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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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0.05.25 19: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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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글머리

그동안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길 위에 잔정을 흩뿌리고 무주로, 경주로 거처를 옮기며 살다 족히 십년 만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나는 평생 내가 갈망하던 그분이 오기로 한 그 장소를 알지 못했다. 마침내 오고야 말 그 자리를 잊어버렸다. 그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안간힘이 여행이 되고, 또 다시 여비를 벌기 위해 서울에 머물러 있다.

나는 시방 글을 써서 밥을 벌고 있는데, 글발이 나가지 않을 때마다 회귀본능 처럼 참고서처럼 들여다보는 시인들이 있다. 김수영, 이성복, 황지우, 도종환이다. 이 시간에는 황지우를 통해 나를 만나고 있다. 황지우는 <너를 기다리는 동안>에서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고 썼다.

그러나 그 장소를 알 수 없었던 나는 어디서나 ‘너’를 기다렸다. 아마도 내가 그를 찾지 못해도, 내가 그를 연모하듯이 그가 나를 갈망한다면, 그가 기어코 나보다 먼저 나를 찾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마무리하면서 내내 내 가슴에 가득한 것은 ‘하느님, 자비의 바다’라는 구절이었다. 그분의 자비가 나보다 더 크시니, 그분이 나를 먼저 품어 안을 것이라 믿었다. 세상사에 어설픈 내 처지를 헤아리고 그분이 내 앞길을 열어 주리라 기대했다.

"......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한때 ‘너’라고 부르다가, ‘그분’이라고 부르다가, 때로는 ‘그대’라고 부르고 싶었던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나 역시 너에게로 가기 위해서 는 몸을 가볍게 만들어야 했다. 간단한 행장으로, 너무 심각하지 않은 표정으로 ‘앉은 가지 위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 새의 무게’처럼, 내 영혼을 가볍게 여며야 했다. 나는 나를 둘러싼 모든 시선들을 무시하지 않겠지만 애써 집착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나는 나의 고유한 길을 걸어서 그분에게로 갈 테고, 그분 역시 나도 겨우 눈치 챌 정도로 은밀하게 내 방에 찾아오실 것이라 믿는다.

마종기 시인의 시에서 "날아라 사슴, 눈부신 가벼움"이라는 구절을 읽었을 때, 그분에게로 가는 길을 얻었다.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잡아 죽인다는 사나운 세상의 공식을 넘어서" "날아다니는 사슴의 눈물 고 인 길 따라" 가라는 전언을 들었다. 그러나 이 거룩한 길은 진공 속에서 걷는 게 아니고, 일상의 고달픈 구비에서 가능한 기쁨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이 책에 실린 내용은 이 여정에서 《야곱의 우물》과 다른 잡지에 기고했던 글들을 모은 것이다. 자못 부질없는 삶의 부끄러운 기억이라 해도 좋겠다. 다만 매번 허방을 짚으면서도 그분을 만나리라는 희망을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의 고백으로 읽어 주기를 기대한다. 이 책이 나오도록 허락해 주신 이파르 출판사와 내 삶에 동반해 주었던 인연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한다.

2013년 6월 한상봉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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