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의 생각 읽기, 상현달 같은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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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의 생각 읽기, 상현달 같은 여자
  • 한상봉
  • 승인 2020.02.18 13: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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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29

몇 달 만에 서울 갈 일이 생겨서 가방을 챙기다가 읽을거리로 집어 든 책이 <기형도 전집>이었다. 1989년 봄소식이 들리는 3월 7일 새벽, 스물아홉 살의 젊은 나이에 어느 심야극장에서 뇌졸중으로 죽었다는 기형도 시인. 그의 시와 산문을 읽는다는 것은 세상이 쉽게 가르친 상식의 세계를 잠시 밀어내고 한여름에도 한겨울처럼 외투를 입고 가슴속 뻥 뚫린 구멍을, 윙윙거리는 찬바람을 응시하라는 전갈 같다. 기형도가 발견한 세상은 언제나 ‘인간의 겨울’이었고, 그나마 소망스러운 것은 겨울에도 ‘눈’이 내린다는 것뿐이다. 1985년 그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을 때도 ‘당선소감’을 보면 삶이란 여전히 쓸쓸한 풍경으로 남아 있다.

"당선연락을 받는 순간 그 어둡고 길었던 습작시절이 한꺼번에 내 의식 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모종의 힘에 떠밀려 나는 복도로 걸어나가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한참 동안 서 있었다. 눈[雪]이 내리고 있었다. 동지(冬至)였고 어두웠다. 도시는 흑백사진처럼 펼쳐져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어지럽게, 그러나 각자 확실한 직선을 그으며 걷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속에는 나도 보였다. 기쁨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모든 사물들이 무겁게 보인다…."

산다는 것은 그렇게 무거운 것인가.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한마디가 ‘나’라는데, 존재(存在)함 자체가 버겁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삶의 중력을 떠받칠 누군가가 없어서일 수도 있고, 시커먼 장마 구름 사이로 얼핏 눈에 띈 파란 하늘을 더불어 본 사람이 없다는 뜻일 수도 있고, 그나마 한 몸을 지탱해 갈 세상살이의 재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탓도 있을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기형도의 시 가운데 ‘우리 동네 목사님’이란 게 있는데, 그걸 읽다보면 어쩔 수 없이 주어지는 쓸쓸함을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이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뒤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장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 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이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이 시를 읽다 보면 목사님 자전거에 실려 있는 게 ‘성경책만한 송판’이 아니라 ‘송판만한 성경책’이란 생각이 든다. 송판처럼 딱딱하고 읽어도 감동이 없고, 씹어도 배부르지 않는 성경책. 인간과 세상의 본질이 삭막한 것은 아니었듯이 성경책의 본질 역시 송장처럼 뻣뻣한 것은 아닐 텐데, 모든 게 비틀어졌다. 어그러진 인간과 세상과 성경책. 생활을 통해 성경의 진리를 드러내자는 이야기가 공염불이 되는 현실 속에서 시인은 절망하고 또한 그 목사님 때문에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재주를 가진 대장장이를 목사님은 부러워한다. 목사님은 세상은커녕 자기 교회 교인들 마음조차 ‘반듯하게’ 펴지 못했다. 대장장이가 일을 그치고 공구를 챙기는 순간까지 자리를 뜨지 못했던 목사님은 쓸쓸하다. 그래도 맑은 별 하나 둘 어둔 하늘에 여전히 새겨지는 한, 목사님은 강퍅한 인심이 난무하는 동네를 향해 자전거 페달을 다시 밟는다.

 

딱딱한 송판을 거룩한 성경으로 성변화(聖變化)시키는 사건은 참으로 예기치 않은 곳에서 일어난다. 남루한 생애마저도 사랑하게 만드는 사건은 ‘무거운’ 존재감을 덜어주고, 사시사철 추위를 타는 사람들에게 온기를 채워준다. 기형도 시인도 그랬던 모양이다. 1982년 8월 28일자 일기를 보면, 나도 그런 사람 한 번쯤 만나보고 싶다. 만나도 시인처럼 반응할 수 있는지 자신이 없지만 말이다.

"지난 81년 겨울 ‘하얀집’(라면집)의 김○○씨가 생각났다. 나에게 파카를 벗어준 머리가 길고 담배를 즐겨 피우던 키 큰 여자. 추호의 더러움도 느낄 수 없는 여자. 추워서 남쪽으로 내려왔다던 여자. 봄이 되면 다시 서울로 올라가겠다던 여자. 그리고 그해 겨울이 막 시작될 때 말없이 라면집을 그만둔 여자. 그래서 내가 그후로 못 만난 여자.
-옷 주셔야죠?
-아, 그렇군요. 너무 따스해서 나는 내 살인 줄 알았어요.
그 여자, 내가 지금 추억으로써도 충분히 사랑할 수 있는 상현달 같은 여자."

아름답다. 뻑뻑한 밥덩이를 입에 넣었다가 숭늉 한 모금 마실 때 느껴지는 부드러운 목젖 같다. 더위가 쟁쟁거리는 여름밤, 한 줄금 상쾌한 바람결로 오시는 하느님의 입술 같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장마도 태풍도 지나가고 이제 땡볕 여름이 시작된다. 넘쳐나는 열매 때문에 줄기가 휘어진 보랏빛 가지를 솎아주었다. 내친김에 홍화도 거두었다. 그 자리에 남은 엄청난 잡풀을 베어냈다. 이발소에 다녀온 것처럼 밭이 다 훤하다. 그 풀을 모아 땅콩밭을 덮어줄 요량이다. 땡볕에 물기도 덜 마르고, 거름기도 생기니 일거양득이다. 잡풀이 우거질수록 베어내고 덮어줄 몫도 많이 생기니 탈이 많은 곳에 은총도 많다는 뜻인가.

두 돌도 안 된 아기가 ‘아리랑 아리랑…’ 노래를 중얼중얼 읊조린다. 집에 가자 하면 ‘가자 가자’ 하며 끝말을 몇 번이고 따라 하는 결이가, 얼마 전 무주구천동 아저씨댁에 가서 텔레비전으로 아리랑 노래부르는 것을 보고는, 혼자서 아리랑 아리랑 옹알거리는 것이다. 그래, 이맘때는 아이 앞에서 말조심 몸조심해야 한다. 뭐든지 따라 하는 아이를 앞에 두고 사는 것처럼 빈정대고 싶은 입술을 돌려 축복을 내뱉고, 분하고 원통해도 가슴 쓸어내리고 착한 말 한마디하고, 욕심 사납게 ‘안 돼!’라고 하려다가 ‘네가 필요하다면…’이라고, 좀 손해보더라도 스스로 자랑스럽게 살 수 있다면 아이처럼 세상도 반듯하게 구김살을 펼 수 있을 것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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