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서 문 두드리며 교회 밖으로 나가고자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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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문 두드리며 교회 밖으로 나가고자 하신다
  • 토마시 할리크
  • 승인 2020.06.19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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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이후 그리스도교

세계가 병들었다. 나는 코로나19 판데믹뿐 아니라 오늘날 세계적 현상에서 드러나는 우리 문명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성경의 용어로 말하자면 ‘시대의 징표’이다. 그리스도교, 대표적인 ‘세계적 주체’인 보편교회 그리고 신학에 이러한 상황은 어떤 도전을 주고 있는가?

지난해, 부활절 직전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 불탔다. 올해 사순 시기 동안 여러 대륙의 수백 수천 개의 교회, 유대교 회당과 이슬람교 사원에서는 종교 예식이 이뤄지지 않았다. 사제이자 신학자로서 비어 있거나 폐쇄된 이 교회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여기서 하느님의 표징이자 해결과제를 발견했다. 공포를 뛰어넘는 근본적인 개혁의 시기가 온 것은 아닐까.

이렇게 특이한 사순 시기에 많은 사람들은 코로나19가 사회의 일상적 기능을 단기간 중단시키겠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이 문제를 극복할 것이고, 곧 모든 것이 제자리로, 예전처럼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돼서 좋을 것도 없으리라. 이러한 전 세계적 체험 이후 세상은 전과 같이 않을 것이며, 분명 그렇게 되어도 안 될 것이다.

대형 재난 때에는 생존하기 위한 물질적인 필요를 돌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 안정된 세상에 가해진 이러한 충격이 지닌 더 깊은 의미를 검토할 때가 온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세계화는 절정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전 세계의 전반적 취약성이 눈에 띈다. 이러한 상황은 그리스도교, 보편교회 그리고 신학에 어떤 과제를 던져주고 있는가?

 

by George Desvallieres
by George Desvallieres

교회는 야전병원 : 진단과 회복

교회는 ‘야전병원’이 되어야 했다. 이 은유를 통해 프란치스코 교종은 보편교회가 화려한 고립에 머물 것이 아니라 자기 경계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영적으로 고통 받고 있는 곳에 도움을 가져다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 이렇게 보편교회는 최근 교회를 대표하는 이들이 가장 약한 이들에게 가한 상처를 속죄할 수 있다.

보편교회가 ‘병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교회가 역사의 초창기부터 제공해온 보건서비스, 사회서비스, 봉사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좋은 병원으로서 보편교회는 다른 업무도 수행해야 한다. 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찾아내 밝히는 진단키트의 역할도 지닌다. 공포, 증오, 포퓰리즘과 국가주의라는 악랄한 세균이 암약하는 사회에서 ‘면역체계’를 만드는 예방의 역할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용서를 통해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회복의 역할도 가지고 있다.

하느님은 겸손하고 조용한 사랑이다

세상의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언어를 이해하려면 영적 식별의 기술이 필요한데, 이러한 식별을 위해서는 관상을 통해 우리의 격앙된 감정과 편견, 우리의 공포와 욕망의 투사에 거리를 두어야 한다. 재난의 순간에는 ‘복수를 일삼는 악한 하느님의 비밀요원들’들이 공포를 퍼트린다. 이들은 공포를 자신들의 종교적 자산으로 삼는다. 수 세기 동안 이들이 하느님을 바라보는 방식은 무신론에 기름을 부었다.

나는 하느님을 사건의 배후에 편히 앉아 있는 고약한 감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하느님을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연대와 편견 없는 사랑을 보여주는 이들에게 작용하는 힘의 원천이라고 본다. 그렇다, 설령 그들의 행동에 ‘종교적인 동기’가 없다한들 말이다! 하느님은 겸손하고 조용한 사랑이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텅 비고 폐쇄된 교회의 시대라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조만간에 벌어질 수도 있을만한 일을 경고하는 일종의 비전은 아닌지 묻게 된다. 몇 년 후 세상의 많은 부분이 이처럼 변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말이다. 수많은 지역교회가 이전부터 교회, 수도원, 신학교가 점점 비어가고 문을 닫는 일을 경험하면서 이미 경고를 받지 않았던가? 어째서 우리는 그리스도교 역사의 한 시기가 끝났고 이제 새로운 장을 준비할 시간이라고 이해하는 대신 이렇게 오랫동안 이러한 변화를 (‘세속의 쓰나미’라며) 외부의 영향이라고 탓했던가?

