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가치를 전복시킨 급진적인 자유의 영성,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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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가치를 전복시킨 급진적인 자유의 영성, 예수
  • 빌 그리핀
  • 승인 2016.06.27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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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예수>, 앨버트 놀런, 유정원 옮김, 분도출판사, 2011
,ⓒ한상봉

앨버트 놀런은 남아프리카 출신의 도미니코회 사제로서 백인 일색의 독재정부로부터 조국의 해방을 성취하는 데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1991년, 수십 년 동안 남아프리카의 인권운동을 해 온 운동가들은 29년 만에 감옥에서 넬슨 만델라를 나오게 했다. 1994년의 선거는 카리스마 넘치고 도량이 넓은 흑인대통령(만델라)을 선출했으며 남아프리카가 포괄적인 다인종 사회로 가는 여정을 시작하도록 했다.

앨버트 놀런의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1976)는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 정책을 철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책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유대 농민들과 예수가 맺은 근본적인 연대를 강조하면서 예수의 삶을 이해하는 해방신학을 표현하였다. 더불어 그 후 30년 만에 출간된 <오늘의 예수: 급진적인 자유의 영성>(2006)은 예수의 혁명적 에너지를 묘사하면서, 최근 빚어진 영성의 위기를 진단하면서 대안을 찾고 있다.

그 동안 세계는 더 인간다운 세계를 구현하려는 노력들이 계속 실패하면서 영성에 대한 큰 허기를 느껴왔다. 이런 현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개인주의 영성에 빠지게 하거나, <다빈치코드>같은 책을 유행시키거나, 폭력적인 종교적 광신주의 에 매달리게 만들었다.

진지한 영성을 얻고 싶다면,
이 세계의 불의와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런데 앨버트 놀런은 다시 한 번 “예수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을 주문한다. 예수의 영성적 모범에 따라서, 진심으로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고, 다른 뺨을 내주고,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가난한 이들과 가진 것을 나누며 우리의 희망과 신뢰를 하느님께 두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초대 하고 있다.

놀런은 예수의 육화를 강조하며 우리가 ‘지금 여기’에 초점을 두고 살아야 한다고 요청한다. 또한 “진지한 영성을 얻고 싶다면, 이 세계의 불의와 맞서 싸워야 한다.”면서, 그 이유는 예수가 이천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 역시 “빠져나올 수 없는 관계의 그물망 속에 얽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앨버트 놀런은 이제 가톨릭 신자만을 대상으로 말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으며, 그 모두가 평화를 위해 연대할 필요를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오늘날 온갖 다양성과 분열의 상황 속에 있는 나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쓰지만, 단지 그들 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나는 또한 더 이상 교회에 가지 않고 더 이상 그들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지 않는 사람들도 염두에 둔다.”

왜 그런 불가능한 시도를 하는 것일까? 앨버트 놀런은 말한다, “나는 그렇게 노력하는데, 그것 은 예수의 영성이 오늘날 전대미문의 세계 상황의 드라마에 독특하게 관련이 있다고 깊이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가 먼저 발견한 정치적인 ‘시대의 징표’는 이렇다. “공산진영의 몰락은 우리에게 지구의 생태학적 파괴는 무시하면서 테러리즘을 몰아 내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전쟁에 매달려 있는 것 으로 보이는 초강대국을 우리에게 남겨 놓았다.” 공산주의보다 더 강력한 자본과 새로운 제국주의의 위험성이다.

한편 현대사회에 비참을 가져온 또 다른 위기는 ‘파괴적인 개인주의’라고 말한다. 놀런은 “전염병처럼 퍼지는 개인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이 개인주의는 “수십 억의 사람들이 비참 속에 살고 있고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데도 한계가 없는 부의 축적을 가져온다.”고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서구의 개인주의와 탐욕스러운 상업적 소비주의는 세계를 생태 위기의 벼랑으로 몰아가고 있다. 특히 지구 온난화 등으로 빚어진 생태위기는 재앙으로 치 닫고 있다.

예수는 부와 권력에 대한 제국의 가치를 전복시킨다

그러나 앨버트 놀런은 절망하지 않는다. 인간의 자유가 이러한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는 역동적인 힘을 갖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앨버트 놀런은 예수를 사회개혁자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보다 더 근원적인 어떤 것”으로 제시한다. “당대 모든 다양한 가치관들을 붙잡아 똑 바로 세우는 어떤 존재”라는 것이다.

