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장 잡부로 일하며... "고통은 구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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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장 잡부로 일하며... "고통은 구체적이다"
  • 한상봉
  • 승인 2020.04.20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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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37

열흘쯤 전에 시골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친구가 초대해서 회남에 다녀왔는데, 그 집 현관 앞에 손바닥 반절 크기의 시멘트 블록들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 그 친구 체구만큼 앙증맞은 블록을 보고, 이게 원래 뭐하는 데 쓰는 거냐고 물었더니 공사장에 버려져 있기에 가져다 놓았다고 한다. 그것도 하나의 전조였던가. 한 주일 뒤에 그 녀석의 쓰임새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다리 신축공사장에서였다.

요즘 아랫마을은 지난해 수해로 망가진 천변에 둑을 쌓고, 무너진 다리를 다시 신축하느라고 온통 공사판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농사일이 한가해지면 일당을 받고 공사장 잡부로 일한다. 농부들이 현금을 만질 수 있는 기회는 가을 수확기가 아니면 힘들고, 한푼이라도 벌어야 한다는 어떤 ‘강박’ 같은 것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아주머니들은 모내기 전에 부지런히 산을 오르내리며 산나물과 고사리를 끊으러 다니고, 남정네들은 공사판을 기웃거린다.

“놀면 뭐혀, 시간이 있을 때 한푼이라도 벌어야지. 자네도 내일부터 여기 나와서 일하는 게 어때?” 놀면서 슬슬 하면 된다면서 아랫마을 동철이 아저씨가 한마디 건넸다. “생각해 볼게요” 하고 화물차를 몰고 장에 가면서, 한번 해볼까 어쩔까 고민했다. 그리고 며칠 뒤부터 공사장에 나갔다. 그리고 회남에서 보았던 작은 블록들은 바닥에서 조금 띄운 상태로 철근을 깔기 위해 철근 밑에 받쳐놓는 밑돌이란 걸 알았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잡부들의 일이란 목수일이며 철근일이며 가릴 것 없이 못을 집어주고 철사도 집어주며 돕고, 공사가 끝나는 구간마다 자재들을 떼어내어 한 곳에 쌓아놓는 일 등이었다. 마실 물을 떠다 주는 잔심부름부터 목재나 철근을 나르는 일, 공사장 주변을 청소하고 비가 오기 전에 목재를 비닐로 덮는 일, 따지고 보면 공사가 잘 진행되도록 윤활유 역할을 한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기술자들이야 작업장이 정리되고 자재가 제때 제자리에 있어야 손을 놀리기 시작하니까 말이다. 다리 위에서 철근을 엮고, 콘크리트 작업을 할 때는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과 하늘에서 쏟아지는 땡볕 때문에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새참을 먹거나 점심식사 시간이 아니라면 목수들의 망치소리가 그치지 않고, 그들의 얼굴은 온통 땀으로 범벅이다.

잡부들 중에는 부모님한테 종합건강진단을 받게 해드리려고 김제에서 온 젊은 친구도 있었고, 퇴직하고 나서 집에 눌러앉아 있기가 영 거북해서 공사장에 나왔다는 50대 후반의 아저씨도 있었다. 농구화와 장화를 번갈아 신어가며 일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보니 이런 곳에서도 일하게 되는군.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십수년 동안 어찌 보면 상관없을 갖가지 일을 경험했다. 한동안 연구소에서 책상물림으로 있다가 의자공장에서 잠시 일을 하고, 가톨릭노동사목에서 이른바 노동운동이란 걸 해보고, 뒤늦게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정의구현사제단에서 실무를 맡고 있다가, 잡지사에 들어가 편집일에 종사하기도 했다. 지난 몇 해 동안에는 산골에서 농사를 배우며 십년 만에 얻은 딸자식을 기르고 있는데, 요즘은 솔직히 돈 될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해답도 없이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아이가 없을 때는 항상 뒷전으로 밀렸던 생활고에 대한 걱정이, 아이 생각만 하면 항상 앞으로 몰려든다. 당장의 살림이야 그럭저럭 꾸려나간다 해도, 아이가 더 크면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맘대로 피해갈 수가 없다. 내가 살고 있는 광대정의 고만고만한 나이의 이웃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것도 교육문제다. 만일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낸다고 할 때, 중학과정이든 고등과정이든 3년 동안에 학비로만 2천만 원 이상이 필요하고, 6년을 마치려면 적어도 4천만 원, 이것저것 따져보면 어렵게 마련한 산골논이며 집까지 팔아야 할 형편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홈스쿨링(Home-schooling)을 생각하기도 하고, 다른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고민 중이다.

