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 바이러스보다 불안에 대한 방어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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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 바이러스보다 불안에 대한 방어막이다
  • 유대칠
  • 승인 2020.03.09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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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의 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43]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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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불안’ 때문이다. ‘불안’은 작은 객관적 사실도 거대한 악마라는 주관적 사실로 만들어 버린다. 무심코 지나치던 많은 것들을 두렵게 하고 피하게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분명 사람의 생명을 위협한다. 그러나 ‘불안’이라는 주관적 사실은 모든 객관적 사실들을 조작하고 왜곡하여 더 큰 괴물로 만들어버리고 있다.

2020년 3월 4일 <한겨레신문>엔 ‘코로나 바이러스’와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대구동산병원 이지연 감염내과 교수의 인터뷰 기사가 있다. 젊은 환자는 1-2주 안에 호전되며 해열제와 감기약으로도 치료된다는 내용이다. 그 기사의 내용을 모두 요약할 순 없지만, 걸리면 그냥 죽어 버리는 그런 병은 아니란 말이다. 전문가의 말이니 안심이 된다. 그러나 이 기사를 읽고 5분이 지나지 않아 불안을 권하는 문자가 날아왔다. 치료제가 없는 병이다. 걸리면 죽는다. 이런 내용이다.

참 이상하다. 막상 바이러스와 최전선에서 다투는 의사는 불치병이 아니라한다. 그런데 거짓 출처로 자신이 전문가니 정부 기관이니 하는 문자들은 하나 같이 치료할 수 없는 불치병이라며 불안을 만들어낸다. 그러면서 제시하는 대안들이 하나 같이 웃기다. 거의 주술 수준이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이러스와 최전선에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잘 싸우고 있는 전문가의 말을 믿는다. 그리고 응원한다.

2014년 11월 <한국일보>는 독감 사망자 3명 가운데 2명이 65세 이상 노인이라 했다. 그러니 조심하라는 말이다. 2016년 12월 <동아일보>는 2015년 메르스로 사망한 이가 38명이지만 매년 독감으로 인한 사망자의 수는 최대 2,000명이라며 독감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매년 2,000명이라면 하루에 4-5명이 독감으로 죽는다는 말이다. 이 역시 조심하라는 말이다. 2017년 9월 <중앙일보>는 미국에선 독감으로 1년에 3-4만 명이 사망하며, 세계적으로는 대략 30-40만 명이 사망한다 전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는 1년에 4-5천 명이 사망한다 전했다.

독감 사망 기준을 어찌 해야 할지 다양한 견해가 있겠지만, 단순 계산으론 하루에 10여명이 독감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2019년 11월 <조선일보>는 독감을 두고 흔하지만 치명적인 질환이라 했다. 면역기능이 떨어진 65세 이상의 고령자에겐 더욱 위험하다 했다. 2018년 통계청 자료를 근거로 매년 2,800명이 독감으로 사망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90%는 65세 이상 고령자라 했다. 그런데 막상 과거의 이러한 기사들로 인하여 우린 이렇게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지 않았다.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이들 언론이 코로나 바이러스를 대하는 태도도 다르다. 왠지 엄청난 공포를 만들어내는 듯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 분위기 속에서 이제 남의 일이라 생각하던 것이 나에게 찾아왔다. 객관적 사실은 들리지 않고 ‘불안’이란 주관적 사실만이 크게 들린다. 합리성보다는 헛소문의 힘이 더 강하다. 불안 속에서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믿을 것은 ‘마스크’와 ‘닫친 문’ 뒤에 숨어 받는 정체 모를 헛소문의 메시지들이다. 비밀리에 공유해달라는 문구로 마무리 되는 메시지들이다.

김홍빈 분당 서울대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2월 28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대다수의 코로나 바이러스 환자들은 그냥 감기처럼 앓고 지나간다고 했다. 확진환자 80%가 치료 없이 경증으로 끝난다는 ‘전문가’의 분석이다. 대다수는 감염된 뒤, 며칠 후에 증상이 좋아지며, 보통 3일 혹은 5일이란 설명까지 했다. 아무나의 말이 아니다. 이 병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감염내과 교수의 말이다. 그러나 불안을 잠재우지 못했다. 이지연 교수와 김홍빈 교수 같은 전문가의 말에도 불구하고 불안은 불안을 만들고 다시 불안해하며 또 다른 불안을 만들고 있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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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 문제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마스크 사용을 권고하지 않는다. 미국에서도 마스크가 없어 난리라지만, 오늘 나의 미국 벗들은 마스크 없이 거리를 다니고 있다, 제법 많은 이들이 모인 곳의 사진이지만, 마스크 쓴 이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마스크가 없어 난리라는 소식만이 이곳에선 크게 들린다. 그러나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는 마스크 사용을 권하지 않는다.

