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길이’만큼 중요한 것은 ‘인연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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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의 길이’만큼 중요한 것은 ‘인연의 거리’
  • 한상봉
  • 승인 2020.04.28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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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38

처서도 지나고 밤낮으로 기온 차이가 크다. 융성하던 초록빛 산색이 어느 구석에선가 서서히 가을을 준비하는지 은밀히 웅성거리는 것 같다. 제법 살갗에 와 닿는 바람이 차가운 기운을 품고 있다고 느끼며 마루에 앉아 있는데, 아이는 싱크대 앞에 제 변기를 끌어다 놓고 올라가 설거지를 하고 있다. 엄마가 하는 일이라면 저도 한사코 하고 싶은 모양이다. 처음엔 귀찮아서 말리다가 이젠 제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그냥 내처 두는 방향으로 전략을 바꿨다.

서로 마음 끓이지 않고 그편이 아이 마음도 채워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종이접기를 해도 엄마가 가르쳐 주는 대로 하지 않고 제 맘대로 종이를 구겨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는, 어쩌다 ‘금지’에 부딪치고 호되게 야단맞으면 그날 밤엔 꼭 이를 갈며 잠들거나, 자다가 일어나 한바탕 울곤 했다. 제 딴엔 억울한 심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아이를 바라보며 아내가 불쑥 “한결이 짝이 될 녀석도 지금 어디선가 부모들 애먹이며 저러고 있겠지?” 하는 것이다. 그런 아이들이 커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짐짓 고상한 자태로 연애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 여자 아이와 그 남자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서로를 알 듯 모를 듯 갈망하면서 스스로 준비하고, 충분히 준비된 만남을 기약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 인연의 거리가 처음엔 아득하지만 살아가면서 점점 좁혀지고, 이윽고 차분하게 또는 갑작스럽게 상대방의 실체를 분명히 ‘알게’ 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확인함으로써 상대방의 운명마저 나누어 갖게 될 것이다. 자신을 찾아오는 길에서 경험해야 했던 상대방의 고난과 상처, 축복과 기쁨의 흔적을 자기 영혼 속에 문신처럼 새겨둘 것이다. 그렇게 성서 말씀이 이뤄질 것이다. “예전엔 둘이었으나 이젠 결합하여 한 몸이 되었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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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사에서 두번째로 출간된 <그대는 타요춤을 아시나요>라는 조희선님의 시집은 사랑 연가(戀歌)로 읽힌다. 거기에 실린 ‘아침연가’는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오늘은
그대가 왔으면 좋겠어요
아침이 까치발로 새벽길을 걸어오듯
바람이 장난스레 나뭇잎을 건들 듯
오늘은 그대가 내게로 왔으면 좋겠어요
그대가 알은 체를 해주면 참 좋겠어요"

성서의 ‘아가(雅歌)’를 떠올리게 하는 이런 시편들은 준비된 인연의 끈을 힘껏 제 앞으로 잡아당기는 매력이 숨어 있다. 때가 이르면 기다림에도 탄력이 붙는다. 그런데 실상 이런 인연은 단지 연인 사이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생애의 한가운데서 누구든 만나야 할 사람은 기필코 만나게 되는 것이 인연이다. 그로 인하여 선업을 쌓든 악업을 쌓든 말이다. 사람의 영혼이 자라기 위해서는 빛과 마찬가지로 어둠이 필요하듯이, 모질고 착함이 모두 은총이기 때문이다.

아내는 편한 자리에 앉으면 어느 잡지에서 읽었다면서, 한 소심한 아저씨의 경험담을 늘어놓으며 즐거워했다. 한 아저씨가 막 골목길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앞에서 이리로 걸어오는 한떼의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가. 좁은 골목길을 메우며 걸어오는 아이들에게 길을 비켜줄 요량으로 아저씨는 담벼락에 바짝 붙어서 안쓰러운 모습으로 눈물겹게 아이들을 비켜서 지나갔다.

한참 걸어가는데 뒤에서 “아저씨!” 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이 골목길에서 자기를 불러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냥 가려는데 또다시 “아저씨!” 하는 것이다. 그럼 나! 아저씨가 겸연쩍게 뒤를 돌아보는 순간, 아이들이 말했다. “아저씨, 똥 밟았어요.”

