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필리아를 보면서 진중권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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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필리아를 보면서 진중권을 생각한다
  • 한상봉
  • 승인 2020.03.09 18: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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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 세종서적, 2005

최근에 유시민 작가와 진중권 작가가 한바탕 심정 상하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진중권 ‘작가’라고 부른 이유는 <춤추는 죽음>(세종서적, 2005)을 읽다가 진중권이야말로 작가라 불러도 좋을 만큼 상상력과 판타지, 대중적이고 유려한 필력을 갖추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의 글은 거침없이 읽게 하고, 간혹 빛나는 금언을 발견합니다. 책을 읽고 나면 새삼 새록 다시 꺼내 보고 싶은 글귀가 담겨있어야 ‘좋은 글’이라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은 줄어들고, 탁 치면 억하고 나올만한 문장만 뇌리에 오래 남아 성찰적 묵상의 여지를 주기 때문입니다.

텔레비전에서 유시민과 진중권은 ‘조국’을 사이에 두고 갑론을박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서로 입지가 다른 것인지, 서로 견해가 다른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 사람은 자못 합리적으로, 한 사람은 자못 감정적으로 처신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허나, 합리성 안에도 감정이 개입되고, 감정 안에도 합리성을 담겨 있다는 점에서 태도의 차이만 엿보일 뿐입니다. 아무튼 이들이 뭐라고 조국을 논하든 조국은 이미 ‘죽음’을 경험하고 있다는 점에서, 저는 조국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진중권은 <춤추는 죽음>에서 서양미술에 나타난 죽음의 미학을 다룬다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 연거푸 되넘겨 들여다보게 되는 그림이 한 점이 있습니다. 존 에버릿 밀레의 <오필리아>(1852)입니다. ‘죽음의 미학’이라는 말에 적확하게 들어맞는 그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첫 문장부터 탄성이 배어나오게 합니다. 진중권은 세익스피어의 <햄릿> 제5막에 나오는 글을 상단에 올렸습니다.

"남자의 무덤이 아닙니다.
그런 어떤 여자의 무덤이냐?
여자의 무덤도 아닙니다.
그럼 대체 누구란 말이냐?
전에 여자였지만 가엾게도 이젠 죽었답니다."

살아서는 남자이고 여자이겠지만, 죽어서는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통찰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본질만 남고 나머지는 과외로 남는다는 말입니다. 신앙의 언어로 말하자면, 우리가 하느님을 연거푸 반복적으로 대대로 아무리 ‘아버지’라고 불러도 그분이 남자가 아닌 것처럼, 우리가 여자로 살았든 남자로 살았든 그분 앞에선 그저 ‘사람’으로 셈을 하게 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Ophelia By Sir John Everett Millais

사랑이 죽음을 만날 때

<오필리아>를 그린 에버릿 밀레(John Everett Millais, 1829-1896)는 로제티(D. G. Rossetti), 헌트(W. H. Hunt)와 함께 ‘전(前) 라파엘파’에 속하는 화가입니다. 이들은 당시 아카데미의 화법을 거부하고 색채를 단일하게 조명하고, 풍경화, 풍속화, 초상화에 집중하던 화풍을 벗어나 전설, 신화, 성경, 또는 당대의 문학작품을 텍스트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작품은 시에서 탄생한다는 말이 나왔다고 진중권은 소개합니다. <오필리아>는 세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비운의 여인을 그린 작품입니다.

선왕의 유령을 만난 후 햄릿은 복수를 위해 실성한 척 합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오필리아에게도 일부러 “수녀원에나 가라”고 욕설을 퍼붓습니다. 이게 욕설인 이유는 당시엔 수녀원이 창녀촌을 가리킨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필리아의 아버지였던 재상 플로니어스는 왕의 명령으로 햄릿이 진짜 미쳤는지 염탐하다가 햄릿의 칼에 찔려 죽습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버림받고, 아버지마저 그 사람 손에 잃은 오필리아도 가엾게 미치고 맙니다. <오필리아>는 오필리아가 물에 빠져 죽은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이 그림을 진중권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 잔잔한 시냇물 위에 옷을 드리우고 떠 있는 여인이 가엾은 오필리아. 햄릿의 연인이다. 가볍게 벌린 입, 영원한 잠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저 두 눈, 그녀의 오른손, 그리고 펼쳐진 옷자락 위에는 방금 그녀가 꺾은 꽃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물에 빠졌지만 굳이 목숨을 건질 생각이 없는 듯하다. 저렇게 노래를 부르며 물 위를 떠다니다 마침내 견딜 수 없는 고뇌의 무게와 함께 조용히 물속으로 가라앉을 뿐이다.”

