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소리를 묵상함
상태바
광야의 소리를 묵상함
  • 박철
  • 승인 2020.02.04 12: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철 칼럼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내가 개신교 목사라는 직업을 지니고 살아온 지도 벌써 3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다. 누구나 어떤 한 가지 일을 가지고 그처럼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경험을 가진다면 그는 아마 아무도 따를 수 없을 만한 하나의 전문가 혹을 기술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목사란 설교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과 그리고 개인이나 군중이나 그룹을 접촉하면서 문제의 해결을 돕는 일 등이 그 주요 임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일들에 대해서 숙련된 고도의 기술자는 고사하고 점점 더 자신감을 잃을 정도로 어렵게만 느껴지니 그게 과연 어찌된 일일까? 물론 지금도 그런 일을 계속하고 있기는 하지만, 요새 와서는 “이게 정말 얼마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일까?” 하는 허전한 심정이 생겨남을 금하기 어렵다.

처음 설교를 시작하던 햇병아리 목회 시절에는 모든 것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그게 차라리 행복했던 세월이었는지는 모르나, 이제 와서 생각하니 한편으로 과감하였으면서도 한편으로 무모하였다는 느낌이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해, 역사에 대한 이해, 세상에 대한 이해, 인간에 대한 이해, 그 모든 이해가 무척 단순했다. 나 자신이 지니고 있는 신념이나 생각을 이상화 하고 절대화 하여 모든 것을 그 규격에 맞도록 해석하고 처리하였다.

내가 나아가는 길은 질서 정연하다고 자인했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모두 윤곽이 분명하다고 자부했다. 진리의 세계 혹은 신앙의 세계에도 수학 공식과 같은 어떤 공식이 있어, 그 공식에 맞추기만 하면 저절로 일은 성공하는 것이고 세상은 바로잡혀진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오는 동안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러면서 차차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이 단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인간 그 자체도 정체를 파악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그 모습이 다양하게 변모하여 요령을 잡기조차 곤란하다.

금방 세모꼴로 보이던 인간이 잠시 후에 네모꼴로 둔갑을 한다. 금방 이렇다고 말했던 그 입이 조금 지나서는 저렇다고 고함을 치지 않는가? 나는 때로 그러한 둔갑을 일삼는 인간의 실재 앞에서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놀라 보기도 하고 때로는 환멸과 허무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그 자체에 대한 이해에도 때로는 갈피를 잡기 어려운 혼란을 느끼기도 한다.

이쪽에서는 북 치고 꽹과리 두들기면서 이게 진짜 그리스도교라고 호객행위를 하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요술과 마술로 대중의 인기를 독점하다시피 하면서 여기에 본격적인 그리스도교의 진수가 있다고 허세를 부리기도 한다. 나는 개신교 목사로 30년 넘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야기해 온 사람이면서도 그 소란과 그 흥청거림에서 일종의 소외감마저 느끼며 도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마음의 혼란을 느낀다.

그런가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교회의 기능적인 역할을 바탕으로 하는 정치적인 수완을 교묘히 이용하고 발휘하여 교권을 장악하고 이를 농단함으로써 자기 출세와 영화를 얻으려는 무리들도 등장하게 되었다. 성실이다, 사랑이다, 충성이다, 하는 단순한 마음으로 교회 기구를 이해하려던 생각이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드는 무서운 좌절감 혹은 패배 의식이 나를 휘몰아친다. 나는 그런 어두운 면일랑 일부러 바라보지 않는 것이 상책이 아닐까 하는 소극적인 생각으로 나의 눈길을 다른 데로 돌려 보기로 했다. 우리 지성인들의 생각은 어떠하며, 세계적 신학자들, 혹은 사상가들은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궁금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지성인들 중에는 이러한 종교적 난맥상 내지 부조리에 대해서 가혹하게 두드려 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많은 신학자들은 기독교가 앞으로 지금의 현상대로는 존재의 이유가 희박해진다고 경고를 가하고 있다. 본회퍼니, 하비 콕스니, 몰트만이니, 안병무니 하는 현대의 예언자들은 한결같이 어떤 식으로든 교회의 개혁을 강조한다. 그리스도교의 비종교화(非宗敎化)를 주장하기도 한다. 세속화 신학이 나왔다. 인간화 운동이 곧 그리스도교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쨌든 세계의 많은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새로운 역사와 시대에서 요청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의미를 찾아내려고 몸부림치고 있다는 느낌이다. 하비 콕스 같은 이는 그의 저서 <신의 혁명과 인간의 책임>에서 오늘의 크리스천들의 관심의 초점이 교회의 개혁이라는 좁은 테두리에서 세계의 혁명이라는 넓은 곳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어두움과 불행과 억압과 빈곤의 그늘에 앉아 있는 하느님의 백성 곧 모든 인간을 자유케 하시기 위해 죽으셨다고 그는 강조하고 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조용히 나 자신과 그리고 오늘 지역사회의 요소요소에 우뚝 솟아 있는 교회당과 또 그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가지가지 양상에 대해서 생각해 보며 깊은 반성에 들어간다. 레닌이 말했듯이 그리스도교는 인민을 노예화하는 아편인가? 자기의식을 포기하고 굴종과 타협과 안일한 삶에 만족하는 것을 가르치는 그리스도교일 수 있을까?

나는 결단코 그럴 수는 없다고 믿고 싶다. 어떤 틀에 넣고 길을 들여 조용히 순응할 줄만 아는 사람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불의에 저항할 줄도 알고, 부정을 탄핵할 줄도 알며, 스스로 평화와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의 연대성과 사랑과 정의의 최후 승리를 믿고 적극적으로 과감하게 참여하면서 살 줄 아는 사람의 자각을 가지게 하는 일이 목사의 임무가 아니겠는가, 생각해 본다. 

그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실로 그리스도교적 상징으로 말한다면 십자가의 길이다. 나는 가끔 저 옛날에 “광야의 소리”로 자처하였던 세례자 요한의 일이 회상된다. 실상, 오늘의 양심적인 크리스천인 목회자와 양심적인 지성인들이야말로 광야의 소리가 되겠다 각오하는 자라야 할 것 같다. 괴롭고 고독하고 그 소리가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는 듯한 허전함 속에서도 외쳐야 하는 그 심정 말이다.

"사기 치는 목사가 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왜 자꾸 약장사 같은 목소리로
과장을 하게 되는 걸까?
다정다감한 목사가 되어야지 하면서도
왜 무뚝뚝하고 내가 보기에도 험한 인상으로
사람들을 대하게 되는 걸까?
양떼들을 진심으로 아끼며 돌보는
선한 목자가 되어야지 하면서도
왜 건성건성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걸까?
하느님 눈치 보며 살아야지 하면서도
사람 눈치 보다가 사람 꾀임에 빠져
골탕 먹고 마음 상해하는 걸까?
돈에 욕심없는 목사가 되어야지 하면서도
결국은 속물근성의 인두겁에서 벗어나
자유롭지 못한 걸까?
연하디 연한 쑥처럼 고요한 성품을
가져야지 하면서도
왜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성을 내고 요란하게 되는 걸까?
아, 빈듯 하여라
허한 게 속이 빈 듯하여
아, 영락없는 나는 낙제 목사다
얼치기 목사다"

(박철, 낙제 목사)

 

박철
샘터교회 동사목사, 시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