마스크는 병 가진 이가 착용하는 것이 기본이다. 타인의 대한 일종의 ‘배려’다. 하지만 우리에게 마스크는 ‘방어’다. ‘배려’가 아닌 ‘방어’다. 그러나 사실은 ‘불안’에 대한 최소한의 ‘방어막’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공기 중 미세 입자를 통해 전염되지 않는다. 즉 ‘에어로졸’로 전염되지 않는다. 이 말을 아무리 해도 소용없다. 에어로졸이라면 이런 식의 마스크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니 N95라는 특수 마스크를 사용한다. 하지만 이 마스크를 제대로 착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방법도 잘 모른다. 그냥 얼굴에 걸어 둔 정도다. 사실 지금 이 땅에서 마스크의 가장 큰 역할은 불안에 대한 방어막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침으로 전염된다, 서로 어느 정도 떨어져 있으면 문제없다. 에어로졸로 전염되지 않는 상황에서 누군가의 침방울이 나의 입이나 코로 들어오는 일은 없다. 의사는 환자의 입안을 직접 가까이서 본다. 그러니 의사는 방어 차원에서 마스크를 해야 한다. 그러나 보통의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경우, 과연 누군가와 그렇게 가까이 입과 코를 마주하는 일이 있을까? 나로는 상상하기 어렵다. 어느 정도 떨어져있으면 그만이다. 어쩔 수 없이 1미터 안으로 다가가야 한다면, ‘천 마스크’라도 그만이다. 침방울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객관적 사실이 무슨 소용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불안’이라는 주관적 사실이다. 그러니 이런 객관적 정보는 불안을 해결하지 못한다. 불안에 물은 주관은 이미 불안의 요소를 충족시킨 왜곡된 정보에 더 민감해지기 때문이다.

나는 전문가의 말을 신뢰한다. 어떤 망설임도 없다. 지금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이들을 믿는다. 우린 오랜 시간 전문가의 고민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바이러스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인문사회학 계열의 사람이 교수라는 이름으로 하는 엉뚱한 이야기보다 전문가의 말을 듣겠다. 그러나 우린 그런 비전문가의 말에 흔들리고, 출처도 모르는 괴담에 흔들린다. 때론 그것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인다. 불안의 생산자들이 만든 불안 가득한 세상에서 불안해하며 살아왔다. 나는 그런 이상한 불안의 나라에 살고 싶지 않다. 나는 전문가의 말을 믿는다. 혹시나 틀려도 그들에게 왜 그런지 따져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신학 없는 교회, 합리적 고민 없는 교회에 합리적 신앙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신학자, 전문가의 역할이 무시되고 부재한 곳에 합리적 신앙은 쉽지 않다. 그런 곳에 ‘지옥 간다’는 불안을 만들고, ‘영생’이란 거짓 희망을 제시하면 생각보다 쉽게 많은 이들을 비합리적인 신앙으로 이끌 수 있다. 불안을 키우면 키울수록 영생이란 거짓 희망에 대한 불안도 더 커지고 더욱 더 그 거짓에 종속된다. 불안을 키우는 이상하고 기괴한 헛소문보다 신학자와 감염내과 전문의의 진실한 조언을 신뢰한다. 아니,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나는 진실한 전문가를 신뢰한다.

손을 자주 씻자. 어느 정도 서로 거리를 두고 대화하자. 나 역시 이번 외출엔 손 소독제를 가지고 나섰다. 나 역시 이 병이 무서운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필요 이상으로 불안해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나의 불안을 이용할 누군가에게 괜한 희생양이 되고 싶진 않다. 전문가의 도움으로 객관적 사실에 충실히 집중하며 다가오는 봄을 기쁜 마음으로 마주해야겠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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