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이 그곳이다, 완전한 배우자도 완전한 공동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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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그곳이다, 완전한 배우자도 완전한 공동체도 없다
  • 로버트 엘스버그
  • 승인 2020.02.18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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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엘스버그의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고요히 머무는 것을 배우기(5)
사진출처=english.bethleem.org
사진출처=english.bethleem.org

서구의 수도전통은 나름대로 고요에 접근하는 방법을 지녀왔다. 그것은 말 그대로 신체를 움직이지 않는 것보다, 뿌리에 닿아있다는 의미를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가난, 정결, 순명의 서원에 더하여 베네딕도 성인은 정주, 결단의 서원을 더 첨가했는데, 원칙적으로 자신의 본래 수도원에 그대로 남는 것을 의미한다. 베네딕도는 이 수도원에서 저 수도원으로 쉬지 않고 돌아다니는 소위 “순회수도승”들을 꾸짖으면서 그들이 절대로 결단을 하지 않으며, “그들 자신의 뜻과 취향에 노예가 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러한 결단이 없다면, 상황이 악화되거나 지루할 때 더 마음에 맞는 초원을 찾아 나서는 유혹에 걸려 넘어진다는 것이다.

결단을 싫어하는 모습은 비단 순회수도승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결혼에 대한 결단을 끝없이 연기하기도 한다. 그들은 배우자를 결정하는 것이 다른 선택들을 미리 막아버리게 될까봐 두려워한다. 만일 오늘 발견하는 이 사람과 결혼한다면, 내일 혹은 내년에 더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어쩔까? 한편 결혼을 결정하면서도 정신적으로는 항상 다른 선택의 문을 열어놓고 결단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가 상황이 어려워지면 도피구를 찾기가 더 쉬워지기 때문이다.

인간본성의 불완전함을 볼 때, 실제에 있어 “완전한 배우자”나 “완전한 공동체”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어떤 곳에, 저 밖의 어느 곳에 우리를 위한 더 나은 선택이 기다리고 있다는 불안에 사로잡히게 되면 우리는 진짜로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삶의 바닥에 닿아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미끄러지듯 도망치며 살게될 때, 우리는 인간존재로서의 충만함을 얻지 못할 것이다. 끝없이 무지개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행복에만 몰두할 때에 우리는 앞에 다가온 행복을 잊기 쉬울 것이다.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항상 미래에 대해 행복을 꿈꾸고 있으므로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순간인 현재에 결코 행복할 수가 없게 된다.

사막의 수도승들은 이렇게 쉴 수 없는 음울함을 나태, 무감각이라고 불렀다. 지금 우리는 그런 모습을 고요하게 있을 수 없는 무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사막의 교부는 이 나태함에 대하여 이렇게 관찰한다, “나태함이 행복하지 않은 마음을 사로잡으면, 자기가 살고 있는 자리를 혐오하게 되고, 방에 머물러 있기가 지루해지며, 함께 사는 형제들을 비난하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우리는 다른 곳에 멀리 떨어져 있는 수도원들을 칭송하고, 그들이 수도생활의 진전에 더 도움이 되고, 영혼의 건강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토마스 머튼은 이 “한낮의 악마”에 사로잡혀 고통을 겪었다고 일기에 분명히 밝히고 있다.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들어가 그곳이 “아메리카의 중심”이며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했던 그가 후에 쓴 일기에서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수도원의 일상적인 운영에 화가 나고, 장상과의 갈등, 고독한 기도의 생활에 대한 자신의 염원을 질식시킬 것 같은 종교적 체제에 대한 두려움 등.

그래서 그는 더 “순수한” 수도회로 가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로마에 청원하여 더 적막한 곳에 암자나 새로운 수도공동체 설립까지 꿈꾼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장상들에 의해 무산된다. 그 후 머튼은 자기가 살고있는 겟세마니 수도원 내의 작은 암자에서 살 수 있는 허락을 받고, 기도와 글쓰기에 더 좋은 조건 속에서 지내게 된다. 마침내 더 포용적인 장상의 허락으로 그는 수도원 바깥으로 여행할 수 있게 되고, 결국 1968년 방콕의 회의에 참석중 감전 사고로 죽는다. 그때쯤 머튼은 자신의 성소와 정주서원에 관하여 평화를 되찾고 있었다. 겟세마니는 결국 그의 집이며, 거룩함을 추구하는 영역이었다. 그는 그곳이 그의 구원을 위한 자리였음을 확신하게 된다.

물론 정주서원은 베네딕도가 간략하게 표현한 것처럼 “태도의 변화”, 즉 성장과 영적인 성숙의 지속적인 과정이 일어날 때에만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자신과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일이나 관계를 일생 끌고간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없다. 수도원의 정주는 수도회원들이 서로와 하느님께 대한 책임을 나누는 것이다. 수도회 회원들이 각자의 깊숙한 마음을 깨닫거나 영혼의 성소와 삶의 상황을 깊게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에, 즉 보다 깊은 것을 추구하려는 결단과 합쳐질 때에 정주는 의미가 있고 영적인 가치를 갖게 된다.

사막의 교부들은 수도생활의 리듬과 절기에 관하여 탁월한 전문가들이었다. 그들은 위안에 대한 경험이 달의 변화만큼이나 다양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결과 수도승들은 그들이 마음의 동요라고 부르는 현상에 대해 연민을 가졌다. 그들이 고안한 처방은 노동이며, 계속적인 기도나 쇄신된 훈련이었다. 에바그리우스 수도승은 특히 예리한 방법을 제시한다: “나태함의 악마와 만나게 될 때,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우리의 영혼을 두 갈래로 갈라놓아야 한다. 한 부분은 격려해야 할 부분이고, 또 다른 부분은 격려 받아야 할 부분이다.”

 

로버트 엘스버그 /1955년 미국 잭슨빌에서 태어났다. 존재의 의미와 참된 삶에 이르는 길을 찾던 그는 하버드 대학교를 다니다 2학년을 마치고 1975년 도로시 데이와 함께 5년 동안 일했다. <가톨릭일꾼> 신문 편집장으로 활동하다 1980년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모교로 돌아가 종교와 문학을 공부한 후 라틴 아메리카에서 변화된 가톨릭교회 모습을 체험했다. 도로시 데이의 작품집을 냈으며 하버드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1학년을 가르쳤다. 1987년 신학박사 과정을 마치고 메리놀 수도회 Orbis 출판사 편집장이 되었다. 지은 책으로 <모든 성인들>과 <모든 여인 가운데 복되도다> 등이 있다. 도로시 데이 시성식 추진위원회와 헨리 나웬 재단 위원이며, 현재 세 자녀와 함께 뉴욕 주 오시닝에 살고 있다.

이 글은 2003년, 미국 메리놀 출판사가 발간한 <The Saints' Guide to Happiness>(Robert Ellsberg)를 <참사람되어> 2005년 3월호에서 편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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