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국회의원 선거와 그리스도인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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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국회의원 선거와 그리스도인의 선택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0.04.14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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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조희선 시인은 ‘할일’이라는 시에서 “그래도/사랑해야지//그러니/더욱 사랑해야지”라고 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정치를 “자선의 최고형태”라고 했습니다. 누군가에게 좋은 일을 하고자 하면, 당장의 필요에 응답하는 자선행위만큼 사회구조 안에 복음을 심는 정치행위에도 참여해야 합니다. 교황은 “끝없는 슬픔은 끝없는 사랑으로 치유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정치판이 고질병에 걸려 있다면 ‘그래도’ 사랑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말라는 전갈입니다. ‘그러니’ 더 사랑하라는 전갈입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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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정치적 관심

교회의 사회교리는 기본적으로 ‘개인선’(Personal-good)을 위해 노력합니다. 모든 개인이 어떤 상황에서든 존엄성을 인정받고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은 사회에서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개인의 행복을 찾으려면 반드시 사회와 공동체가 필요하고, 여기서 발생하는 것이 ‘공동선’(Common-good)입니다. 사실 개인은 혼자서 행복할 수 없으며,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행복해야 내 행복도 보장되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정치참여는 시민적 권리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시민들과 더불어 교회가 정치적 사안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가장 아끼는 사회적 약자들은 하소연 할 데가 없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4)는 복음서 이야기처럼, 교회는 신자들의 삶에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는 ‘정치’에 대해서도 “난 모르는 일인 걸!” 하고 자신과 상관없는 일처럼 딴청을 부리면 안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녀 마르타의 집 소성당 미사 강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통치하니, 우리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누구도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들의 통치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그들이 더 잘 통치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능력껏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교회의 사회교리에 따르면 정치란 가장 높은 형태의 자선입니다. 정치가 공공의 선에 봉사하기 때문입니다. (빌라도처럼) 손을 씻고 뒤로 물러나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우리는 뭔가 기여해야 합니다. 좋은 가톨릭 신자라면 정치에 관여해야 합니다. 스스로 최선을 다해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통치자들이 제대로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2013.9.16.)

사회교리에서는 ‘통치’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정신에 따른다면, 시민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요청되는 정치란 “그들이 더 잘 통치하도록 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더 잘 국민들을 섬기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황이 스스로 ‘종 가운데 종’이라고 하듯이, 민주주의는 모든 주권이 국민에게 있으며, 직업정치인들은 국민들이 세금으로 봉급을 주면서 일을 맡긴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국민들은 자신들이 고용한 일꾼들이 제대로 일하고 있는지 늘 살피고 조율해야 합니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는 좋은 일꾼들을 가려 뽑는 시간입니다. 충실한 일꾼을 재고용하고, 시대의 요구에 뒤떨어지거나 불충실한 일꾼은 다른 일꾼으로 바꿔야 합니다.

시대의 징표를 읽는 정치인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요구는 무엇일까요? 어떤 일꾼을 뽑아야 할지, 다소 주관적일 수 있겠지만 몇 가지 기준을 생각해 봅니다.

1. 최근에 교황청에서도 ‘공동합의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시노드 등을 통해 다중의 의견을 수렴하는 방식으로 정책을 결정합니다. 20대 국회의원들 가운데는 상식적 토론조차 불가능한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무조건 반대와 무조건 찬성은 시대정신을 거스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정치를 ‘타협의 예술’이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정치적 이득을 위해 외통수로 제 의견만 주장하고, 그게 관철되지 않으면 정상적인 논의를 마다하고 국회운영을 마비시키는 사람은 문제가 있습니다. 상식만 통해도 민주주의는 첫걸음을 뗄 수 있습니다.

2. 복음적 견지에서는, 사회적 약자들을 먼저 배려하는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경제적, 지적,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회적 강자의 독주를 통제하고, 발언권이 약한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국회가 되어야 합니다. 거대정당과 소수정당을 가리지 말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 엿보이는 사람을 먼저 국회로 보내야 합니다. 기득권 세력을 의도적으로 옹호하는 정당의 후보는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3. 교황 권고 <사랑하는 아마존>(Querida Amazonia)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람을 돌보는 일과 생태계를 돌보는 일은 분리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특히 핵발전과 생태계 파괴, 이상기후는 코로나19 바이러스만큼 우리의 삶을 당장 위협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무엇보다 생태적 감수성이 있는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4. 이번 선거는 ‘준연동형비례대표제’로 치러집니다. 진영논리에서 벗어나 사회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다당제로 가기 위한 디딤돌입니다. 그동안 양대 정당이 국회를 독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소수정당은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취지를 무색하게 만드는 위성 비례정당의 등장으로 선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정의당, 녹색당, 노동당 등 소수정당에게도 활로를 열어줄 수 있는 선택이 필요합니다.