자급자족하면서 차분히 농사짓고 명상하고 글을 쓰며 산다는 것은 ‘귀농을 꿈꾸는 이들의 환상’이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비상한 ‘결단’을 요청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녀를 낳지 않거나, 아니면 전혀 새로운 가치관과 교육관으로 생활양식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저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의 삶을 수십 년 동안 닦달해 왔던 습관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다. 공사장에서 일하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으로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내 삶을 더욱 깊숙이 현실 속으로 던지고, 내 몸을 단련시키고 정신을 세밀한 부분까지 점검해 보도록 요청하는 섭리(攝理)가 주려는 게 무엇인지 묻게 된다.

철근작업을 돕다가 엮어놓은 철근 틈에 발이 빠져 무릎에 멍이 들었다. 한 이틀 동안 욱신거리는 무릎을 매만지면서 생각했다. ‘아픔만큼 구체적인 현실은 없다.’ 살면서 오락가락하는 걱정은 밭에서 잡초를 매고 감자알을 헤아리고 있으면 잊어버리고 만다. 그런데 몸으로 느끼는 통증은 증상이 멎을 때까지 자신의 아픔을 줄기차게 호소해 온다. 진짜 현실은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알면서 견디거나 정면돌파 곧 치료하는 방법뿐이다. 때때로 아이가 세상의 무게로 다가온다. 아이가 현실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진다. 아이가 아프면 세상이 아프고, 아이의 미래는 이 세상의 미래다. 아이를 통해 우린 자신을 보고 검증받으며, 현실을 응시한다. 바닥에서 바닥으로, 지상에서 지하로 내려가면서 바라보는 하늘은 얼마나 눈물겨운 것인가?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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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일을 하루 쉬고 우리 식구는 합천 해인사에 다녀왔다. 1년 만에 다시 찾은 해인사는 평일이라 그런지 관광객도 별로 없고 한산해서 좋았다. 마침 티벳 만다라 전시회도 구경하고 구광루라는 절간 서점에서 책도 뒤적거렸다. 강원(講院)에선 젊은 스님들이 독경 연습을 하는지 한편에선 독경소리, 한편에선 잡담소리로 시끌거렸지만 절간에도 사람이 사는 것 같아서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절을 빠져 나오면서 다시 확인한 것인데, 해인사 입구에는 천년 이상을 살다가 수명을 다하고 쓰러졌다는 고목이 한 그루 있다. 아이들 몇 명은 들어가 앉을 만큼 커다란 구멍이 나무 한가운데 뚫려 있는데, 땅 위로 드러난 그 나무의 뿌리 굵기가 장대했다. 나무의 뿌리 끝이 땅속 어디까지 닿아 있을지 아득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나무는 지상에 뻗어 올라간 줄기만큼 뿌리가 아래로 뻗어 내려가는 법이라는데, 한창 때 그 나무는 하늘에 닿을 듯이 자라난 가지 끝에서 잎잎이 하늘에 갈채를 보내는 광경을 기뻐하며 땅속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겠지 생각했다.

가야산을 벗어나면서 우리는 천천히 느릿하게 화물차를 몰았다. 뒤에 오던 차들이 다소 빵빵거리며 앞질러 가더라도 가야산을 떠나는 게 아쉽고, 그 산에서 느낀 감회를 조금이라도 오래 간직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전에 우리 아이를 ‘가야(伽倻)’라고 지으려 했던 기억이 떠올라 설핏 웃음이 나왔다. 그때는 아이가 취학 후에 ‘한가야! 박가야!’ 하며 놀림을 받을까 봐 이름을 바꾸었다. ‘삶이 곧 예술’이라는데 지금 나에게 다가오는 현실 역시 내 삶에서 조금은 각별한 ‘창조’ 행위를 기대하는 분이 제공하는 예술 소재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위안한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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