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애와 정의: 상처 입은 사람을 도랑에 버려두고 온 사람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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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애와 정의: 상처 입은 사람을 도랑에 버려두고 온 사람은 누구?
  • 토머스 머튼
  • 승인 2020.02.25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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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머튼의 삶과 거룩함/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장(2)- 자애의 사회적 관점

그리스도교적 자애는 너무 자주 피상적으로 이해되곤 하는데 그것은 마치 부드러움, 상냥함, 친절함이 전부인 것처럼 여겨지곤 한다. 당연히 이 모든 것을 포함하고는 있지만, 그것보다는 훨씬 더 넓은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자애를 그저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으로만 국한시키는 것은 우리의 시각이 편협하고, 우리와 같은 혜택과 위안을 받는 직접적인 이웃만을 해당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개념은 우리의 사랑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교묘히 제외시키고 있는 것이다 - 불행한 이, 고통받는 이, 가난한 이, 결핍한 이, 또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아 그들이 그토록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을 더 많이 가진 모든이들에게 요구해야 하는 이들을 말한다.

정의 없이 자애는 있을 수가 없다. 우리는 자주 자애를 도덕적인 사치로 생각해서 그 실천 여부를 우리가 선택할 수 있고, 하느님 눈에 우리를 선한 사람으로 비추게 하는 것인 동시에 “선한 일”을 해야 한다는 내적인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으로 여기곤 한다. 그런 자애는 덜 성숙한 것이며 어떤 경우 완전히 비현실적인 것이다. 진정한 자애는 사랑이며, 사랑은 이웃의 필요에 대한 깊은 관심을 내포한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엄격한 의무인 것이다.

그리스도와 성령의 법에 의해 나는 내 형제들의 곤궁과 무엇보다도 그가 가장 시급히 필요로 하는 것, 사랑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의무가 있다. 계급, 국가와 인종들간의 관계에 있어 사랑의 부족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가! 더욱 불행한 일은 이런 사랑의 결핍 현상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 안에서 너무 분명히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교는 확실히 불의과 미움을 정당화하도록 요구 받아 왔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그리스도 자신은 복음에서 최후의 심판 때에 자애의 행위를 구원의 최종 잣대로 기술하고 계신다. 굶주린 이를 먹여준 사람과 목마른 이들의 목을 적셔준 이, 이방인에게 잠자리를 내어 준 이, 병든 이와 감옥에 갇힌 이들을 방문한 이들은 천국에 들어 갈 것이라고 하셨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베풀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굶주린 이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지 않는 사람, 목마른 이들의 목을 적셔주지 않는 사람, 그리고 그 외의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베풀지 않은 이들이다: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오 25,31-46).

이 말씀과 사도 요한의 첫째 서간에서 보듯이, 그리스도적 자애는 구체적이고 외적인 사랑의 행위가 수반되지 않는 한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자신의 소유물, 시간을 최소한 자기 보다 불행한 이들을 돕기 위해 마음을 쓰지 않는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름 값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희생은 실질적인 것이 되어야 하며 오만하게 온정을 베푸는 척하는 제스처나 보이며, “가난한 이”들에게 선심을 쓰면서 자신의 자아를 부풀리는 거만한 가부장적 태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재화를 나누면서 마음도 함께 나눠서 공동의 불행과 가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애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자애는 마음이 가난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으로, 그렇게 해야만 불행하고 혜택 받지 못하고 가난한 이들과의 동질성을 가질 수 있다. 어떤 경우 우리는 다수의 불행한 이들을 위해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자애에 대한 근시안적이고 잘못된 인식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선을 형식적으로만 하게 만들어 선의를 표시하기 위한 상징적인 행동에 그치게 할 수 있다. 이런 자애는 가난한 이들을 돕는데 실질적인 효과가 없다: 그것은 다만 사회적 불의를 눈감아 주고 상황을 있는 그대로 유지시킬 뿐이다 - 가난한 이들을 그대로 가난하게 만드는데 협조한다는 뜻이다.