그 장면을 떠올려보면 참 민망하기 그지없다. 엉망이 된 아저씨의 착한 표정이 삼삼하다. 하필 골목길에서 그 아이들을 만날 게 뭐람. 게다가 담벼락 쪽에 개똥이 소복이 쌓여 있을 게 뭐람. 원망할 사람도 사물도 없이 못된 인연이 엮이는 날이다. 그렇게 인연이란 우연처럼 다가와서 필연 같은 사건을 발생시킨다. 착함과 부주의가 결합하여 만들어 낸 작품이다. 그리고 이런 사건들은 우리에게 낯선 인연을 통하여 무엇인가 가르치려 하는 하늘의 배려인지도 모른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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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광대정에는 열한 가구 정도가 귀농하여 살고 있다. 대개 젊은 부부들이어서 아이들도 많고, 젊고 생생한 목숨들이라 그런지 감정기복도 심하고 관계가 이리저리 복잡하게 얽히고 설키는 경험을 많이 한다. 마을이 만들어진 지 5,6년 되었는데, 지금은 꽤 안정되었고 아이들도 많이 커서 더불어 부모들의 왕래도 잦아졌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아랫마을 사람들이야 조상 때부터 워낙 오랫동안 터잡고 살아온 이웃들이겠지만 귀농자 마을 사람들은 전주·진주·상주·인천·서울 등지에서 제각각 살아오다가 낯선 사람들끼리 모여서 한 마을을 이루었으니, 서로가 서로에게 참 뜻깊은 인연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을 사람들은 (전통에 매이지 않는) ‘해방구’ 같은 이 마을에 살면서 남녀 구분 없이 머리를 길러서 묶기도 하고, 삭발을 하기도 했다.

어느 해에는 마을 분위기가 전부 농사일에 매달리는가 하면, 어느 해에는 많은 이웃이 농사를 줄이고 마음공부를 한다고 들어앉아 있기도 하고, 이 집 저 집 행랑채를 들이기도 하고, 아이들 교육에 매진한다. 그래서 생각한다. 어차피 삶을 나눠야 하는 이웃들의 이런 만남에는 어떤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이런 이웃들을 만나리라고 예상하지 못하면서도 뭔가 준비해 온 시절이 있었음을.

전생에 원수처럼 지냈던 사람들은 이승에서 부모와 자식으로 태어난다는 속설이 있다. 그래서 갚음 없는 사랑을 주고받으며 한을 풀어야 하는 게 인생이란다. 생애의 마디마디에서 우리에게 전생이란, ‘태어나기 전’이라기보다 ‘그를 알기 전까지의 모든 날들’이다. 우리는 그를 알기 시작하면서, 그와의 관계에서는 전생에서 이승으로 넘어오는 시기를 경험한다. 그를 ‘만나는’ 순간에 우리는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을 함께 호흡하는 동시대인이 된다.

길을 가다가도 우리는 숱하게 많은 인연들을 스치고 지나간다. 우린 그저 스치고 지나갈 뿐 인연을 만들지 않는다. 이웃들처럼 붙박여 있는 인연도 있지만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처럼 움직이는 인연도 있다. 거리에서 우연히 만났지만, 우리의 예민한 감수성 때문에 평생을 더불어 늙어가는 인연도 있다. 그러므로 ‘준비된’ 인연을 식별하는 것은 간첩식별 요령처럼 간단할 수 없다. 다만 ‘이상하면 살펴보라’는 말은 적용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내 곁에 붙어살거나 동떨어진 타향에 살거나, 여자거나 남자거나, 늙거나 어리거나, 만나는 족족 사람들을 ‘하늘의 사자(使者)’라고 여기면 어떨까?

그는 내 삶에 경종을 울리러 온 예언자이거나 상처받은 심혼을 위로하러 온 치유자이거나 나의 악행을 먼저 드러내는 타산지석일 수도 있겠다. 동정 없는 세상을 탄핵하러 온 사자이거나, 아직도 남아 있는 희망을 전해주러 온 천사일 수도 있겠다. 결국 수행한다는 생각으로 인생을 마주하면 만사가 득이 되고 만인이 은인이 된다. 조희선님은 <후회>라는 시에서 다 알면서 실수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대 보내고 난 후에야
왜 그리 내가 못되게 굴었는지 후회가 된다
있을 때 잘할 걸
하지만
인연의 길이를 재지 못하는 나는
여전히 그 실수 속에 살고 있다"

나는 ‘인연의 길이’만큼 중요한 것은 ‘인연의 거리’라고 생각한다. 함께한 시간이 길수록 추억도 많고 정도 깊어지고 회한도 늘어날 법한데, 때로는 시간의 길이와 상관없이 잠깐의 만남이 ‘영원한 인연’의 매듭을 단단히 동여매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사람이 맺는 인연은 바람 같아서 잡아둘 수 없다. 그 사람은 떠났지만 나는 임을 보내지 아니하였다는 만해 한용운 스님의 시처럼 그 사람의 영혼이 별빛 같다면, 유성으로 사라진다 해도 가슴속에 영원한 별로 기억하는 게 영물(靈物)인 사람이다. 그러므로 인연의 길이를 알 수 없으므로 ‘있을 때 잘해서’ 후회를 낳지 말고, 인연의 거리를 늘 가깝게 둠으로써 ‘그 사랑으로’ 생애를 생생하게 누리도록 할 일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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