5. 프란치스코 교황을 우리는 ‘개혁교황’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교황도 자기 권한의 일부를 내려놓고 교황청 개혁을 위해 헌신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사회에서도 개혁적 신념이 분명한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한국사회의 부패한 고리는 국정농단 사건, 사법농단 사건으로 드러나고, 지금은 한국사회의 개혁적 과제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 사회의 공정성 확보를 위한 사법개혁과 검찰개혁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이는 정치권력과 사법권력과 경제권력의 유착고리를 끊어서, 주권을 국민들에게 돌려주기 위한 조치입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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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숙해야 할 정치인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잠깐 역사를 복기해 본다면, 1980년 신군부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정권을 장악하려고 할 때, 교회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또렷하게 천명한 바 있습니다. 그해 한국 천주교 주교단은 5월 6일부터 9일까지 춘계주교회의를 열고 시국담화문을 발표하면서, “오늘의 우리시국은 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중대한 고비에 서 있다”고 했습니다. 꼭 40년이 지난 2020년 역시 한국사회는 민주주의를 위한 중대한 고비에 서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민주화가 완결된 것이 아닙니다. ‘촛불’과 ‘태극기’로 상징되는 어처구니없는 혼란을 넘어서야 합니다.

1980년 당시 주교들은 현 시국의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권을 존중하는 민주헌정 수립에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과거의 정치적 과오에 책임의 일단이 있는 인사들은 민주발전 과정에서 최대한의 겸허와 자숙이 요망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자숙하지 않는” 정치군인들이 광주학살을 통해 쿠데타를 성공시키고 군사독재를 연장시켰습니다. 그들이 학살한 것은 광주시민이며 민주주의였습니다. 2020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에 일말의 책임이라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시금 “과거의 정치적 과오에 책임의 일단이 있는 인사들은 민주발전 과정에서 최대한의 겸허와 자숙이 요망된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 “자숙하지 않는” 정치인들이 다시 출마를 할 것입니다. 이번에는 “말”이 아니라 “투표”로 그들을 자숙시켜야 합니다.

투표는 신앙행위

<푸에블라 문헌>(Puebla, 1979>에서는 “교회가 정치영역에 참여해야 하는 필연성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에서 흘러나온다”(516항)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마음과 영혼, 또는 교회 같은 좁은 영역에서만 ‘주님’으로 고백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정치적, 사회적, 우주적 차원의 주님이십니다. 신앙인들이 로마황제가 아닌 한낱 목수에 불과했던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순간, 이들은 사실상 정치적인 진술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제국의 박해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헌에서는 “(교회의 정치에 대한 관심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경배하는 방법이며, 세상을 비성역화 하는 방법인 동시에 세상을 성역화 하는 방법”(521항)이라 했습니다.

브라질의 해방신학자 보프는 “만일 우리의 설교와 강론이 정의와 형제애, 사회참여에 관해 언급하지 않는다면, 또 폭력을 규탄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설교는 복음을 왜곡하고 예언자들의 메시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변죽만 울리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신앙인이면서 동시에 시민의 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적 가치가 사회 안에 적용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참된 민주주의는 단지 특정한 규범들을 형식적으로 따른 결과가 아니다. 모든 인간의 존엄성, 인권 존중, 정치 생활의 목적이며 통치 기준인 공동선에 대한 투신과 같이 민주주의 발전에 영감을 주는 가치들을 확신 있게 받아들인 열매이다.”(<간추린 사회교리> 407항)

4월 15일 21대 국회의원 선거는 ‘참된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이들에게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민주주의가 공동선을 위한 노력의 정치적 표현이라고 할 때, 투표는 정치행위이면서 동시에 신앙행위가 됩니다. 히브리 노예들과 같은 약자들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신 하느님, 노동자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투표장으로 가신다면, 정치는 어느새 우리에게 거룩한 일이 됩니다.
 

* 이 글은 종이신문 <경향잡지> 2020년 4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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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ziskus 2020-04-17 17:40:39
다른 것은 모르겠으나 보프의 신학은 가톨릭교회에서 (신앙교리성) 주의를 준 신학입니다. 보프도 말년에 교회를 떠났고요. "가톨릭"일꾼이라는 이름으로 쓴다면 이런 식의 물타기는 곤란합니다. 다른 보수 신학자들도 투표,사회적 참여 이야기했고, 구티에레즈처럼 인증된 해방신학도 있는데, 굳이 보프 이야기가 필요한지 모르겠네요. 게다가 이미 교황님 이야기 다 있는데 왜 첨가를 했는지도 의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