현대에 와서 가난과 고통은 모든 이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세계 도처에 퍼져 있으며 심지어 가장 부유한 국가들에도 만연한 불행에 우리는 더 이상 눈을 돌릴 수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은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는 이 불명예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오히려 빠르게 발전하는 세상이 낳은 무능력, 불의와 경제 사회적 혼란 때문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우리는 무기력하며 상황을 개선시킬 건설적인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포기해서는 안된다. 인간의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애와 정의의 이름으로 져야 할 의무인 것이다. 최소한 우리는 상황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것이 제시하는 문제들과 관련해 양심을 다듬어야 한다.

이 세상의 문제를 한 사람이 모두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통과 가난을 줄이는데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는 경우를 깨달아야 하며 자신이 고통과 가난을 지속화하고 부채질하는데 은밀히 협조하고 있을 경우가 어떤 때인지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적 자애는 사회 정의의 문제와 연계되지 않는 한 결코 현실화 될 수 없는 것이다.

수백만명의 그리스도의 잠재적인 구성원들이 겪는 고통, 가난, 병과 때이른 죽음에 관해 아무런 관심이 없다면 신비체와 성스러운 전례에 관한 연구가 무슨 소용인가? 우리는 이 가난과 고통이 우리 나라에서는 거의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프리카, 남미와 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깨닫고 이해한다면 그렇게 마음이 편안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 영역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까지 눈을 돌릴 필요도 없이 대도시의 슬럼가와 사회적 혜택이 미쳐 돌아가지 않은 시골에서 수 없이 많은 인간적인 고뇌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가?

호주머니에서 몇 푼 꺼내어 건네주는 것으론 부족하다. 우리는 가진 것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그들에게 주어야 한다. 자애가 갖는 이 깊은 뜻을 발견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그리스도교적 완전함의 온전한 깊이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사도 야고보는 그의 편지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부자를 존경하고 가난한 이들을 멸시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자신을 가난한 이들과 동일시하고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듯이 스스로 가난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여러분의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 왔다고 합시다. 그 때 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며 ‘여기 윗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거기 서 있든지 밑바닥에 앉든지 하시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불순한 생각으로 사람들을 판단하여 차별대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내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하느님은 이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택하셔서 믿음을 부요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해 주신 그 나라를 차지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겼습니다. 여러분을 압박하는 자들은 바로 부자가 아닙니까? 또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자들도 그들이 아닙니까?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그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자들도 바로 그들이 아닙니까?”(야고보 2,2-7).

같은 편지에서 사도 야고보는 가난한 이들의 돈을 착취하여 부정하게 부를 축적한 이들에 대해 잘라 말하고 있다:

“당신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 많은 옷가지들은 좀먹어 버렸습니다. 당신들의 금과 은은 녹이 슬었고 그 녹은 장차 당신들을 고발할 증거가 되며 불과 같이 당신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당신들은 이와 같은 말세에도 재물을 쌓았습니다. 잘 들으시오. 당신들은 당신들의 밭에서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지 않고 가로챘습니다. 그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또 추수한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의 귀에 들렸습니다. 당신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리며 지냈고 도살당할 날을 눈앞에 두고도 마음은 욕심으로 채웠습니다. 당신들은 죄 없는 사람을 단죄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신들을 대항하지 않았습니다”(야고보 5,2-5).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되기 위해 우리는 서로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한다 함은 이웃을 자신을 대하듯 대하고,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웃에게 베풀어 주는 것을 말한다. 이 소망은 다른 이들을 도우려는 구체적인 행동이 없는 한 아무 의미가 없다. 착한 사마리안의 일화는 강론에서 자주 소개되곤 한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상처 입은 사람을 도랑에 버려두고 온 사람은 유다인, 성직자와 레위인들이었다. 그를 도운 사람은 이방인과 겸손한 부랑아였다. 우리는 어느 쪽인가? 성직자, 레위인 아니면 사마리아인인가?

 

[원문출처] <Life and Holiness>, 토머스 머튼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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