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에 대한 도로시 데이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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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에 대한 도로시 데이의 생각
  • 뤼글
  • 승인 2016.06.27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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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살리 뤼글의 <도로시 데이>-7

“도로시의 비전에 충실하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을 뜻한다.”(크리스 몬테사노)

도로시 데이와 피터 모린이 가톨릭일꾼운동을 시작했을 때, 도로시는 35세였으며, 일꾼에 오는 열여덟 살짜리들에게 어머니처럼 대하기가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자신의 과거와 로마 가톨릭에 개종한지 얼마 안 되는 상황을 의식하면서, 도로시는 특히 여성들이 그들의 성적인 측면을 이용할까봐 우려했다.

그래서 환대의 집에서 스캔들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무척 고심하였고, 때때로 여성들에 대한 혐오를 표현하기도 했다. 아마도 20대에 그린위치 빌리지에서 자유분방하게 지냈던 자신의 과거체험에서 형성된 성향이기도 했을 것이다. 특히 환대의 집에서 젊은 여성들은 순결과 순진함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깊은 책임감을 가졌던 것 같다.

이러한 책임감은 도로시가 죽을 때까지 간직했다. 마지막 8년 동안 함께 살았던 제인 쌔몬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 도로시는 있는 그대로를 놔두는 그런 세대출신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그는 젊은 여성들을 호되게 대했다: “이 집에 오는 남자들에 대해 감상적인 마음을 갖지 마세요. 마치 폭풍 속에서 길 잃은 강아지처럼 당신이 그들을 구하려고 생각하지 말아요.” 후에 나는 “도로시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충고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로시는 삶을 검토 하듯이 살았다. 그래서 경고문을 집안에 써 붙이기도 했다. “여성들은 그곳에 내려가지 마세요. 옷을 제대로 입으세요.” 그는 고집불통은 아니었지만 매우 단호했다. 감상에는 결코 양보할 수 없다는 그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주는 태도였다.

내가 도로시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아마도 많은 창립자들, 혹은 어머니들과 비슷했을 것이다. 젊은이들이 빠질 수 있는 함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죄책감이라는 가톨릭의 가장 호된 측면도 받아들인 셈이다. 그래서 아마도 과거에 있었던 많은 사건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사건들에 대하여 좋든 싫든 자신을 탓했을 것이다.

난 단지 성적인 만남에 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도로시는 죄를 이해했고 악을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은 배로 넘친다”는 말을 도로시는 이해했다. 몸으로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스텐튼 아일랜드에 살았던 포스터 배터햄과 도로시 데이

도로시는 아이의 사랑하는 아버지인 포스터 배터햄을 떠났다. 왜냐하면 포스터가 가톨릭교회의 축성을 받는 결혼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도로시가 함께 일하는 일부 사람들에게 그와 똑같은 희생을 기대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한 동안 도로시는 그렇게 했다. 이혼하고 재혼했던 짐 더글라스는 결혼에 관한 도로시의 신념 때문에 상처받았던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 도로시의 결혼에 대한 태도는 엄격했다. 가톨릭으로서 제대로 소금역할을 하려면, 그가 포스터에 대해 취했던 똑같은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고 도로시는 생각했다. 짐 포레스트와 나는 그런 측면에서 도로시를 실망시켰다. 쉘리와 내가 재혼했을 때, 그것은 본질적으로 도로시를 더 이상 보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나는 도로시의 이런 모습을 무척 존경했다. 그는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가치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비참할 정도로 양보해 버리는 그런 가치들을 지니고 있었다. 도로시가 이런 원칙들에서 끄집어낸 여러가지 적용들에 대해 다 동의하진 않았지만, 나는 그가 고수하고 있는 방향의 본질에 대해서는 확실히 동의했다. 도로시의 그런 부분은 그의 생활방식에 있어 기본이었다. 그는 단지 기분 좋기 위하여 어떤 것에 예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문제가 친구의 재혼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생이 끝나갈 무렵, 도로시는 변했다. 예수회 사제이며 도로시의 좋은 친구였던 다니엘 베리건은 짐 로우니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그는 수년 동안 교회법의 문자 자체에 매우 깊이 빠져 있었다. 대부분의 새 개종자들은 그런 태도를 취한다. 머튼도 얼마동안 그런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의 위대한 품성은 후에 그것에 대해 다시 언급한다는 점이다. 도로시는 처음에 교회법이 금지하는 결혼을 하게 된 모든 사람과 우정관계를 끊었다. 그러나 후에 그는 근본적으로 변했다.

그는 나에게 죽기 수년 전 몇몇 사람들 (나의 형, 필립 베리건까지 포함)에게 사과하는 편지를 보냈으며 그들이 <가톨릭일꾼> 신문에 다시 글을 써도 좋고 다시 친구가 되겠다는 말을 했다고 알려주었다. 그런 태도는 훌륭했고 그 위대함에 존경을 표한다. 그것은 자기가 틀렸거나 자비롭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다. 도로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떤 경우에 연민이 충분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해 지금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

도로시는 시작부터 아이들을 가진 부부들이 가톨릭일꾼에서 살 때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많은 부부들이 환대의 집에서 만나 결혼했다. “마치 결혼시장” 같았다고 로스앤젤로스의 가톨릭일꾼에서 남편을 만난 호주인 안젤라 존스가 말했다. 또 어떤 사람은, “가톨릭일꾼에는 남편들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들어왔다.”고 회상한다.

