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머튼, 습관적인 신앙에서 예언적 신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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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머튼, 습관적인 신앙에서 예언적 신앙으로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0.07.06 19: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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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머튼-은둔하는 수도자, 문필가, 활동하는 예언자", 키스 제임스, 비아, 2014

코로나19는 전 세계 시민들에게 재앙이고 퇴치해야할 전염병이지만, 우리 시대의 징표가 무엇인지 확연히 보라는 전갈이기도 하다. 초고속 현대문명이 낳은 전 세계적 전파력은 좋은 것도 나르지만 나쁜 것도 실어 나른다. 그리고, 이제 교회 안에서도 신자들은 ‘거리 두기’를 해야 하며, 어쩌면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야 할 장소가 교회 건축물/공간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 있다고 넌지시 알려주는 것 같다. 정작 성사가 나누어지는 제대가 교회당 밖에도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잉글랜드 성공회 사제인 키스 제임스는 토마스 머튼에 관한 책을 내면서 “그는 자신이 한때 등졌던 세상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했고, 이 과정을 통해 은둔 수도자에서 예언자로 거듭났다.”고 말했다. 머튼은 흔히 ‘영적인 사람’으로 쉽게 분류되지만, 교회 출석률 저하, 소비주의와 사회적 불의, 전쟁과 다양한 종교적 갈등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으며, 사후에 출간된 <행동하는 세계 안에서의 관상>(Contemplation in a World of Action)은 그가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무엇을 추구했는지 보여준다고 했다.

 

사진출처=telegraph.co.uk
사진출처=telegraph.co.uk

 

토머스 머튼은 누구인가?

토머스 머튼은 1915년 1월 31일 프랑스 프라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화가였는데, 아버지는 뉴질랜드 태생 영국인이었고 어머니는 미국 태생이었다. 그래서 머튼은 프랑스, 영국, 미국을 돌아다니며 교육을 받았다. 머튼의 어머니는 그가 여섯 살 때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열여섯 살 때 세상을 떠났다. 러틀랜드에 있는 오컴 사립 기숙학교에 다니며 잉글랜드 성공회를 접했고, 케임브리지 대학을 거쳐 미국의 콜롬비아 대학에서 공부하던 1939년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1941년 켄터키 겟세마니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이곳은 규율이 매우 엄격한 시토회, 곧 트라피스트회였다.

머튼은 여기서 침묵수련과 공부, 일상노동을 하며 지내다가 1948년 자서전 <칠층산>이 세계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면서 영성작가로서 유명해졌다. <칠층산>에 따르면, 그는 수도원에서 변치 않는 행복을 얻었다고 처음엔 믿었다. 그는 세상에 대한 경멸과 부정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었지만, 후기로 갈수록 세상에 대한 연민으로 이동했다. 이후 머튼은 수도원을 더는 타락한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요새로 간주하지 않았다. “수도원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처가 아니다. 수도원에 있음으로써 나는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투쟁과 고난에 진실로 참여한다,”

머튼의 이러한 태도 변화는 1958년 3월 18일에 체험한 비전에 뿌리를 둔다. 머튼은 수도원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 루이빌에 여행하던 중 4번가와 월넛 스트리트가 만나는 모퉁이에서 군중을 바라보았다.

“상가 중심에서 나는 감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거리를 오가는 이 사람들을 사랑했다. 그들은 나의 것이고 나는 그들의 것이었다. 비록 서로 낯선 사람들이지만 서로 이질적인 사람일 수 없음을 깨달았다. 모든 것을 단념하는 세계이자 거룩한 곳이라 여겨지는 특별한 세계에 관한 거짓된 자기 고립의 꿈에서 깨어났다. 세상과 격리된 삶을 사는 거룩한 존재라는 꿈은 모두 망상이다. 이는 내 소명을 의심하거나 내 수도원 삶의 진정성을 의심해서가 아니다. 내가 회의한 것은 우리가 수도원에 대해 너무나 쉽게 착각하는, ‘수도원은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다’는 관념이다. ... 인류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영예로운 운명이다. ... 나는 내가 인간인 것에 대해, 하느님께서 몸소 성육신 하신 인류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에 헤아릴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

머튼은 첫 번째로 회심했을 때 세상에서 돌이켜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갔다. 두 번째 회심은 이 세상에 살아계신 하느님과 그분의 사람들, 이 세상이 지닌 아름다움과 문제를 알게 된 것이다.