그림은 더 상세하게 오필리아와 그 주변에 흩어진 꽃을 묘사하면서 그 장면을 아름답게 채색합니다.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보랏빛 제비꽃 목걸이, 그녀의 귓가에 떠있는 분홍빛 장미, 그녀의 손은 아직도 긴 버들꽃과 노란색 쐐기풀을 쥐고 있습니다. 허리께는 빨강 양귀비꽃이 떠 있고, 그 옆엔 하얀 잎사귀가 달린 조그만 실국화가 떠다닙니다. 물 위에 퍼진 치마폭에는 보랏빛 오랑캐꽃이 있고, 드레스 끝자락에는 자란이 자라고 있습니다. 강둑에는 흰 들장미가 사태지듯 피어 있고, 그 옆에선 조팝나무 관목이 시든 것처럼 고개를 떨굽니다. 여기서 양귀비는 ‘죽음’을, 오랑캐꽃은 ‘헛된 사랑’을, 제비꽃 목걸이는 ‘사랑하는 이에 대한 절개’와 ‘젊은이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진중권은 “오필리아의 죽음은 결국 사랑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과 연결되는 순간 그 죽음은 아름다운 것이 된다고 덧붙이지요. <햄릿>에서 오필리아를 사랑한 오빠 레어티스는 여동생의 시체를 바라보며 “아름답고 순결한 그 육체로부터 오랑캐꽃이 피어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시체라 해도 사랑하는 사람의 것이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종교적 관념에 따르면, 오필리아의 시체는 결코 아름다울 수 없었습니다. 자살과 익사로 인한 것이기에 이중으로 부정(不淨)했기 때문입니다.

 

The Crown of Love, 1875 by John Everett Millais
The Crown of Love, 1875 by John Everett Millais

죽음과 악을 잇는 고리는 끊어져야 한다

오필리아가 어김없이 자살한 것이라면, 정상적으로 장례를 치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명이 있었기에, “특별히 처녀의 화환을 바치고, 꽃도 뿌리고, 조종을 치는 의식”까지 할 수 있었답니다. 하지만 오빠인 레어티스가 보기에 부족함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이상의 예식은 없냐고 묻자, 사제는 “조용히 세상을 하직한 사람의 경우와 같이 진혼가를 불러서 왕생을 축수해 준다면, 도리어 신성한 장례식의 격식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그러나 레어티스는 ‘야박한 사제놈이 지옥에서 울부짖고 있을 때쯤“ 아름답고 순결한 오필리아의 혼백은 천사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합니다. 지옥에 떨어져야 할 것은 오필리아가 아니란 말이지요.

진중권은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과연 저 아름다운 죽음은 과연 죄의 대가란 말인가?” 묻습니다. “저 가련한 여인이 영벌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물론 그럴 수 없다. 그러므로 죽음과 악을 잇는 고리는 끊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자연사나 사고사가 아닌 자살의 경우에, 의지적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행위만을 두고 죄를 물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떤 사람들일까, 하는 것입니다. 오필리아는 사랑하는 사람이 등을 돌리고, 바로 그 사랑하는 사람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모두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누군들 이럴 때 벼랑 끝에 서 있는 느낌을 받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이 그럼에도 삶을 선택했든 굳이 죽음을 선택했든,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그의 통점(痛點)입니다. 그를 죽을 만큼 힘들게 했던 고통이 무엇인지 살피고 공감하고 위로해야 합니다. 단지 자살이라는 ‘행위’에 초점을 맞출 때, 복음은 실종됩니다.

사람들은 희망의 끈이 보이지 않을 때 죽음을 선택합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나무위키>에서 요약한 사건의 개요를 옮겨 보겠습니다.

