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가 습관적으로 세속적 직무에 깊게 관여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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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가 습관적으로 세속적 직무에 깊게 관여한다면
  • 토머스 머튼
  • 승인 2020.03.17 10: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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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머튼의 삶과 거룩함/실질적인 문제들

그리스도인들은 회피하는 영성, 핵시대가 창출한 문제와 책임 속에 사는 우리 인간 사회가 갖는 필연적인 의미에 관심을 갖기를 거부하는 또 다른 종류의 세속 숭배를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포기하는 동기가 무엇이든 그것은 하느님께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이며 그리스도교적 성화에도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무관심과 무감각함을 “침잠”이라고 속여서도 안되며 비겁하게 후퇴하는 것을 희생이나 예배의 행위라고 변명해서도 안될 것이다. 수동성을 더 이상 “신앙”이나 “이탈”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절망적인 운명에 놓인 인간에 대한 관심 부족은 비난받아 마땅한 무감각이며 통탄할 만큼 사랑에 무능력한 것이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보든지 그리스도교적이지 않다. 그것은 순수하게 인간적이지도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특히 교회가 구체적인 사례들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이나 리더십을 발휘하기 전에는 일반적인 성격을 띄게 되며 필연적으로 뚜렷하지 못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점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수없이 많은 전세계 선의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대의 중대한 주제, 예를 들어 세계 평화와 같은 주제들을 위해 의미 있는 역할을 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와 적절한 지침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 시대에는 실질적인 사회 문제들이 산재해 있으며 양심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많은 위험을 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위험부담을 져야 하며, 교황청으로부터 아래로 이어지는 전체 교회가 먼저 움직일 때까지 자신은 행동하지 않겠다는 타성이나 의기소침하고 소극적인 “신중함”은 덕이 될 수 없다.

 

사진출처=monasticway.tumblr.com
사진출처=monasticway.tumblr.com

 

교종 요한 23세께서는 그리스도교적 완전함은 회의주의나 후퇴와는 아무 관계가 없어야 하다고 명백하게 천명하고 계신다. 우리 시대의 세속적인 문제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마음을 산란하게 만들 뿐 아니라 분노케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마주해야 한다. 교종 요한께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자녀들, 특히 평신도들이
세상에 대한 그들의 개인적인 그리스도교적 헌신을
새롭게 하고 증가시키는 대신 약화시킨다면
그것은 오류가 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다양한 삶의 형태들이 갖는 의무들은 온전하게 유지된다. 정치, 경제, 경영과 산업 분야는 신부나 종교인들이 아닌 평신도들의 분야다. 현시대의 사건들을 다루는 예수회 신부의 방식은 가르멜 수녀의 그것보다 더 진전된 것일 것이다. 우리 시대의 문제들에 대한 관심을 의무로 깨달아야 한다는 점을 요구하면서 요한 23세는 우리가 삶의 방식을 모두 포기하고 정치로 뛰어 들라고 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종교인들도 자신들의 삶을 깊이 성찰해야 하며 대다수 인류가 겪는 가난이라는 문제, 사회적 혼란의 위험,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면적인 핵전쟁의 위협과 연관짓는 성찰을 요구하고 계신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어떤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무관심 할 수 없는데 그것들이 단순히 정치적, 경제적 문제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정신적인 병약함의 증세로서 너무나 보편적이고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어 인류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평신도, 사제, 그리고 수도자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모두 다른 방법으로 접근할 것이다. 전통적으로, 자신들을 하느님께 바치고 “세상을 포기한” 사제나 수도자들은 특별한 영성적 과제에 자신들을 헌신하고 있다. 그들은 사무실, 군복무, 회사 생활, 의사, 법조계 등의 직업들을 포기해 왔고 그래야만 했다. 이 포기의 목적은 그들 자신만이 수행 할 수 있는 다급한 영적인 사명을 위해 자신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의 경우 순수하게 세속적인 사건에 깊이 개입하는 것은 자신들의 삶을 완전하게 구현하는데 방해가 된다. 예외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지만.

수도자들과 사제들, 그리고 평신도들을 어려움과 혼란으로 모는 주요 원인은 지난 수세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있어 지위와 임무 사이의 이론적인 경계가 현실에서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중세 초기, 고위 성직자들과 사제들, 수도승과 수도원장들은 최고의 정치적 책무를 맡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권리와 세속적인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적인 행동까지 감행했었다. 사회 내에 교육 받은 이들이 성직자 밖에 없던 시절, 그들이 실질적으로 모든 직종에서 일했던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성직자들은 정부 쪽에서도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았다. 평신도들에게 맡겨졌던 일들을 성직자들이 서서히 맡아가는 과정은 역사 속에서 흔히 발견되었다. 비록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성직자들이 실제로 정부, 경영, 법조계에 종사하지는 않지만 교회 내에서는 여전히 수세기 전의 상황이 유지되고 있다. 교회 내의 물질적인 문제들마저 성직자나 수도자들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당연시되고 있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여러 가지 직무와 역할들에 치여 있으며 대다수는 경영 및 순수하게 세속적인 문제들에 관계하고 있다. 그런 책무들은 생각컨대 최소한 부분적이라도 평신도들에게 맡길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활동수도자들의 감소되는 성소문제를 생각할 때, 자신의 성소 문제에 대해 젊은이들이 갈등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닌데 그것은 그들이 평신도들이 하는 일과 더불어 수도자들의 직무와 규율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고, 그리하여 결국 양쪽 모두의 책임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두 가지 삶의 어려움과 짐을 모두 지되 수도자로서의 삶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얻지 못할 것이라면 그런 헌신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 이성적일지도 모른다.

