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지 않은 인생은 실패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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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지 않은 인생은 실패한 걸까
  • 박철
  • 승인 2020.04.20 15: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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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칼럼

우리는 늘 바쁘게 살고 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길에서나 직장에서나 한시도 쉴 새 없이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이미 우리들의 삶의 본연이 되고 있다. 그래서 바쁘지 않은 삶은 잘못된 삶일 뿐만 아니라, 불행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바쁘지 않은 삶이란 할 일이 없는 것, 서둘러 할 만큼 중요한 일이 없는 것, 그리고 도대체 상황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이해해 보면 바쁜 삶의 삶다움은 더욱 두드러진다.

그래서 이제는 바쁜 삶을 느낄 뿐만 아니라 바쁘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규범을 요청하고 있다. “바빠야 한다. 바쁘지 않으면 안 된다. 바쁨, 그것만이 인간의 삶의 가장 삶다운 모습이다.” 이러한 주장이 삶을 설명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 바쁘게 살아가지만 우리는 그 바쁨 속에 끼어드는 또 다른 의식에 대해 부정직할 수 없는 다른 경험도 공유한다. 그것은 때로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현기증처럼 머리가 휘둘리는 것 같은 감각이다. 무언지 정신없이 뛰는 바쁨 속리 문득문득 스쳐가는 방향의 상실 같은 것이다.

좀 더 분석적으로 물고 늘어지면 그것이 어떤 것인지 가늠할 수 있겠지만 바빠서 그럴 여유도 없고 또 그때 뿐 곧 잊어버린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러한 현기증 같은 증세가 가끔 우리의 바쁨 속에서 바쁨 그것 자체에 대한 저항 비슷하게 돌출하곤 한다는 사실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또 하나는 그 바쁨 속에서 바쁨의 본질적인 속성인 능동성이나 적극성과는 다른 갑자기 쉬고 싶다는 느낌이 든다고 하는 사실이다. 때로는 바쁨에 시달려 지친 것일까 하고 스스로 묻기도 하지만 그런 것만은 아니다. 바쁨 속에서 보람을 느끼지 못한 것도 아닌 설명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갑작스레 이 바쁨의 궤도 위에서 벗어나 그 속도감을 떨쳐버리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탈선을 감행할 만큼 그 느낌이 절실한 거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바쁨은 여전히 지고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바쁨이라는 지고한 가치 때문에 어떠한 인간적인 정직성마저도 폐쇄되어야 하는 현실을 살고 있다. 현기증이 나도, 쉬고 싶어도, 그것은 바쁨에 대한 배신이고 바쁨의 궤도에서 탈선하는 일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인간다울 수 없는 일이고 패배인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좀 더 이 사실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바쁨이란 과연 그렇게 인간에게 가해진 불가항력적인 객관적 실재인가를 물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지극히 쉬운 해답을 얻는다. 바쁨은 인간이 선택한 것이지 본연은 아니라고 하는 점이 그것이다.

도대체 삶의 리듬은 자신을 단축하지도 연장하지도 않는다. 시간은 스스로 있을 뿐 서두르지도 게으르지도 않는다. 서두르고 게으르고 하는 것은 그 세월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일 뿐이다. 그렇다면 바쁨은 인간이 그렇게 가치 있는 것으로 규범화했기 때문에 당위적인 것으로 요청된 것이지 본래 그래야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바쁨을 빚는 주인이지 바쁨이 빚어내는 노예는 아닌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결코 바쁨의 노예이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이해된다면 이제는 마음 편하게 그 바쁨 속에서 느껴진 현기증과 쉼에의 욕구를 진지하게 다루어 볼 수가 있다. 그러한 느낌 자체가 바쁨에의 불경이라고 생각하는 노예적인 의식에서 이제는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왜 현기증을 느끼고 쉼에의 갈망이 간헐적으로 용출했든가 하는 것은 바쁨 그것 자체가 내게 의미나 보람으로 경험될 수 없었다는 사실이 기인하는 것이다.

바쁨이 살아있고, 생명 있는 삶의 구조가 되어 내 삶의 규범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다만 그래야 한다는 맹목적인 틀로 나의 삶을 굴레 씌웠기 때문이다. 그것을 바쁨 속에서는 바쁨 때문이 의식의 표층에서 느끼지를 못했지만 무의식 속에서는 그것에 대한 저항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현기증을 느끼는 계기, 갑자기 쉬고 싶은 계기를 바쁨에서 탈출하려는 기회로 삼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쁨이 그저 어떤 구속력을 가진 틀이 아니라 삶의 내용을 닳은 모습이게 하기 위하여 바쁨에다 목표와 의미를 부여하는 계기가 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예 그 바쁨의 흐름 속에서 바쁨 그것 자체를 인식하기 위한 ‘정지’의 순간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정지’가 가능하면 비로소 우리는 바쁨 속에서 휩싸여 그 노예적 의존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관조할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바쁨 자체의 그 진정한 의미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바쁨이 무엇을 위한 바쁨인지 그 목표도 재확인할 수 있게 되고, 그 바쁨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한 인식도 가능해지면서 바쁨 자체의 형태적 타당성도 수정하거나 보완할 수가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바쁨에의 목표 부여가 선명해지고 바쁨의 내용이 풍요하고 충실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과 의미부여가 불가능한 채 바쁨의 모습만을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목표에 대한 분명한 지각이 없이, 그리고 그 목표가 비롯한 상황이나 그 상황과 목표에 상응하는 적절한 내용 없이 그저 맹목적으로 바쁘기만 한 것일 뿐 아무런 보람도, 결과도 없다.

그것은 마치 결승전이 없는 트랙을 한없이 사력을 다해 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뜀의 결과는 자명하다. 지쳐 쓰러지는 처참한 자기상실의 좌절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때로 현기증을 느낄 때, 또 쉬고 싶을 때, 그 계기를 바쁨에의 인식의 기회로 삼으면서 잃어버렸던 결승점을 그때마다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럴 수 있는 ‘정지’의 순간으로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어차피 바쁠 수밖에 없는데 멋있고 신나게 바빠야 하지 않겠는가?

시나브로 계절은 봄을 관통하여 여름을 향하여 성큼성큼 가고 있다.

 

박철 목사
탈핵부산시민연대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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