도로시는 일꾼공동체에서 로맨스가 싹트는 것을 보고 좋아했는데, 비슷한 정신을 가진 부부들의 결혼생활이 더 오래 지속될 가능성이 많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도로시는 결혼과 환대가 서로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젊은 부부들이 결혼해서 공동체를 떠나갈 때 슬픈 이별을 하곤 했다. 도로시의 딸 타말은 “사람들이 결혼하게 되면 도로시는 깊은 우울에 빠졌다. 그러나 그들이 아이들을 갖게 되면 다시 그들과 사랑에 빠지고 일꾼에서 그들이 부부로 맺어졌다고 자랑하며 돌아다녔다.”고 말했다.

결혼하고 가족을 이룬 부부들은 자주 가톨릭일꾼 집을 시작하고 가족이 함께 투신하기도 했다. 그러나 도로시는 사람들이 결혼해서 일꾼공동체를 이끌고 저항운동을 한다는 사실에 대해 진짜로 걱정하는 주장을 되풀이 했다. 그는 독신들이 그런 일을 해야 하고 결혼한 부부들은 서로에게 아이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했다. 척크 퀼티와 그의 아내는 전통적인 결혼을 하고 환대의 집으로 들어갔는데, 60년대의 격동 속에서 그들의 결혼생활은 살아남지 못했다. 척크는 이렇게 말한다:

❧ 물론 도로시의 이런 우려가 확실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가 옳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더 깊은 문제가 있다. 이 문제에 관해 짐 더글라스가 깊은 성찰의 글을 썼다. 그것은 “결혼과 독신생활”이라는 제목이었다. 짐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결혼할 때 그들 대부분은 아이들을 키우고 차 두 대를 갖고 좋은 작은 주택을 원하는 ‘보금자리 결혼’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러다가 어느 한 쪽이 복음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문제가 발생한다.” 나는 모든 결혼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다 그렇게 축소시키고 싶지 않지만, 그 문제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다.

도로시는 모든 사람이 다 가톨릭일꾼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인상을 결코 준 적이 없다. 어떤 사람이 가톨릭일꾼공동체에서 가족을 키운다는 것이 어렵다고 말하자, 도로시는 불가능하다고까지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우리 모두가 가톨릭일꾼 집에서 사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 아니라고 우리에게 허락해 주는 것 같았다.

결혼이라는 계약이외의 모든 성관계는 일꾼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도로시의 친구들과 동료일꾼들은 간음, 간통 등 소위 비 계약의 성관계들에 대해 그의 태도가 보수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로시는 분명히 그런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사랑하고 자주 용서했으며, 특히 말년에 가서는 더 그랬다. 마이클 컬렌은 이렇게 말한다:

❧ 가톨릭일꾼 내의 이혼들은 도로시에게 상처를 주곤 했다. 참으로 그를 슬프게 했다. 그러나 도로시는 이상적인 결혼이 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일꾼 내에서 그를 슬프게 했던 또 다른 것은, 사람들이 결혼이 아닌 불충실한 관계로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도로시는 놀라운 연민과 인내의 선물을 받았다. 그는 복음을 살려고 노력했으며, 불충실한 관계들이 복음에 맞지는 않지만 현실 속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다는 점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항상 자비, 애덕의 편에 섰다.

어떤 사람들은 성에 대한 도로시의 이러한 보수적인 태도가 젊은 시절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사랑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를 이해하신다.”

동성애자들에 대한 도로시의 느낌에 대해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은 그가 동성애를 싫어했다고 한다. 때때로 여자동성애자들을 날카롭게 비판하기도 하고 혐오하는 표현을 했다고 한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 매우 개인적인 느낌으로 그런 태도를 취했으며, 동성애라는 말을 그 앞에서 꺼내는 것조차 원치 않았던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종교의 힘으로 극복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동성애자들에게 사랑을 분명하게 표현했다. 뉴욕의 크리스 몬테사노는 그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 역사적으로 볼 때 가톨릭일꾼은 동성애자들에게 실제로 견고한 지지를 보여 왔다. 가톨릭인일 때, 동성애자들은 다른 공동체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일꾼은 그들에게 문을 열었다. 도로시는 직접적으로 동성애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뉴욕에 있을 때 샌프란치스코의 동성애자들이 맛있는 스프 협동체를 시작하고 팜플렛을 보내왔다. 난 사무실에 들어가서 사납게 그것을 비난했다. 난 화가 났다. 그리고 이렇게 떠들었다, “이 동성애자들은 운동을 이용하고 있어요.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망치고 있어요, 허튼 소리, 재수 없어요.”

그때 도로시는 나를 매우 차갑게 쳐다보고 아주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가가 동성애자들에게 다가가 직분을 수행해야 해요.” 그 말을 듣자 나는 화가 나서 방을 나갔다. 이제 알겠는데, 그 방에 있던 다른 모든 사람들은 동성애자들이었다. 한 사람 건너 동성애자였다. 그리고 도로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내가 그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를 꾸짖었던 것이다.

도로시는 이 문제가 너무나 예민한 주제이므로 공개적으로 토론하길 원치 않았다. 그는 자기의 입장이 전통적인 교회 입장과 같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나는 교회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건 분명히 그의 관점이었다. 도로시는 확실히 많은 동성애자들을 사랑했고 잘 보살펴 주었다. 그때 그가 나를 꾸짖었던 것은 잘한 일이었다. 도로시는 그렇게 해야 했다.

어떤 의미에서 도로시는 그들을 지지하고 비공식적으로 사랑하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이것이 일꾼의 역사이고 중요한 역사이며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기억들이다. 동성애자들에 대하여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충실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도로시의 비전에 충실하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출처: <DOROTHY DAY : Portraits by Those Who Knew Her>, by Rosalie G. Riegle, Orbis, 2003. <참사람되어> 편역, 2007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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