는데, 와이셔츠와 칼라를 빨래하는 문제가 항상 골치였던 모양이다. 칼라는 날마다 갈아야 했고, 셔츠는 적어도 하루 걸러서는 빨아야 흉하지 않았다. 처음엔 세탁소에 맡겼는데 그 비용을 감당하기도 어렵고, 제때에 세탁물을 가져오지 않자 손수 세탁해 보기로 하였다. 지식인들의 버릇대로 그는 세탁기구를 장만한 뒤 세탁방법을 책을 통해 공부하였다. 그러나 이론과 실제는 다른 법이어서, 맨 처음 빨았던 칼라는 풀을 너무 많이 먹인 탓인지, 빳빳하긴 하였지만 풀가루가 자꾸 떨어 져서 다른 변호사들의 비웃음을 샀다.

“어떻소, 이것은 내가 처음 빨아 본 칼라라서 풀이 떨어지지만 상관없어. 그리고 자네들을 웃긴 것만 해도 좋은 일 아닌가?” 했더니, 동료들은 “그곳엔 세탁소가 없더 냐?”는 말만 되풀이하였다. “세탁비가 엄청나거든. 칼라 하나 빠는 값이 거의 칼라 값과 맞먹는데, 언제까지나 그놈의 신세를 져야 하니, 차라리 내 물건은 내 손으로 빠는 게 낫지.” 하고 대답했지만, 자기 물 건을 제 손으로 수선해서 입는다는 생각은 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 간디는 숙련된 세탁공이 되었다. 간디는 이발 문제도 제 힘으로 해결했는데, 영국인 이발사가 내내 업신여기는 태도로 머리를 깎아주었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불가촉천민에게 이발해 주는 이발사가 없는 것처럼, 영국인들은 직업이 변호사라 해도 시커먼 인도인의 머리를 만지는 것을 꺼려했던 모양이다. 간디는 곧 이발기구 한 벌을 마련해서 손수 머리를 깎았다. 그런데 앞머리는 몰라도 뒷머리는 잘 되지 않았다. 법원에 갔더니 동료들이 다시 와글짝하게 웃었다. “여보게 간디, 자네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쥐가 뜯어먹은 것 아닌가?” 그러나 간디는 아무 상관하지 않았다.

간디는 이렇게 일상을 다시 조직하였다. 뭐든지 제 힘으로 할 수 있 는 것은 남의 도움을 정중하게 사양하였다. 고맙지만 이건 저도 할 수 있는 일이걸랑요, 하는 태도가 그 사람의 자존심을 지켜준다. 간디가 영국인들의 제국주의적 힘으로부터 인도를 해방시키기 위해, 인도인의 영혼에 자긍심을 불어넣기 위해서, 손수 자신의 물레를 돌리자고 말하고 스스로도 물레를 돌려서 옷을 지어 입었을 때, 인도의 해방은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 시대의 문제는 우리 자신이 어떻게 자본주의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자본의 힘에 저항하기 위해서,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본질에 대해 서 학습하고, 조직활동을 통해 이슈파이팅을 하고, 미 대사관 앞에서 항의시위를 하고, 국제회의장 앞에서 엔지오(NGO) 포럼을 개최한다. 자본가의 힘에 맞서 농성을 하고 경찰력을 뚫고 거리집회를 감행한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이들이나 노동자들의 처지는 음지에 있고, 양지에서 활보하는 사람들은 아쉬울 게 없다.

언젠가 부산의 어느 백화점 앞에서 예전에 노동운동을 함께 하던 선배를 만나러 간 적이 있었다. 내가 사는 무주는 따뜻했는데, 바닷가라서 그런지 저녁때라서 그런지 그날따라 지랄 맞게 바람이 불고 추웠다. 내친 김에 선배를 기다리면서 백화점 안엘 들어가 보았다. 1층을 한 바퀴 휘돌아 나오는데, 내내 직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출구에선 정장을 한 직원들이 허리 숙여 인사를 하였다.

이들의 사열은 백화점 문을 닫을 때가 되어서 치러진 것이었고, 멋모르고 이 예식에 참여한 꼴이 되었다. ‘손님은 왕’임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의례였다. 고객을 위한 서비스 뒤엔 엄청난 규모의 자본이 손을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터였다. 백화점은 쉬지 않는다. 막판까지 얼마 이상의 물건을 산 사람들에게 주는 상품권을 들고 상품권 교환대로 달려가 물건을 받아 오는 사람들로 현관이 북적였다. 여기는 이처럼 태평성대인데, 신문에선 구조조정이니 뭐니해서 위기일발의 시국이다.

상황을 돌파하려는 거대담론 뒤에서도 일상은 계속되고, 우리가 큰 싸움에서 이기더라도 일상에서 실패하고 있다면 결국 우린 큰 싸움 뒤에 올 혼란을 경험할 것이다. 자본은 변화무쌍한 얼굴로 다른 손을 내밀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처지가 바뀔 때 우리가 백화점의 그 호사를 마다하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또 다른 사람들이 색다른 음지에서 고통 받을지 어찌 가늠하겠는가.

그래서 힘의 역전(逆轉)을 기대하는 마음보다 소박함 자체가 항구하게 빛날 수 있는 세상을 기대해야 한다. 그리고 일상의 바닥에서, 생활의 모퉁이에서 질박함 자체를 즐기는 지혜가 필요하고, 그렇게 집안 한구석에나마 화분을 들이고, 생선박스에 흙을 담아 들꽃을 키우는 마음을 ‘바쁜 와중에라도’ 키워야 하는 게 아닐까.

자본에 대한 저항은 단순히 만인의 평등한 소비를 위한 투쟁이 아니다. 전혀 다른 의미의, 자본주의적 형식이 의미가 없어지는 적절한 관계를 이뤄내려는 사상(가치관) 투쟁이다. 지금 ‘비용’과 상관없이, ‘경제사정’과 상관없이 투쟁의 한가운데서 양말을 ‘깁고 꿰매어’ 신는 혁명을 기대한다면 시대착오일까. 한 손에 유인물을 들고 떨어진 호주머니를 달아매는 손끝에서 진정한 세상은 그에게로 다가오는 게 아닐까. 동지와 마주 앉은 사무실에서 아기 옷을 실로 뜨면서도 얼마든지 열렬한 담론을 나눌 수 있는 자의 입에서 참신한 지구촌이 탄생하지 않을까.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