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평화를 가져오는 이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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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평화를 가져오는 이가 될까?
  • 박철
  • 승인 2020.06.29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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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칼럼

그리스도의 산상설교는 그분이 구세주로 공적 행동을 시작한 때의 것이었다. 당시 사람들도 아직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저 “다행한 사람, 행복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는 당시 사람이나 요즘 사람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매일의 생활에 충족감을 맛보고 있는 사람, 기뻐하고 있는 사람, 할 일을 다 한 사람, 자기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한 사람,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는 사람, 평화를 맛보고 있는 사람” 등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느끼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정의에 굶주리고 목말라하는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정의를 위해 박해당하는 사람, 그리스도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다.

‘행복한 사람’이란 언제나 과거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 전진적 자세로 이상을 갖고 그것을 지향하여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또 자기 인격의 현재 상태에 만족해 버리거나 체념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이상을 지향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해가며 노력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참으로 사는 길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나쁜 인간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물론 제일 훌륭하다고도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개는 이러한 인간이니까 어떻게 할 수 없지 않느냐고 체념을 한다. 그런 사람은 행복한 것이 아니고, 또 깨달은 것도 아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그리스도의 눈으로 볼 때 자기는 타인의 신세를 지고 있다고 알아차리는 사람, 고치려 해도 도저히 고쳐지지 않는다는 자신의 인격의 미흡함을 슬퍼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또 사회를 위해 힘을 쓰겠다는 의욕은 있으나, 용기가 없고 남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고 싶은데 쑥스러워지는 등 그런 것을 극복할 수 없는 자신을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더 이상 무슨 교육을 받거나 지도를 받을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 많은 줄 알지만, 그런 사람은 성장의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예수님은 엄하게 보신 것이다.

슬퍼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 오직 “자기는 틀렸구나, 틀렸어”하고 자책만 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혐오에 빠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다시 한걸음 더 전진해서 결심을 세우는 것이다. “이제까지는 저 사람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부터는 친구로서 한걸음 더 그에게 접근해 가자,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에 만나면 먼저 인사를 하고 관계를 맺어 가겠다.”는 식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할 자세를 실천하기로 노력하는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태도가 정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것이다.

‘정의’, ‘평화’라는 말이 많이 쓰이고 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큰 문제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둘도 없는 형제이고 사회를 이룩해 가는 동료라는 것을 전면적으로 인정할 때에 자기의 편벽(偏僻)이나 선입견 등으로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를 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거기에 정의가 있다.

감정적으로나 생리적으로 남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일평생 못 고칠는지 모른다. 그러나 서로가 결점을 지니고 폐를 끼치고 살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하고 도와주고 살 때 평화가 있다. 이런 말을 하는 나 자신도 찔리는 구석이 많다. 단 한사람을 진정으로 소중히 하려고 할 때, 조직 안의 우리들은 전체가 문란해지거나 능률이 떨어진다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단 한 사람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그것이 진정한 정의이고 평화라는 말씀이다.

가족 중에 한 사람이 병에 걸렸다고 하자. 모두는 그 사람의 상태에 맞추어서 생활하게 된다. 모두가 손해를 보았다거나 능률이 안 난다고 하지 않고 잘 참고 견디게 된다. 여행계획이 취소되고, 큰돈이 축날 수도 있다. 가정에서는 그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히 다루어지고 모두 희생을 한다. 넓은 사회 안에서도 그와 같이 단 한 사람이라도 소중하게 서로 관계 지어 나가야 한다.

‘평화’는 언제나 목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평화는 그것을 추구하려고 노력하는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평화를 느끼고 있는 사람보다는 그것을 이룩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 편이 사회에서 더 필요하다. 부부간의 평화나 가정의 평화도 모두가 자기 마음대로만 하겠다는 것을 억제하고 서로가 떠받들어 주려고 노력함으로써 유지된다. 또 화해를 시키는 사람도 양쪽에 다 그 뜻에 맞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양쪽 사이에 끼여서 양쪽이 다 싫어할 수도 있다. 쌍방 공통의 적이 생겼을 때에, 양쪽이 사이좋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평화란 조용히 질서를 유지하는 것 같은 이미지가 강하지만, 사실 매우 활동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우리들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정말로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하는 약한 자라는 것을 자각하고, 늘 자신의 부족함을 슬퍼하고, 사회 안에서 항상 해야 할 일에 주리고 목말라하고, 이해를 못 받더라도 그 일을 계속 하라고 호소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형제인 작은 자 한 사람에게 자기 쪽에서 이웃이 되어 주는 적극적 자세와, 매일매일 자기 자신의 모순과 싸워가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노력이다. 이만하면 됐다고 할 수 있을 때는 결코 오지 않는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Your Peace)

 

박철
탈핵부산시민연대 상임대표
감리교 은퇴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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