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이라서, 나는 다르게 살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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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이라서, 나는 다르게 살고 있나?
  • 유대칠
  • 승인 2020.05.25 13: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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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의 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45]

양반으로 태어났기에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었다. 돈을 주고라도 신분을 사고 싶은 것이 양반의 자리였다. 많은 이들이 욕심내던 자리가 양반의 자리였다. 양반 정약종 역시 많은 것을 누리며 살 수 있었다. 그냥 그렇게 살다 죽는다 해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런 정약종이 그 양반의 자리를 떠나 그리스도교 신자의 삶을 결단했다.

그것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었다. 고되고 힘든 길, 죽음을 벗 삼아 살아가는 삶에 대한 긍정이었다. 심지어 그 고난을 행복으로 여기며 말이다. 사실 그는 천하디 천한 백정과 노비와 벗이 될 필요가 없었다. 그들과 더불어 죽을 필요도 없었다. 홀로 양반의 삶을 누리며 살아가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정약종은 그러지 않았다.

한문 모르는 무시 받고 천대받던 이들에게 한글로 신앙을 소개하며 그들의 옆에서 그들과 더불어 살았다. 그것이 행복이라며 말이다.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아가고 싶은 것,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기본 욕구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포기한 이들이 있다. 나에게 정약종은 정약용의 형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나에게 정약종은 더불어 삶을 실천한 이 땅 그리스도교의 소중한 교부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교부 바실리오(329-379)는 부유한 귀족 집안 출신이다. 얼마나 높은 집안 출신인지, 아마도 그리그도교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집안 가운데 하나일 듯싶다. 남 부러울 것 없던 바실리오는 카이사리아 부근 대기근에서 깊은 사회적 고통을 마주하게 된다. 그 고통의 시간 가운데 더 많은 것을 부유한 자들은 더 높게 오른 값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팔며 그 고통마저 기회로 삼았다. 부유한 이에게 가난한 이의 아픔은 남의 아픔에 지나지 않았고, 오히려 기회였다. 바실리오는 비참한 광경에 분노했다 .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그만 장사하시오! 곡식이 부족해 그 값이 오르기를 기다리지 말고, 곡물 창고를 여시오. 가난한 이들의 배고픔을 이용해 재산을 늘리지 마시오.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공공의 것을 두고 자신의 사익만을 챙기지 마시오. 사람의 불행을 사고 파는 그런 장사꾼이 되진 마시오!”

사회적 고난의 시기를 기회로 생각하는 이들은 지금도 여전하다. 가난하고 힘겨운 이들의 아픔을 이용하려는 이들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남을 이기고 남보다 더 많은 소유를 얻기 위해 남을 잔인하게 이용하는 이들은 지금도 그대로다. 어쩌면 더 많아졌다. 그러나 바실리오는 그런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될 수 없다 분노했다. 아픔의 옆에서 그들 아픔의 벗으로 살아가야할 그리스도인이 어찌 그 아픔을 이용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아픔에 무감각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누군가의 것으로 창조하지 않으셨는데, 어찌 자신들만의 것으로 소유하며, 가난한 이들의 아픔을 그리도 잔인하게 조롱할 수 있단 말인가!

2세기말. 지금은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어느 그리스도인은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을 적었다. 그 글에서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들과 다른지를 적었다.

“그들은 육체를 가지고 살지만 육체의 욕구대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 살고 있지만, 하늘의 시민입니다.”

특이한 초자연적 능력이나 남들이 사용하지 않는 말이나 남들과 다른 치장과 소유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남들과 같은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이다. 그러나 육체의 욕심이 그의 삶을 지배하기에 그는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교인이 된다.

보이는 무엇으로 그리스도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그 실천으로 그는 그리스도교인이 된다. 남을 이기고,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남을 넘어서는 권력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으려 하지 않는 사람이기에, 그리고 그런 삶을 실천하고 있기에, 그리스도교인이 되는 것이다.

하늘의 시민이란 바로 그런 실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싸우지 않는 사람, 더 높은 권력을 얻기 위해 싸우지 않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다. 이 잔혹한 자본의 세상에서, 학벌의 세상에서, 권력의 세상에서, 그런 사람은 바보로 보일지 모른다.

정약종은 그 바보의 삶을 살았다. 그저 홀로 더 높아지고 더 많이 가지려 노력하기보다 ‘더불어’ 더 많은 것을 나누는 삶, ‘나’ 한 사람 가진 것은 적지만, 때론 극심하게 고통스러운 길이 될지 모르지만, 우리 모두 더불어 가진 것은 더욱 더 깊고 풍부해지는 삶, 그렇게 더불어 살아가는 뜻의 길을 살았다. 그는 “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 것보다, 하늘을 쳐다보며 죽는 것이 낫다”며 차별이 일상인 조선에선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더불어 사는 그 삶의 이상을 향하여 나아가다 결국 순교의 길을 마주하게 된다. 차별이 일상인 조선은 그를 안아줄 수 없었다.

정약종, 그의 동생 정약용의 형으로 기억될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에게 다가와야 할 것은 그의 더불어 삶의 모습이다. 양반으로 이미 충분히 누릴 수 있는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산 그의 모습이다. 글 모르는 벗을 위해 한글로 하느님을 소개한 그의 더불어 삶의 모습이다.

바실리오, 그의 할머니 ‘마크리나’도, 그의 부친 ‘바실리오’도, 그의 모친 ‘엠멜리아’도, 그의 큰 누이 ‘마크리나’도, 그리고 두 동생 ‘니사의 그레고리오’와 ‘세바스테의 베드로’도 모두가 성인품에 올린 집안의 바실리오. 그러나 그런 대단한 집안보다 더 뜻 깊게 우리에게 다가와야 할 것은 그의 분노다. 부유한 자의 그 잔인한 이기심에 대한 분노다.

정약종도 바실리오도 결국 가진 자들의 그 당연한 이기심을 거부하고 부정한 그리스도교인이다. 육체의 욕구를 따라 홀로 잘 살기를 바라지 않고 더불어 살아감의 길을 실천하며 결단한 이들이다. 홀로 살기보다 우리 가운데 ‘뜻’으로 남을 그런 삶을 결단하며 살아간 이들이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이 올라가는 것만이 성공이고 자기 주체성의 확인이라도 되는 듯이 믿어지는 이 세상에서 다시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 바실리오의 분노에서처럼 가난한 이의 아픔을 그저 남의 것이라며 나 하나의 이득만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약용의 삶과는 너무나 달리 오직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이 올라서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아닌가? 다시 나 자신을 돌아보자. 나는 지금 부끄럽지 않은가? 지금 나는 제대로 그리스도인인가... 다시 돌아보자. 나는 노력중인가? 돌아보자.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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