수도자들이 세속적인 업무를 떠맡게 되면서 자연스레 나타나는 결과는 그들이 세속적인 위안에 대한 “권리”를 얻게 된다는데 있다. 아니면 최소한 이것이 문제가 되는 한가지 통로가 된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만족스러운 것인가? 이런 기분전환을 대체할 그 무언가가 필요한데 그것은 공동체의 공식적인 “수도양성” 뿐 아니라 수도자 개개인이 자신의 일과 효과적으로 결합시켜야 할 영성생활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여가까지 명백하게 침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얘기가 오가든 그리고 사실 그 문제를 찬성하고 반대하는 많은 주장들이 실제로 있지만, 수도자들이 습관적으로 세속적인 직무에 깊게 관여하면 할수록 그들의 수도적인 삶이 고통 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들은 교회 안에서 자신의 진정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그들의 일을 영적인 활동으로 간주하라고 충고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구별해야 한다. 일이 수도회의 규약과 규칙 그리고 교회가 그들에게 미리 설정한 한계에 부합하는 일이라면 당연히 그들을 성화 시킬 것이다. 그것은 성스러운 성격을 지닐 것이다. 그러나 본연의 임무 외에 다른 사람이 해야 하는 수많은 일들을 떠맡을 경우 시간과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소명의 정신과 타협하게 만드는 수많은 세속적인 활동들은 진지한 조정이 요구된다. 이 조정은 개별 수도자들의 선한 의지만으로는 효과를 보지 못한다. 그것은 선의나 개인적인 신성함이라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개혁의 문제인 것이다.

평신도들은 확실히 수도자들이 현재 맡고 있는 여러 가지 활동들, 교육, 기관의 경영, 간호, 언론, 사도직, 전교 등에서 그들을 도울 수 있다. 그들이 책무들을 맡아 함으로써 수도자들은 자신들의 직무에서 결실을 볼 수 있을 만큼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엽적인 문제일 뿐이다. 요점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평신도, 수도자나 사제들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상가들이라도 투표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는 이상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지적으로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세상 상황에 관한 진지하고 객관적인 정보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마주하고 있는 위험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영적인 삶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확실히 대중매체가 제공하는 것보다는 지혜롭고 광범위한 식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사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문제다. 우리 시대의 큰 문제 중 하나는 정치적 사회적 사건에 관해 믿을 만하며 진지한 정보 및 건전한 견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핵전쟁과 잇따른 정치 문제들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것들이다. 이것이야말로 절대적으로 중요한 문제들로 이것에 관련된 가장 중요한 사실들이 은폐되고 있으며 중요한 개발들 역시 대중들에게 명확하게 편견 없이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에게 더 큰 중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잘못된 정보를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TV나 라디오 등 언론의 극단주의자들에게 의해 좌지우지 되는, 그리고 정치적으로 광신적인 집단에 어느 정도 관련된 사람들은 사회와 교회와 자신에게 엄청난 피해를 줄 수 있다. 그리스도를 위해 일한다는 순수한 의도를 갖고 그들은 엄청난 어리석음과 불의에 협조하게 된다.

그러므로 가톨릭 신자들은 이런 경향이 궁극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있을 때까지 특정 목적을 향한 자신의 열의를 조절하고 정열을 순화시킬 필요가 있다. 신중함은 소극적인 것이 아니며 조심하는 것은 비겁한 것이 아니다. 격렬하고 폭력적인 행동을 그 사실 자체로 영웅적이라고 간주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인류의 운명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에 관해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우리 모두 교회의 현명한 지침, 특히 교종의 뜻을 따르도록 하자. 그것은 정치적인 삶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거룩함의 문제 그리고 물론 구원 자체에 관한 기본적인 물음과 직접 연관이 있는 것이다.

이제, 거룩함이라는 주제로 되돌아가자. 그리스도교적 전통에서는 이탈, 희생, 그리고 일반적인 자기 부정이 성화의 근본이라고 여겨져 왔다. 평신도들이 자주 거룩해지기 위해 수도생활에 걸맞는 고행과 편태를 해야만 한다고 오해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며 수도자와 평신도 사이의 경계선의 혼란으로 야기된 하나의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자들과 평신도들의 금욕은 그 지향하는 목적이 같을 경우 똑같은 것으로 여길 수 있다. 그것의 목적은 마음과 의지를 자유롭게 하여 몸과 마음의 에너지가 각자의 본분에 걸맞게 하느님께 바쳐지는데 있는 것이다.

[원문출처] <Life and Holiness>, 토머스 머튼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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