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절을 마땅히 받으실 분, 우리들의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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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절을 마땅히 받으실 분, 우리들의 하느님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0.06.19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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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4
영화 , "Killing Jesus" 스틸컷
영화 , "Killing Jesus" 스틸컷

억울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 한 토막이 내 삶을 깊숙이 흔들어댔던 때가 있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던 고등학생 때인데, 한 친구가 빌려준 책을 읽고 무척 혼란스런 한 시절을 건너갔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책이 김성동이 쓴 <만다라>였다. 법운(法雲)이라는 수행자가 어느 산사에 들었는데 그 절에는 지산(知山)이라는 파계승이 찾아와 잠시 머물렀다. 아마도 주지스님과 인연이 깊었던 스님일 텐데, 말 그대로 땡중이었다.

정확한 기억인지 모르지만, 하루는 이 스님이 양지바른 툇마루에 앉아서 목각으로 부처를 만들고 있었던 모양인데, 부처의 꼴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법운 스님이 그 까닭을 묻자, 지산 스님은 이렇게 답한다. “세상의 모든 중생이 고통 받고 있는데 부처인들 온전하겠느냐?” 여기서 법운 스님은 큰 깨달음을 얻는다는 내용이다.

고통 받는 이들에게 주목한다는 것, 이런 사람들과 부처가 어떤 관련이 있다는 것, 그것은 운명 같은 것이었다. 까까머리 고등학생이었지만 나는 당시에 내가 믿던 하느님에 대하여 같은 질문을 던졌다. 당연히 신학을 공부하기 전이었는데, 내가 복음서에서, 첫 번째 권인 마태오 복음에서 만난 하느님은 참 속이 좁고 비열한 존재였다.

베들레헴에서 수많은 아기들이 헤로데가 보낸 병사들의 창검에 찔려 죄 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 사태를 연출한 하느님은 당신의 독생자인 예수에게만 미리 천사를 시켜 연통을 주고 이집트로 달아나게 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그동안 믿어왔던 하느님은 제 자식 귀한 줄 알면서도 남의 자식 귀한 줄은 모르는 분이시던가 하는 의문을 낳을 만했다. 결국 아기 예수 때문에 애꿎은 아기들이 몰살당했다. 예수가 지닌 그 메시아적 의미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어떤 억울한 죽음도 그 분은 허락하지 말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느님은 자비하지도 공정하지도 않았다.

결국 인간의 뜻 모를 고통 앞에서 지존(至尊)이신 부처와 예수는 어떤 답변을 주어야 했다. 김성동의 부처는 중생들과 더불어 아파하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예수는 서른 즈음에 학살당한 아기들처럼 무죄한 모습으로 십자가 위에서 창에 옆구리를 찔린 채 기진하여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내려와 보라는 유혹을 마다하고, 생에 대한 절망 속에서 “아버지! 어찌 저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외쳤던 하소연은 곧 가난하고 무력한, 그래서 이승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해준 것이 곧 내게 해준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당신과 그들이 한 운명임을 여러 차례 당부하셨던 예수였다.

책에서만 보고 선망하던 소설가 김성동, 그분을 뒤늦게 만날 수 있었다. 시골에 내려와 산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날, 예전에 편집을 맡고 있던 잡지 <공동선> 운영위원회를 하던 날이었던가. 김성동과 그 분의 단짝이라던 김사인 시인이 그 자리에 함께 오셨다. 고난이 많았던 소설가와 풀잎처럼 연약한 것들을 사랑하던 시인이 소년과 소녀인 양 앉아 계셨다. 그분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아직 꿈꾸는 나무들이었고, 그 나이 특유의 유들유들한 구석이 엿보이지 않는 오염되지 않은 언어였다. 그분들은 결코 힘을 꿈꾸지 아니하고, 연약함을 오히려 꿈꾸었다. 영향력을 탐하지 아니하고, 감추어진 목숨들에게 목소리를 담아 주었다.

"모진 비바람에 마침내 꽃이 누웠다
내내 신열에 떠 있다가
나도 푸석한 얼굴로 일어나 들창을 미느니
살아야지

일어나거라, 꽃아
새끼들 밥 해멕여 학교 보내야지"

김사인의 「꽃」이라는 시편이다. 신열에 떠 있다가 푸석한 얼굴로 일어나 들창을 여는, 새끼들 밥해서 멕이는 하루를 여는 사람들이 그 ‘꽃’이다. 꽃이란 식물의 생명력이 절정에 달해 있을 때 보이는 모습이다. 뿌리에서 안간힘으로 수액을 끌어올려 여린 잎을 틔우고 부지런한 광합성 노동으로 마침내 드디어 꽃망울이 터진다. 큼지막한 해바라기뿐 아니라 손톱만한 달개비 꽃도 그 식물의 총화(總和)다. 시인의 눈에는 그 꽃이 곧 ‘민중’이다. 그리운 이름이다.

그 그리운 이름들을 다시 부르기 위해 지상에 깃을 내린 분이 예수라면, 악마가 광야에서 제시했던 세 번째 유혹은 당연히 오산(誤算)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악마는 예수를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며,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마태 4, 8~9 참조). 땅에 엎드리는 일이야 예수가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분은 땅에 기대어 사는 백성들을 위해 그 백성 중 한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이다. 흙냄새를 맡으며 예수는 기뻐했을 것이다. “내 아버지가 만드신 이 흙 속에서 그분의 체취가 느껴진다”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러나 땅이란 악마가 약속했던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과는 대립하는 것이었다. 그분은 나라와 영광보다 흙을 더 사랑했다. 악마에게 절을 함으로써 세상의 권세와 영광 앞에 이 거룩한 땅을 팔아넘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분이 가련한 백성을 선택하는 순간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빛을 잃어버린다. 빛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백성을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세상의 임금과 장군과 스타를 선택하지 아니하고 히브리 노예들을 선택하신 주님이시다. 밥에 물을 말아 먹는 아이들을 택하셨고, 맨발의 티벳 승려들을 택하셨고, 지친 가장의 어깨를 택하셨고, 품을 내어놓고 젖을 물리던 우리들의 엄마를 택하셨고, 객지에서 품을 파는 이주노동자들을 택하셨고, 학대받는 아이들과 여성들을 택하셨고, 지금 주검이 되어 가는 해고노동자들을 택하셨다.

그러니,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다만 이분만을 경배하고 섬겨라!” 군주가 아니라 백성의 모습으로 나를 보내신 그분만을 섬겨라. 상처받은 가슴에 따뜻한 온기를 전하는 이분만을 섬겨라. 굶주린 이들에게 빵이 되어 오신 하느님만을 섬겨라. 교만한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부요한 자를 빈손으로 보내신 이분만을 섬겨라. 권세있다는 자들의 감옥에 묶인 자들을 해방하고 빈손인 채로 하소연하는 이들의 손을 잡아 주시는 이분만을 섬겨라. 그렇게 사랑하는 게 참다운 경배다. 네가 절해야 할 분은 이분이시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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