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이미 답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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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이미 답을 알고 있다
  • 유대칠
  • 승인 2020.04.14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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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의 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44]

철학자 플라톤의 작품은 대화의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느 철학자가 등장해, 이것이 답이니 달달달 암기 하라거나, 요약 정리 하라거나, 쉽게 설명할 테니 이해만 하라거나, 이러지 않는다. 쉼 없이 스스로를 돌아보라 하고, 스스로의 부족함을 고백하라 한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묻고 묻는 가운데 모두가 동의하는 답에 가까워진다. 계시와 주입 없이 소중한 답을 향하여 나아간다.

플라톤에게 대화는 답을 향한 걸음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을 강조한다. 대화 중 허튼소리 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자신의 뜻을 잘 전달하기 위해, 정확한 생각의 흐름과 표현은 매우 쓸모 있다. 철학은 대화의 공간에서 힘을 얻는다. 잘 ‘듣’고 잘 ‘전달’하면서 ‘나’와 ‘너’는 ‘우리’의 답을 더불어 만들어간다. 능동적으로 말이다.

조선 사람 대부분은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전달할 필요가 없었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으로 나누어진 세상에서 ‘아랫사람’은 ‘윗사람’의 입만 바라보았다. 대화는 필요 없었다, 누군가는 “나는 이것을 원한다” 말하고, 누군가 “나는 그것을 하겠다” 말할 뿐이다.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따로 고정되어 있을 뿐이다. ‘듣는 자’가 이런 저런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면, 순간 ‘말 듣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여기에서 ‘말 듣지 않는 사람’은 청각에 어려움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다. ‘시키는 자’의 입장에선 성가신 투정으로 금방 해결날 일을 질질 끄는 사람이다. 헛짓을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다.

‘말 잘 듣는 사람’과 ‘시키는 사람’ 사이엔 ‘대화’가 필요 없다. ‘답을 알려주는 사람’과 ‘답을 받아 적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논리도 필요 없다. 그대로 암기하면 된다. 왜 그렇게 되는지? 왜 그렇게 해야 했는지? 이런 저런 다른 대안은 없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답을 주고 답을 받는다. 힘들게 하나의 질문을 부여잡고 같이 궁리하며 묻고 답하지 않는다.

주어진 답은 나를 생각하게 하지 않는다. 움직이게는 하지만, 이 움직임의 시작은 온전히 나에게 있지 않다. 시키는 자의 말, 그 말이 이 움직임의 이유다. 그래서 허무하다. 움직이는 것은 나인데, 무엇인가 치열하게 다투고 상처 입는 것은 ‘나’인데, ‘나’는 ‘나’의 온전한 주인이 아니다. 말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귀에 들리는 말, 귀에 들리지 않는 말, 온갖 말로 시키는 자는 나에게 수많은 것을 시키고 지금도 시킨다.

이겨라! 얻어라! 양보해라! 내어놓아라! 그렇게 모든 답을 이루어도 씁쓸하다. 큰 승리감이 없다. 그것이면 끝이라 생각했는데, 여전히 행복하지 않다. 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주입 받은 답으로 살아온 이들의 운명이다. 인기 있는 자기개발서의 그 많은 답들도 결국은 또 다른 방식으로 다가온 남의 답일 뿐이다. 남의 답 말이다. 결국 자기 이득 위하여 만들어진 그의 답일 뿐이다. 절대 나의 답이 될 순 없다. 절대 그 답은 뜻을 품고 다가올 수 없다.

평생 주입 받은 답으로 살아온 이들에게 처음부터 ‘자신감’, 즉 ‘나를 나라고 느끼는 그 감정’은 성가신 사치였다. ‘자신감’ 속 나는 ‘말 듣지 않은 아이’가 되기 쉬우니 말이다. 대화 없이, 심지어 대화마저도 성가신 ‘자기 돌아봄’이 되어 버리는 이들에게 ‘자신감’은 남의 이야기다. 그리고 또 ‘자신감 넘치는 남’의 답을 기다린다. 어떻게 살라는 남의 답을 기다린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오랜 시간, 우린 유럽과 미국 그리고 일본의 답에 귀를 기울이며, 살았다. 그들은 답을 내리는 사람이고, 우린 그 답을 소비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답을 조금 더 가까이 듣기 위해 유학을 떠났다.

코로나 바이러스 앞에서 그들의 답은 더 이상 답이 아니었다. 중국을 철저하게 격리하면 그만이라던 이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중국인 입국금지에도 불구하고 이란과 미국의 환자 수는 줄지 않는다. 중국마저도 철저하게 한 지역을 배제하고 통제한다 했지만, 막지 못했다. 그들의 답이 무너진 것이다. ‘방탄소년단’에 환호하는 수많은 독일인의 모습에 놀란 적이 있었다. 철학하는 이에게 독일은 그냥 독일이라는 한 나라의 이름이 아니다. 왠지 답을 주는 나라와 같은 이미지다.

미국 역시 마찬가지다. 방탄소년단의 음악에 열광하며, 그들의 춤을 따라 춘다. ‘말 잘 듣는 아이’가 전부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는 답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고난 가운데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낸 것도 바로 우리 자신의 답이었다. 이제 그냥 가만히 답을 기다리던 존재가 아니다. 우린 더 이상 그저 수동적으로 누군가의 말을 잘 듣는 이가 아니다.

아직도 대화를 모르는 이들은 홀로 외로이 휴대폰 속에서 자신을 향한 답을 기다린다. 이제 휴대폰은 ‘성서’이고 ‘사제’이다. 왠지 내 주변은 답이 아닐 듯 하고, 그 휴대폰 속에서 논리도 근거도 없지만 왠지 있어 보이는 거짓에 빠져든다. 서로가 서로를 조롱하면서 말이다. 특히 서글픈 자기 비하 가운데 말이다.

조금 실수가 있고 부족해도 지금 우린 우리 답을 잘 만들어가고 있다. 오히려 그 작은 흠들이 또 다른 대화를 향한, 또 다른 답을 향한 걸음의 시작일 수 있다. 조롱하지 말자! 그 시간에 고민하고 궁리하고 질문하고 답하자. 논리적으로! 그저 누군가의 답을 기다리며 말 잘 듣는 사람이 아니라, 잘 듣고 잘 묻고 잘 따지면서 더불어 우리의 답을 잘 만들어보자. 지금 우린 우리도 모르는 사이 그러고 있다. 이미 말이다. 이미 우리를 저들이 보고 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그저 말 잘 듣는 사람이 아니다. 지금 우린 잘 하고 있다.

“아빠! 이건 아니잖아!” 내 아들 딸의 날 향한 귀여운 외침이 소중하다. 그래, 아빠의 답이 아닌 너의 답에 진지해져라. 아빠의 답은 그저 참고서일 뿐이니 말이다. 너와 대화할 누군가일 뿐이다. 너의 정답지가 그대로 너의 삶이 될 수 있도록 아빠는 응원하는 사람일 뿐이다. 우리 모두 답을 기다리지 말자. 지금 우린 충분히 우리의 답을 위해 스스로 고민할 수 있다. 이미 충분히.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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