 

사진출처=visitmysmokies.com
사진출처=visitmysmokies.com

종교예식이 금지된, 교회제도의 총파업

사회적 거리두기로 교회 건물이 텅 비어버린 이 시기는 어쩌면 교회의 숨겨져 있던 공허를, 교회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진중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맞이할 수밖에 없는 미래를 보여준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려고만 했지 ‘그리스도인’의 근본적인 변화를 통해 우리 자신이 변화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중세 교회가 (가난한 이들과 다른 견해를 가진 이들에게) 처벌과 금기를 과도하게 사용하고, 예배와 성사에서 이들을 배제시키는 가운데, 사람들은 점차 (교회의 개입 없는) 하느님과 맺는 개인적인 관계를 뜻하는 ‘날것의 신앙’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평신도 재속회와 신비주의가 늘어갔다. 이러한 신비주의의 도약은 확실히 종교개혁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 때 종교개혁은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뿐 아니라 예수회와 스페인 신비주의와 관련된 가톨릭교회의 개혁이기도 하다. 아마 관상의 발견은 새로운 개혁 공의회를 향한 ‘공동합의적 여정’을 완성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공적 종교예식이 금지된 이 시기에 온라인 미사 등 대체물 형태로 주어진 단순한 해결책이 어떻게 충분한 해결책이 될 수 있는지를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폴란드, 아시아, 아프리카의 창고에서 교회 제도를 위해 ‘대체품’을 수입하여 유럽의 사제 부족 문제에 진정 대처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나? 우리는 종교 예식과 교회의 기능에서 젖을 뗀 이 사건을 카이로스(kairos, 특별한 은총의 순간)로, 즉 잠시 멈추어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과 함께 깊이 숙고할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긴급 상황’은 보편교회의 새로운 얼굴을 드러내준다.

 

사진출처=pixabay.com

 

교회는 하느님의 텅 빈 무덤인가?

우리 본당, 신자, 대중운동과 수도원은 유럽 대학을 탄생시킨 이상에 가까워져야 한다. 대학도 학생과 교수의 공동체이며, 자유로운 토론과 깊은 관상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는 지혜의 학교가 되어야 했다. 이처럼 새로운 공동체의 작은 영적 존재, 대화하는 작은 존재들은 병든 세상을 치유하는 힘의 원천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교황 선출 전날 베르골료 추기경은 예수께서 문 앞에 서시어 문을 두드리는 요한묵시록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오늘날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안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며, 밖으로 나가고자 하신다.” 아마도 이것이 그분께서 하신 일일 테다.

수 년 전부터 나는 ‘하느님의 죽음’을 선포한 ‘광인’에 관한 니체의 유명한 글을 묵상해왔다. 이러한 그리스도교 역사의 장은 광인이 교회로 가서 ‘신의 영원 진혼곡’(Requiem aeternam deo)을 부르고 “이 교회는 하느님의 무덤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질문할 때 막을 내린다. 오랫동안 교회의 여러 측면들은 내 눈에 돌아가신 하느님의 차갑고 화려한 무덤으로 보였었다. 하지만 우리는 텅 빈 무덤에서 복음 구절을 읽어볼 수 있었다. 교회의 텅 빈 모습이 텅 빈 무덤을 연상케 한다면,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외면하지 말자. “그분께서는 여기 계시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부활하셨다. 그분께서는 당신들보다 먼저 갈릴래아에 가 계신다.” 우리가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오늘날의 갈릴래아는 어디에 있는가?

신앙은 ‘유산’이 아니라 ‘길’이다

전 세계 ‘수행자/구도자’의 수는 ‘거주자’(종교의 고전적 형태를 따르는 이들과 교조적인 무신론을 주장하는 이들)의 수와 반비례로 증가하고 있다. 게다가 종교 문제나 기존의 답변을 조롱하는 ‘공감하지 못하는 자’의 숫자도 늘고 있다. 핵심 분기점은 더 이상 자신을 신자라고 여기는 사람들과 신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지 않다. 신자와 마찬가지로 비신자들 사이에도 ‘수행자’(이들에게 신앙은 ‘유산’이 아니라 ‘길’이다)가 있다는 것이며, 이 비신자들은 자기 주변 사람들이 제안한 종교 원칙을 거부하면서도 의미에 대한 갈망을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바로 그곳이 오늘날의 갈릴래아인 것이다.