 

망상을 부수는 그리스도인

머튼은 회심이란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것이나 그리스도교 신앙이 요구하는 일정한 신조를 받아들이는 차원을 넘어선다고 믿었다. 1961년 나치 장교이자 홀로코스트 전범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이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 증언할 때 아이히만이 조금이라도 자신의 행동을 의심하거나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데 머튼은 충격을 받았다.

“아이히만과 무수히 많은 다른 유대인 학살범은 포로 수용 캠프에서 저지른 자신들의 행동을 당연시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 충격을 받지도, 놀라지도 않았고, 일말의 후회도 하지 않았다. 아이히만은 마지막까지 자신이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인간이며 하느님께 순종한다고 말했다.”

아이히만 사건을 보며 머튼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갑작스럽게 빛을 쪼아 모든 어둠을 영원히 없애는 방식을 보증”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다. 제대로 된 그리스도교 신앙이라면 이런 파괴적인 망상을 허무는 데 참여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망상은 누군가의 ‘자아’에 숨겨져 있으며 종종 독실한 율법주의 아래, 더 나아가서는 명백히 선해 보이는 의도 안에서도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백한 그리스도인으로 가득 찬 교회 안에서도 이런 망상을 뒤흔들어 놓을 사람이 필요하다. 교회라는 이유만으로 진리를 보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머튼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말한다. <새 명상의 씨>에서 머튼은 “자신을 찾기 위해 기도하라”고 권한다. 2세기 신학자 이레네우스는 “하느님의 영광은 인간이 온전히 사는 것”이라 했다. 이는 수도원 전통에서 늘 강조하던 것이었는데, 지속적이고 평생에 걸친 ‘생활방식의 전환’을 의미했다. 그래서 그는 죽기 전 마지막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많은 시인이 진정한 시인이 아니듯 많은 종교인이 참 수도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진정한 자신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바라신 참된 시인이나 참된 수도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사진출처=francescaphillips.com
사진출처=francescaphillips.com

 

어떻게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만날까
_열린 사랑의 우선성

하느님을 만나려면 열린 마음으로 “말하기 전에 먼저 듣는” 훈련을 해야 한다. 머튼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 혹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을 만날 때도 하느님을 만난다고 믿었다.

“분명 가시적인 교회 하나하나는 만방에 복음을 가르치고 이 세계를 신성화 하는 공식적인 임무를 갖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나라의 숲을 벗어나 만난 낯선 사람 역시 이미 그리스도의 보이지 않는 구성원일지도 모르며, 어떤 섭리를 담고 있는 메시지나 예언적인 메시지를 전해 줄지도 모른다고 믿어야 한다.”

머튼은 신앙을 지닌 사람과 다른 신앙을 지닌 사람, 신앙이 없는 사람 모두에게 열린 태도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태도는 “하느님께서는 어디에나 임하시며, 우리는 다른 사람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는 성 베네딕도의 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성 베네딕도는 현존하는 하느님 아들은 나자렛 예수라는 인격에 갇히지 않으며 병자와 나그네, 가난한 이들, 그리스도의 임재를 가리키는 모든 이들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한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자를 늘리는 ‘선교’가 곧 사랑의 실천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실천하는 사랑은 단지 남에게 오만한 태도로 뭔가를 주려고 적선하는 태도나 관용을 베푸는 행동이 아니다. 사랑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더 잘 알게 해 준다.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숨겨진 그리스도를 마주하는 신비를 경험한다. 이러한 신비는 그 사람들도 우리도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들의 삶에 분명한 흔적을 남긴다.”

머튼은 사막 교부들의 금언을 소개하면서, 수도원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지식, 영적 직관, 고행, 명상, 고독, 기도를 넘어선다. 사랑은 그 자체로 영적인 삶이다. 사랑이 없다면 모든 영적 훈련은, 그것이 아무리 고상하더라도 속 빈 강정이며 그저 환상 속에 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훈련이 고상하면 고상할수록 환상은 더 위험해진다.”

