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매일 죽음을 눈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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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매일 죽음을 눈앞에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0.03.24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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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사진출처=theguardian.com
사진출처=theguardian.com

가톨릭교회에 사순절이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생애의 어느 때라도 삶을 죽음의 지평선 위에서 바라볼 기회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누구나 죽지만 죽을 때까지 죽음에 눈 맞추기 힘든 게 사람이다. 그래서 코로나19는 악몽이다. 너도 나도 당장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착취한 지구가 몸살을 앓으면서 기후가 급변하고, 그저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삶은 전쟁이 된다. “남을 돌보지 마라”는 원칙이 무의식 안에서 차곡차곡 쌓인다. 죽지 않기 위해서다. 모든 죽음은 무차별적으로 끔찍하다고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내 일상의 모든 죽음을 담백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될 때까지 이 모든 죽음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의 생존’에서 ‘우리의 삶’으로 마음자리가 움직이는 만큼만 죽음을 넘어 생명이 우리에게 온다. 그걸 보자는 게 사순절이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죽음의 일반화

최근에 다급하게 은행 대출을 받아야 할 일이 있었다. 그렇지만 봉급 등 고정수입을 확인할 방법이 없는 자유생활자는 서류심사에서 탈락한다. 그러면 제1금융권에서 제2금융권으로, 다시 저축은행으로 변신한 고리대금업자에게 몸을 맡길 수밖에 없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서민대출도 고정수입이 확인이 되지 않으면 아주 적은 금액을 대출받거나, 그마저 포기해야 한다. 그래도 내 형편은 다소 나은 편이지만, 신용불량자와 노숙자 되기 쉬운 사회가 대한민국이다. 코로나19로 사람들이 불안에 잠식당할 때, 채효정 선생은 <누가 우물에 독을 풀었나>라는 글에서 이미 우리 사회는 죽음이 일반화된 공간이라고 말한다.

“2018년 한 해 동안 노동현장의 사고 사망자 수는 971명, 산재로 죽은 노동자는 2,142명, 자살로 숨진 사람은 1만3,670명이었다.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의 노동현장은 바이러스 감염 지역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그래도 그건 불안하지 않았다. 남의 일이었으니까. 작년 한 해 한국에서 도축된 돼지는 약 1,800만 마리, 닭은 무려 10억 마리에 이른다. 그건 무섭지 않았다. 먹히는 자가 아니라 먹는 자니까.”

하지만 채효정 선생은 이게 남의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자본주의는 세련된 식인풍습이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우리도 그들처럼 살해당할지 모른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왜 장애인과 노약자들이 폐쇄병동에서 일생을 보내야 하는가?” 묻고 있는 채효정 선생은 사실 우리도 언제든지 우아하게 ‘생존을 위한’ 감옥에 갇혀 지낼지 모른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고 기침하는 사람을 보고 몸싸움을 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타인을 배려하지 않을 때, 나 또한 배려 받지 못한다. 타인을 돌보지 않는 것은 나를 돌보지 않는 것이다. 세상의 억울한 죽음에 손을 놓고 있는 것은 나의 죽음을 부추기는 것이다.

지금 여기, 삶은 선물이다

3. 파커 파머(Parker J. Palmer)는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글항아리, 2018)에서 성 베네딕도 규칙서(The Rule of St. Benedict)를 언급했다. 그 계율 가운데 “매일 죽음을 눈앞에 두라”는 주문을 보고 처음엔 실망스러웠다고 고백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숙고하기 위해 활기 넘치고 참여적인 삶을 왜 외면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중에 베네딕도회 수사였던 데이비드 스타인들라스트(David Steindl-Rast)의 말에서 납득할만한 답변을 얻었다.

“돌이킬 수 없는 최종적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한 가지 결정에 도전하도록 한다. 지금 여기에 완벽히 존재하고, 그럼으로써 영원한 삶을 시작하겠다는 결정이다. 올바르게 이해된 영원성은 시간의 영속이 아니라, 사라지지 않는 지금을 통한 시간의 극복이다.”

파커 파머는 “저 높은 천국에서 보상을 받기 위해 죽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죽음을 “매일 눈앞에” 둔다는 것은 자기 삶을 외면한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발생하고 있는 모든 것을 더 깊이 들여다본다는 뜻이다. 내가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지, 그 사람 마음대로 사랑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사랑했던 것은 아닌지, 내가 주고받은 상처에 대해 나는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내가 하고 있는 말과 생각과 행동이 이웃에게, 다른 피조물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나는 지금 누군가 죽이고 있는지 살리고 있는지. 파커 파머는 “삶이란 내가 획득한 것도 아니고, 영원히 누릴 수도 없는 순수한 선물”임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지금은 이 선물을 타인과 나눌 시간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참에 그동안 어떤 경로로든 내게 상처받은 이들에게 용서를 청한다. 이렇게 용서를 청해야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경우에는 말로 상처를 입히고, 어떤 경우에는 행동으로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의도와 상관없이 아픔을 주었을 것이고, 어떤 경우에는 모진 마음을 먹었을 것이다. 허나, 죽음을 “매일 눈앞에” 두고 생각한다면, 선물로 주어진 삶을 낭비하기엔 너무 아깝다. 선물은 ‘착한 물건’이다. 그러니 착하게 살자고 오늘 다짐해 본다.

 

사진출처=weheartit.com
사진출처=weheartit.com

저는 혼자지만 당신은 저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사순절이다. 동정 없는 세상에서 고통 받고, 무자비한 시스템에 희생된 이들을 기억한다. 그들이 억압적인 중력에서 벗어나 은총 안에서 부활하기를 기도한다. 특별히 가장 아름다운 청춘을 폐쇄병동에 갇힌 채 소진하고 코로바19로 이승을 떠난 폐쇄병동 어르신들을 기억하며, 그분들이 새처럼 하늘로 솟구쳐 올라 이제는 자유를 누리는 해방절이 되기를 바란다. 그들처럼 감옥에 갇혀 죽임을 당한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 기도를 나누고 싶다.

“오, 하느님, 이른 새벽 제가 당신을 바라고 웁니다.
저를 도와주시어 기도하게 하시고
오직 당신만을 생각하게 하소서.
혼자서는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제 안에는 어둠이 있지만
당신과 함께, 거기엔 빛이 있습니다.
저는 혼자지만 당신은 저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제 가슴은 연약하지만 당신은 언제나 강하십니다.
저는 쉬지를 못하지만 당신 안에는 평안이 있습니다.
제 안에는 고통이 있지만 당신 안에는 인내가 있습니다.
당신의 길을 저는 알 수 없지만
제가 가야할 길을 당신은 아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당신은 저처럼 가난하셨고 비천하셨고
저처럼 체포당하여 친구들로부터 격리되셨습니다.
당신은 인간의 모든 비통함을 아십니다.
제 안에, 저의 고독 안에 당신이 계십니다.
당신은 저를 잊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저를 찾아내십니다.
제가 당신을 알고 사랑하기를
당신은 간절히 바라십니다.
주님, 당신의 부르는 소리를 듣고, 제가
당신을 따라갑니다.”

 

* 이 글은 종이신문 <가톨릭일꾼> 2020년 봄호에 (통권 제23호)에 실린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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