해방신학은 우리에게 사회의 변방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찾으라고 가르쳤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 소외받은 사람들, 즉 ‘우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리스도를 찾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의 제자로서 이들과 연결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많은 것을 버려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과거의 개념을 상당수 포기해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죽음의 경험을 통해 근본적으로 변화하셨다. 복음서에서 보듯이 예수의 친지들마저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소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분의 상처를 계속해서 만지고자 애써야 한다. 게다가, 세상의 상처와 교회의 상처, 그분께서 몸에 새기신 육신의 상처 말고 어디에서 이러한 상처를 만날 수 있겠는가?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예수는 개종을 원하지 않으셨다

교회는 개종을 목표 삼는 일을 포기해야 한다. 교회는 수행자들을 하루 빨리 ‘개종’시켜 이들을 우리 교회의 제도적, 정신적 한계 안에 가두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예수께서도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어린 양’을 당대의 유대교로 다시 데려가려고 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겨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전통이라는 보물창고 안에서 새것과 오래된 것을 취하여 이를 대화시키고, 그러한 대화 안에서 우리는 양측에서 모두 배움을 얻어야 한다. 우리는 교회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경계를 넓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고결하게 ‘착한 사람들의 왕국’을 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주님께서는 이미 ‘안에서부터’ 문을 두드리시어 밖으로 나오셨고, 이제 그분을 찾고 따르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타인에 대한 공포로 우리가 잠가 놓은 그 문을 넘으셨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둘러싼 벽을 넘으셨다. 그분은 어지러울 정도의 규모와 크기를 가진 공간을 여셨다.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루어진 초대교회는 예수께서 기도하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성전의 붕괴’를 경험했다. 당대의 유대인들은 용감하고 창의적인 해결책을 찾았다. 이들은 무너진 성전의 제대를 가족 식탁으로 대체하고, 희생제물을 바치는 관습을 개인과 공동체가 기도하는 관습으로 대체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와 피의 희생을 ‘입술의 희생’으로 대체했다. 바로 성경의 묵상, 찬양, 연구로 대체한 것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초대 그리스도교는 유대교 회당에서 쫓겨나 자체적인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하고 있었다. 전통의 잔해 위에서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은 바닥에서부터 율법과 예언을 읽는 법과 이를 다시 해석하는 법을 배웠다. 우리도 같은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닌가?

더 깊은 곳으로 가기 위한, 텅빈 교회

로마제국이 5세기 초에 무너졌을 때, 이교도들은 이를 로마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채택했기 때문에 로마 신들이 벌을 내린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로마에 내린 하느님의 벌이라고 보았는데, 당시 로마는 여전히 탕녀 바빌론이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두 설명을 모두 거부했다. 그는 적대 관계인 두 ‘도시’ 사이의 세속적 대결이라는 자신만의 철학을 발전시켰다. 이는 그리스도인과 이교도 사이의 대결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존재하는 ‘사랑’이신 하느님께 닫혀있는 자신에 대한 사랑(amor sui usque ad contemptum)과 자기 자신을 봉헌함으로써 하느님을 찾는 사랑(amor Dei usque ad contemputm sui) 사이의 대결이었다. 오늘날 문명 변화의 이 시기도 현대역사에 관한 새로운 신학과 교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도, 어디에 없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정교회 신학자 파울 에브도키모프(Paul Evdokimov: 1901-1970)가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아마도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가톨릭교회와 교회일치에 관해 했던 말이 더욱 심오한 내용을 획득해야 하는 것인가? 교회일치를 확장하여 더욱 과감하게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찾을’ 시기가 온 것이다.

물론 우리는 텅 비고 침묵에 잠긴 이 교회들을 곧 잊어버려도 좋을 일시적인 조치 따위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카이로스로, 우리 눈앞에서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세상 속에서 ‘더 깊은 곳으로 가기 위한’ 기회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계신 예수를 찾지 말자. 과감하고 집요하게 그분을 찾고, 그분이 우리에게 이방인으로 나타나더라도 놀라지 말자. 우리는 그분이 은밀히 우리에게 말을 거실 때 그분의 상처와 목소리에서 그분을 알아볼 것이요, 평화를 가져오고 공포를 물리치는 성령에서 그분을 알아볼 것이기 때문이다. Ω

 

토마시 할리크(Tomas Halik) 신부 
1948년생인 할리크 신부는 중앙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인 프라하 카렐 대학교(Universzita Karlova v Praze) 사회학 교수이다. 체코 그리스도교 학술원 의장이기도 한 할리크 신부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군부 독재 시절 비밀리에 사제서품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후 할리크 신부는 체코의 ‘지하교회’를 이끌기도 했다.

 

[출처] <가톨릭프레스>, 2020.5.6. 끌로셰 번역
[원출처] <choisir> 2020.4.8. Tomáš Halík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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