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이름값을 하다 어느 날 홀연히 바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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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이름값을 하다 어느 날 홀연히 바람처럼
  • 박철
  • 승인 2020.06.08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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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칼럼
사진=박철
사진=박철

내 어릴 적 별명은 '미련곰탱이'였다. 아버지는 걸핏하면 나를 그렇게 부르셨다. 한 번은 아버지 심부름으로 목사님 댁엘 갔는데, 도무지 그날 뭔 심부름이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목사님 얼굴만 뵙고 돌아왔다. 나는 목사님 얼굴을 뵙고 돌아온 것으로 아버지 심부름을 훌륭하게 마쳤다고 생각하였다. 착각이었다. 저녁나절 아버지께 불려가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그날 심부름의 내용은, "목사님, 아버지가 개장국 잡수시러 우리 집에 오시래요."라는 말이었다. 이 한마디를 잊어버렸던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행동이 굼뜨고 어리버리했다. 걸음을 걸어도 천천히 걸었다. 도무지 빠른 구석이 없었다. 아버지 눈에는 내가 답답하고 한심한 아들로 보였을까? 우리 모두는 각자 자기 이름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에 부모님께서 우리들에게 붙여주셨던 이름에는 아무런 수식품(修飾品)이 붙어 있지 않았다. 나를 누군가와 구분하여 특정 지어주는 표지일 뿐이었다. 단순한 식별 수단에 지나지 않던 이름이 우리가 성장해 가는 동안에 많은 수식품을 달게 된다.

유난히 잘 울었던 아이가 있었다면, 그 아이의 이름을 듣는 순간에 울보가 떠오른다. 어지간히도 장난이 심했던 아이가 있었다면, 그 아이의 이름을 듣는 순간에 개구쟁이가 떠오른다. 노래를 잘 하는 아이가 있었다면, 그 아이의 이름을 듣는 순간에 유명한 가수의 얼굴이 떠오르게 된다. 어떤 아이는 울기도 잘 하고, 장난도 잘 치고, 노래도 잘 하고, 공부도 잘 한다. 그런 아이의 이름을 듣는 순간에는 만능 탤런트가 떠올려진다. 나이가 들고, 우리의 이름들에 달린 수식품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우리는 어느 사이에 이름에 붙어 있는 수식품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다른 사람이 나를 부를 때 사용하던 내 이름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내가 속한 단체나 직장에서 직위로 불러진다.

우리에게 새롭게 붙여진 이름들은 우리를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기도 하고, 때로는 창피해서 얼굴을 들지 못하게도 한다. 대통령, 장관 등의 이름은 우리를 한없이 영광스럽게 높여 주지만 피의자, 패배자와 같은 이름은 우리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어 준다. 같은 이름이라도 누구와 짝을 지었느냐에 따라 그 평가는 엄청나게 달라진다. 같은 이름인데도 다른 가치가 부여되는 것, 같은 이름에 대하여도 다른 평가가 내려지는 것, 우리는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목사라도 모두 똑 같은 목사는 아니다. "저 사람 목사 맞아?"라는 이야기를 듣는 목사가 있다면 정말 슬픈 이야기이다.

우리 모두는 이름값을 해야 한다. 이름값을 한다는 말은, 붙여진 이름에 걸맞게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고, 행동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 중에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선생다우나 글을 쓸 때는 선생답지 못하다면 그 사람은 선생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사람이다. 생각과 말과 글과 행동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생각이 입으로 표현되는 것이 말이고, 문자로 표현되는 것이 글이며, 동작으로 표현되는 것이 행동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이름값을 꼭 해야 한다. 지도자들이 이름값을 하지 못하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게 된다. 이름에 수반되는 명예와 권한은 책임과 의무가 뒤따른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그 명예와 권한이 크면 클수록 부담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도 그만큼 크다. 이 땅 위에 같이 살아가는 구성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의 이름값을 다하게 될 때에 우리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맑고, 밝고, 건강해질 것이다.

1980년부터 나는 교회에서 전도사라는 이름으로 선생노릇을 시작했다. 선생이 될 만한 인격이나 자격을 갖추어서가 아니라, 신학교를 다니면서 어쩔 수없이 내 힘으로 학비를 조달해야 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아르바이트인 셈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 나이의 3분의 2를 교회울타리에서 지낸 셈이다. 40년 세월이 흘렀는데 그러면 지금은 선생노릇을 훌륭하게 잘 하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 여전히 미숙하기 짝이 없다. 교인들에게 목사인 나를 본받으라고 할 만큼 신심이 깊지도 못하고, 성숙한 인격을 갖추지도 못했다. 나의 내면을 갈고 닦는 일에도 불성실했다. 호수같이 맑고 고요한 심성을 지니지 못하고 언제나 마음상태가 세상 것으로 번잡하다.

조용히 내가 아는 바대로 행해야 하는데, 그렇게 살지는 못하고 사람들에게 큰소리만 친다. 속이 빈듯하면 영락없이 목소리만 높이게 되어 있다. 나의 내면을 갈고 닦는 일에도 불성실했다. 호수같이 맑고 고요한 심성을 지니지 못하고 언제나 마음상태가 세상 것으로 번잡하다.

아버지가 지어주신 내 이름은 ‘박철’이다. 후박나무 ‘朴’에 물맑을 ‘澈’이다. 내 이름에 만족한다. 그리고 20대에 소명을 받고 목사가 되었다. 나는 가끔 목사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본다. 박철이라는 이름과 목사라는 직책 말고 다른 수식품은 필요 없다. 지난 5월 28일 내가 소속한 교단에서 목사라는 직책마저 벗었다. 이제 제도교회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신분, 평신도가 되었다. 한줌의 회환도 후회도 없다. 이제 대 자유를 누리며 살고 싶다. 그러고 보니 내게 남은 것이라곤 내 이름 ‘박철’과 내가 지은 아호 ‘우등’(愚燈)밖에 없다. 아버지가 내게 지어준 이름, 죽을 때까지 이름값을 하다 어느 날 홀연히 바람처럼 떠나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 내가 사는 이유이기도 하다.

 

박철 시인
탈핵부산신민연대 상임대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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