시토회의 창립자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는 매일 매일 더 영적으로 진보하고 싶다면, 사랑 안에서 마지막 날까지 인내하라고 권고한다. 사랑의 길은 하느님을 향한 갈망과 이웃을 향한 연민을 하나로 묶기 때문이다.

“다른 이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온전해지려면 그 뿌리에 반드시 하느님이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그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누구도 온전히 자신의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자신의 동료를 사랑할 수 없다.”

 

사진출처=monasticway.tumblr.com
사진출처=monasticway.tumblr.com

관상과 예언

머튼에게 침묵과 관상은 행동만큼 우선적인 과제였다. 침묵은 교회가 불안에 잠긴 채 서둘러 행동하지 않도록 하며,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바라보도록 돕는다. 관상은 ‘침묵 안에서 듣기’다. 머튼은 관상을 하지 않고는 “우리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으며, 우리가 활동하는 이 세계가 지닌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관상이 없다면 “우리는 작고, 제한되어 있고, 나뉘고, 부분적인 상태에 있을 뿐이다. 우리는 불충분하게, 동시에 영속적으로 우리 자신이 속한 공동체, 우리 자신이 지닌 흥미에 몰두하려고 한다. 정의와 자비의 관점을 내버린 채 순간의 열정만을 붙잡으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를 배신한다.”

관상이 없는 행동주의를 비판하는 머튼은 행동주의가 종교에서 ‘쉼’을 사라지게 하고, 지나치게 결과만 숭배하는 실용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그래서 자신의 동료 수도자들에게 행한 설교에서 복음서의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마리아와 마르타 이야기를 관상과 활동의 조화라는 관점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마리아가 집에 혼자 있었다면 누구도 주님에게 음식을 제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타가 집에 혼자 있었다면 누구도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임재하심을 맛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르타는 활동, 그리스도를 위한 노동의 상징입니다. 마리아는 육체적인 노동에서 벗어나 쉬면서, 주님의 달콤함을 맛보기 위해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관상했습니다. 형제들이여, 이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 계신 동안 가난하셨고 배고파하셨으며 목말라하셨고 유혹에 시달리셨습니다. 두 여인이 한 집에서 함께 살았다는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처럼 한 영혼에는 저 두 가지가 함께 일어납니다.”

머튼은 이처럼 침묵과 관상, 행동이 함께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다. 이를 압축적으로 이렇게 표현했다. “관상은 새로운 세계를 자기 스스로 건설할 수 없다. ‘그러나’ 관상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세계에서 행동해야 할 중요한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리고’ 관상을 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과의 친밀감을 잃어버린다면, 침묵이 없다면, 사랑을 통해 은밀하게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행동은 세상에서 그 목적을 잃어버리며 위험해진다.”

이러한 관상과 행동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게 ‘예언’이다. 머튼은 저작의 많은 부분에서 사회적인 문제를 다룬다. 여기서 예언이란 “한 사람의 양심 깊은 곳에 있는 차원을 뒤흔드는 것”이라 했다. 또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참된 예언자가 되어 번민할지” “거짓 예언자가 되어 이 사회에 넘쳐 나는 유혹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편안함을 찾고, 썩은 고기를 즐길지”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머튼은 교회가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인류의 생존을 위태롭게 하는 커다란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그 중심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베트남 전쟁 등이 한창일 때, 가톨릭일꾼운동을 이끌었던 도로시 데이와 나눈 편지에서 “이런 시기에 관상과 같은 주제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은, 설령 그 글이 통찰력이 있다 할지라도 그 일이 양심적인 행동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세상을 향한 교회의 선교가 그 안에 대항문화적인 성격을 지녀야 한다고 머튼은 믿었다. 그래서 건강한 교회란 예고(세상에서 하느님의 임재를 선포하고 알리는 것)와 경고(정의롭지 못한 것을 분별하고 거짓에 저항하는 것)라는 두 부분을 한데 모아 예언하는 공동체라고 생각했다. 교회는 “세상을 거부하는 것과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서 일어나는 변증법”을 만들어가는 공동체라는 것이다.