놀런은 예수의 영성에서 가장 탁월한 점은 로마제국에서 절대적인 가치를 지녔던 ‘재물과 부에 대한 비판’이라고 지적한다. 복음서가 “가난한 사람들은 복되다.”(루카 6,20)라고 말하고 “부유한 사람들은 앙화로다.”(루카 6,24)라는 예수의 말씀을 인 용했을 때, 그것은 가난과 결핍의 상태를 좋은 것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또한 가난한 이들이 언젠가는 부자가 될 것이라고 보장하는 말도 아니다.

앨버트 놀런에게 예수의 이 말씀의 참된 의미는 부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무척 어려울 것이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부자 청년 이야기’처럼, 부자들은 그들의 부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부에 관한 로마 제국의 가치들을 충격적으로 전복시킨 예수의 말씀은 우리 시대의 경제, 생태 위기 문제에 예수의 영성이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앨버트 놀런의 주장에 받침대 역할을 하고 있다.

앨버트 놀런은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부유한 이들이 그들의 생활수준을 낮추고 가난한 사람들과 부를 나누는 것 뿐”이라고 믿는다. 예수가 제시한 또 다른 근본적인 가치관의 전복은 히브리 성서에서 처음 표현된(이사 52,1353,12) “고통받는 종”에 관한 예수의 인용 속에 있다. 복음 전체를 통하여, 예수는 절대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섬기는 행위를 하고 있다. 예수는 매우 자주 굶주린 이 들을 먹이고 아픈 이들을 낫게 한다.

앨버트 놀런은 이렇게 말한다.

“희생자와 승리자의 바꿈이 폭력 문제에 대한 마지막 대답이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어떤 사람이나 다른 사람을 속죄양으로 희생시키는 대신, 예수는 스스로 속죄양 혹은 희생양의 역할을 했다.” 

로마제국의 가치관에 대한 전복을 보여주는 이 모든 예들은 자발적 가난을 지적하고 있다. 앨 버트 놀런은 타인에 대한 섬김과 자기희생을 위해 “개인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놀런은 예수의 기도생활과 관상적인 측면을 소개한다. 우리는 삶에서 침묵과 고독의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우리는 더 성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일과 사업에 빠져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비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고통스런 세계 속에서 우리의 진정한 자아를 찾고, 타인과 우리 자신들의 상호 연결성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야 한다. 그럴 때에만, 인간적인 공감 속에서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 위선으로 치닫는 우리의 충동을 돌리기 위하여 행동할 수 있다. 앨버트 놀런은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조용한 성찰이 요구된다.”고 인정한다. 목표는 “감사하는 마음”을 만들기 시작하는 것이고, 그것으로부터 현실주의에 근거한 연민의 마음이 생기게 된다.

앨버트 놀런은 이렇게 덧붙인다. 

“연민은 중재기도와 행동으로 표현된다. 중재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들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보살핌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하고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의존을 자각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연민이 진정한 것이라면, 그때에 기도는 결코 행동의 대체물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을 가족처럼 신뢰하라

앨버트 놀런은 마지막으로 “예수와 하나됨의 체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아람어인 압바(abba)에 관한 심층분석을 하고 있다. 압바는 예수가 하느님 아버지를 지칭할 때 사용했던 단어이다. 이 아람어는 참으로 사랑스럽고 가까운 존재를 표현하는 아주 친밀한 단어로서, 우리말 “아빠”와 비슷한 말이다.

예수가 히브리 성서에서 끄집어냈고 제자들에게 너무나 생생하게 전달한 하느님에 관한 체험이 예수의 가장 혁명적인 유산 가운데 하나이다. 앨버트 놀런에 따르면, 예수가 마음에 두었던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 사랑에 넘친 부모로서 형제자매들과 함께 있는 가족과 더 닮았다 … (마치도) 억압적 인 제국을 정복하는 것보다 행복한 사랑의 식구들과 더 같았다.”

예수에게서 물려받은 하느님의 친밀함에 대한 이 감각에 뿌리를 두고서, 우리는 우리의 길을 시험적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 예수처럼 다른 이들을 섬기면서 하느님과 하나 됨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앨버트 놀런은 하느님의 뜻을 “공동선”과 같은 것으로 본다. 이 공동선은 “전체 인류 가족에게 가장 최선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예수의 영성을 살려고 하는 시도의 첫 번째 결과들 중의 하나는 자유이다 … 근원적인 자유의 기반은 신뢰이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인식하는 것을 점차 배워가면서 자유롭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기하고 하느님께 우리의 신뢰를 두게 된다. ‘주님 안에 희망을 두는 사람들’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것처럼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이사 40,31)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 없이 마음을 열도록 해주고, 사고에 있어 새롭고도 창의적인 길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해준다.”                                            
 

출처_ <참사람되어>,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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