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종교회’와 숙주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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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교회’와 숙주에 대한 단상
  • 김유철
  • 승인 2020.03.23 18: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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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철의 Heaven's Door

변종바이러스는 생명체가 아니다

생물체의 개념으로 보자면 숙주는 기생하는 생물이 기생의 대상으로 삼는 생명체이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기생 생물에게 영양을 공급하는 생물이다. 한글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만 한자로는 ‘묵어간다’는 의미가 담긴 宿主로 표기하고, 영어로는 ‘주최한다’는 의미가 담긴 host라고 쓴다. 그러기에 숙주는 생물학적 혹은 의학적 용어가 아니라 사회학적인 용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코로나19’라고 명명된 바이러스가 지구촌을 강타하고 있다. 중국 후베이성 우한이라는 지역과 박쥐와 천산갑이라는 포유류 숙주에서 시작되었지만 어느덧 음모론, 종말론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 안팎으로 ‘코로나19’는 종횡무진 휘젓고 있다. ‘코로나19’, 즉 바이러스는 엄밀하게 말하면 생명체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인간의 주요 장기인 폐로 들어와서 아주 짧은 시간에 전파된다는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공포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세상을 만들고 있다.

 

사진출처=thegallivantpost.com
사진출처=thegallivantpost.com

변종교회에는 교주만 있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속죄의 효력에 관한 95개 명제’를 발표했다. 그로부터 시작한 종교 개혁 이후로 당시로서는 유일한 그리스도교였던 가톨릭교회에서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교가 ‘예수’의 이름을 앞세워서 퍼져나갔을까?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겠지만 적어도 한반도 안에 십자가를 앞세운 교회 종단의 숫자는 하느님도 다 모르실 정도임에 틀림없다. 워낙 비틀어진 변종교회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 ‘비틀림’은 나름 개혁이었을까? 아님 변종, 파생 혹은 변형, 변이를 넘어 서로가 서로를 가리켜 이단과 사이비의 ‘범벅그리스도교’가 된 이 땅의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일종의 ‘사기극’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 없는 예수교’를 생명체인양 팔고 있다. 아니 퍼뜨리고 있다. ‘생명 없는 생명체’를 언젠가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인양 돌려가면서 서로의 숙주가 되어주고 있다. 예수 없이 혹은 예수로 착각한 교주의 유일한 교리는 ‘더 넓고, 더 깊게’ 그것뿐이다. ‘코로나19’라는 변종 바이러스가 핵산덩어리 위에 크라운 모양을 만들 듯이 온갖 기복신앙, 천국신앙으로 변형된 ‘범벅그리스도교’는 십자가 위에 왕관 모양을 한 교주만 남아있을 뿐이다.

숙주가 된 기성교단은 무죄인가

복잡다단한 개신교회의 사정은 프로테스탄트인들이 헤쳐 나갈 일이고 우리가 말하는 것은 종교개혁 이전의 가톨릭이 아니라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의 가톨릭. 그것도 너무 먼 이야기라면 20세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가톨릭과 21세기 교종 프란치스코 이후의 가톨릭을 생각한다. 현재의 가톨릭교회는 이른바 ‘변종 그리스도교’의 숙주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마르틴 루터는 ‘95개 명제’에서 당시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비판과 교황권에 대한 것을 중요 논점으로 삼았지만 21세기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중세의 어두운 ‘옛 사랑의 그림자’는 끝임 없이 ‘변종 그리스도교’의 먹이감으로 공급되고 있다.

‘면죄부’라는 용어가 나오면 교회는 늘 세상이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그것은 대사(大赦, indulgence)일 뿐이라고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몇 가지 조건을 이행하면 죄와 벌을 모두 취소 할 수 있는 사면권을 지금도 ‘세상은 잘못 이해하고, 교회만 잘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과연 교회는 ‘잘’ 이해하고 있는가? 여전히 ‘대사’는 고위성직자에게 주어진 전가의 보도와 같은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콩 심은데 콩 난다

놀랍게도 이 칼럼을 쓰고 있는 동안 2020년 주교회의 춘계정기총회는 주요안건 중 하나가 ‘2021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 200주년 기념 희년 선포와 ‘전대사 수여’에 관한 논의‘라고 발표했다. 사실 한때 한국교회를 흔들었던 가계치유, 사적계시, 오남용된 성령운동에 대해서 교회는 그때그때마다 교도권으로서 다스렸지만 세상사 언제나 그러듯이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이 방울방울 떨어져도 흩어지지 않고 조금도 어기거나 옮기는 일 없이 제자리에 떨어질 뿐이다. 콩이 나오는 이유는 콩을 심었기 때문이다.

변종된 바이러스 같은 ‘범벅그리스도교’를 바라보는 마음이 안쓰럽고 불편해서 하는 말이다. 숱한 젊은이들과 종교적 열성을 영성처럼 여기는 이들이 마치 천국에 대한 보험을 들듯이, 만병통치약을 찾았거나, 보화가 가득들어 있는 곳간을 만난 듯이 스스로 찾아 들어가는 모습이 피리소리를 따라 안개 속으로 사라진 전설 같은 이야기를 실시간 라이브로 보는 날들이 지나가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이 또한 지나가겠지’만 우리는 지금 역사의 어디쯤을 지나가고 있는 것일까?

탕자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할 때

16세 소녀 그레타 툰베리가 2019년 9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 기후행동 정상회의에서 쏟아낸 비명 같은 질문들을 기억한다. “어떻게 감히(dare) 그럴 수 있나요?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습니다. 죽어가고 있어요. 생태계 전체가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멸종의 시작점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전부 돈과 끝없는 경제성장의 신화에 대한 것뿐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만약 정말로 지금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거라면 여러분은 악마나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는 믿고 싶지 않습니다. 변화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생명이 없는 핵산덩어리 변종 바이러스가 사람들의 생명을 담보로 큰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인간이 만든 자연을 비롯한 생태계를 어떻게 할 것인지, 종교를 통한 믿음의 표현을 어떻게 하고 그 구성체-교회-를 어떤 모습으로 지속시킬 것인지, 나아가 인간 세상을 언제까지 지속할 것인지 우리는 답을 내놓아야 한다. 우리는 아버지를 떠난 탕자다.

 

김유철 스테파노 시인
한국작가회의
<삶 예술 연구소> 대표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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