 

초연한 사랑

예수는 ‘초연함’이란 말을 정확히 사용한 적이 없다. 그러나 13세기 독일 수도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초연함이 사랑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하며, 누구나 초연함을 추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머튼은 이 초연함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덕목 가운데 하나라고 지적한다. 초연함은 사랑을 품고 진실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초연함은 인기나 성취도에 연연하지 않으며, 초연함은 어떤 행동이 하느님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먼저 헤아린다.

“우리는 즉각적인 보상을 기대하지 않은 채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순간적인 만족에 기대지 않은 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어떠한 특별한 인정도 바라지 않으며 사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는 사실, 매우 크고 위대하다. 그러나 위대해지고자 하는 모든 열망을 내려놓지 않으면 위대함을 이룰 수 없다.”

이런 초연함은 우리가 진실로 사람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자유를 준다. 여기서 키스 제임스 신부는 벨든 C.레인의 <거친 풍광이 주는 위로>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사막 영성에서 시험은 오직 다른 이를 위해 어떻게 죽을 수 있는지, 그들을 어떻게 섬길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필사적으로 신경증에 걸린 것처럼 다른 이를 필요로 하는 것을 중단할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구체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

우리는 힘을 갈망하고 받아들이는 것에서 초연해질 때, 비로소 정의와 진리를 위해 철저하고 자유롭게 일할 수 있다. 키스 제임스는 데스몬드 투투 주교가 “정부가 기도의 가치를 알았더라면 그들은 즉각 기도를 금지했을 것”이라고 한 말을 기억했다. 그럼에도 ‘초연함’을 희망하는 태도가 자칫 연약함과 고통을 회피하는 영성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머튼은 잘 알고 있었다. 이때마다 머튼은 1938년에 죽은 러시아 수도자 스타레츠 실루인이 “너의 영혼이 지옥에 있을지라도 절망하지 말라.”고 한 말을 기억했다. 초연함은 바란 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아 실망을 느낄 때, 이걸 감추는 것이 아니다. 초연함은 진리에 집중함으로써, 낙담하면서도 신실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짐 포리스트는 평화운동에 연대하면서 머튼과 주고받았던 대화를 언급한 적이 있다.

“머튼은 초연함이 평화를 위한 연대를 보다 강하게 해줄 거라고 확신했다. 초연함은 결과를 얻는데 무심한 채 혼란스러워하는 게 아니라, 이루어지기를 바랐던 것과 전적으로 다른 결과가 나올지라도 선한 행동은 없어지거나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초연함은 궁극적으로 예수의 생애와 활동에 그 뿌리를 둔 것이다. 예수는 부자 청년에게 부와 지위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말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마르 10,17-22) 또한 루카의 복음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루카 9,62) 결국 건강한 초연함이란 하느님께서 자유로우신 분임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비전과 상상을 넘어 활동하심을 믿는 것이다.

다시 현실로

코로나19는 제도교회의 공동화 현상을 부추길 위험이 있다. 교황이 혼자서 바티칸 부활절 미사를 드리고, 본당 사제가 신자들 명패만 걸어놓고 혼자 미사를 봉헌하던 광경은 당혹스럽기만 하다. 평화방송에서 방영되는 미사를 보면서 영성체를 생략하는 주일날 느끼는 영적 허기를 달릴 길 없다. 다시 본당의 공동체 미사가 시작되었지만, 복잡한 방역 절차를 거쳐야 성당에 앉을 수 있다. 이때 자연스럽게 굳이 ‘성당에 모여야 신자인지’ 묻게 된다. 하느님이 예수라는 인격 안에 갇혀 있지 않은 것처럼, 그리스도는 본당 안에 갇혀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을 관상하고, 복음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이들의 모습 속에서 교회는 거듭 새삼 재현되고, 신앙은 효과적인 투신을 낳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습관적인 신앙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교회생활을 신앙생활로 착각하고 살아온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전히 제도교회는 돌아가 쉴 수 있고, 따뜻한 밥을 앉혀놓고 기다리는 어머니 같은 존재겠지만, 그 교회를 믿고 바깥으로, 우리 시대의 갈릴래아 같은 변방으로 가야 하는 게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우리는 매 순간 관상과 실천을 거듭하고, 자잘한 일상과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며, 경축하고 손을 잡아야 한다. 

 

*이 글은 격월간 <가톨릭일꾼> 2020년 여름호에 실린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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