2014년 2월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단독주택 지하에 세 들어 살던 모녀 일가족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건입니다. 당시 60세인 박 모씨는 35세 큰딸 김 모씨와 32세 작은딸 김 모씨와 함께 살고 있었으며, 인근 놀이공원 식당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잇고 있었다. 큰딸은 당뇨와 고혈압을 앓고 있었으나 비싼 병원비 때문에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작은딸은 만화가 지망생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고 있었으나 빚으로 인해 신용불량자가 된 상태였다. 이렇게 된 원인은 생활비와 병원비를 신용카드로 부담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12년 전 방광암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어머니인 박씨가 사실상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사건 발생 1달 전 넘어져 몸을 다쳐 식당 일을 그만두게 되면서 실의에 빠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하여 생활고로 고민하던 끝에 집세 및 공과금인 70만원이 든 봉투와 유서를 남긴 채 번개탄을 피워 일가족이 동반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유서에는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집 주인에게 쓴 내용이 있었다.

내면적 고통이든 생활적 고통이든, 당사자에게 고통은 언제나 구체적입니다.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현상적으로 자살이 아니지만 사실상 자살인 경우도 있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겪는 고통을 넘어서 만인의 고통을 끌어안기 위해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간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굳이 많은 사례를 들 필요도 없습니다.

 

Imágenes de la buena noticia - Latinoamérica
Imágenes de la buena noticia - Latinoamérica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간 의인들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활동하다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현상적으로 자살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는 예루살렘에 이르기 전에 이미 자신이 그곳에서 살해당할 것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서에서는 세 차례에 걸쳐 “사람의 아들은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전합니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고, 그 나라는 이사야 예언서에 기록된 ‘은총의 해’를 지금여기에서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예수가 자기 사명을 생애의 끝까지 밀어붙인 결과가 ‘십자가 죽음’입니다. 결국 예수는 자기 죽음을 자초한 것입니다. 어찌 보면, 예수는 사람이 어떻게 살면 죽임을 당하는지 보여주신 분입니다. 예수가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했을 때 누구보다 강력히 반발하고 나선 사람이 시몬 베드로입니다. 그때 예수는 오히려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습니다. 예수가 생각하기에, 그 죽음은 피해갈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사실상 자살’을 두고 비난하거나 부정하다거나 저주를 받았다고 말하는 고위 성직자들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예수의 죽음은 오히려 찬양의 대상이 됩니다. 만약 그분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려고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찬양한다면, 그처럼 비열한 짓은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없애시려고 예루살렘이라는 죽음의 아가리 속으로 걸어 들어가신 게 아니라, ‘불의’라는 세상의 죄 때문에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해 분투하시다가 종교-정치권력에게 죽임을 당한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사실상 자살’은 순결한 오필리아의 시신만큼 아름답습니다. 예루살렘의 야박한 성전 사제들이 지옥에서 울부짖고 있을 때쯤 아름답고 의로운 예수의 영은 천사처럼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계실 것입니다.

저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사실상 어떤 죄를 지었는지 잘 모릅니다. 언론에서 말하는 ‘실체적 진실’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재판에서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날지 어떨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검찰과 법원 모두 적폐를 온전히 청산하지 못한 상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짚어두고 싶습니다. 진중권이 조국 전 장관과 그 가족들의 죄를 장담하고 있지만,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까칠하게 말하고 있지만, 그의 인격적 사망선고가 항상 진실을 말해주고 있는 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은 조국 전 장관의 사적 공적 범죄 행위 여부와 상관없이, 그가 검찰개혁을 위해 신명을 바쳤다는 것입니다. 저는 진보/보수, 유죄/무죄, 온갖 시시비비를 떠나 무례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조국 전 장관에게서 한 번도 무례함을 느낀 적이 없습니다.

오필리아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진중권 작가는 “저 가련한 여인이 영벌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물론 그럴 수 없다. 그러므로 죽음과 악을 잇는 고리는 끊어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섬세한 작가의 마음으로 조국을 바라볼 수는 없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다른 것은 다 봐줄만 한데 이건 문제가 있지, 하고 말하는 것과 이게 문제니까 넌 나쁜 놈이야, 라고 말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진중권이 <춤추는 죽음>에서 정말 마음에 꽂힌 구절은 앞에 인용한 첫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죽고 나면 이게 남자의 무덤인지 여자의 무덤인지, 친구의 무덤인지 원수의 무덤인지, 국군의 무덤인지 인민군의 무덤인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생은 그저 가엾고, 한편으론 장엄합니다.

 

*이 글은 격월간 <공동선> 2020년 3-4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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