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품격, 성공과 성장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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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품격, 성공과 성장 사이
  • 한상봉
  • 승인 2020.01.13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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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품격], 데이비드 브룩스 지음, 김희정 옮김, 부키, 2015

“더 나아가 수보리야, 이 경전 가운데 네 구절만이라도 설해지는 곳은 세상의 모든 천신, 인간, 그리고 아수라들이 마치 불탑에 공양을 올리듯 그곳에 공양하러 올 것이니라. 이러한 곳도 성지로 대우받는데, 하물며 이 경전을 외우고 수행하는 사람이랴! 수보리야, 그 사람은 얻기 힘든 심오한 경지를 터득한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 이 경전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부처님 혹은 부처님의 위대한 제자들이 머무는 성지이니라.”

틱낫한 스님은 금강경을 해설하면서, 1963년 사이공에서 베트남의 독재정권을 일깨우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틱꾸앙둑(Thich Quang Duc) 선사를 떠올렸다. 시인 부호앙쭈옹은 틱꾸앙둑 선사가 앉아 있던 장소가 성지임을 깨닫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이 앉아 있던 자리는 영원한 성지가 되었고, 당신의 자비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빛을 발합니다.”<틱낫한 스님의 금강경>(장경각, 2013)

 

틱꾸앙둑 선사는 1963년 6월 11일 베트남전쟁을 반대하고 고딘디엠의 독재정권과 불교탄압에 반대하며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전태일처럼 소신공양을 하였다. 이 바람에 전국적인 시위가 불길처럼 일어나고 결국 고딘디엠은 그해에 권좌에서 몰락했다. 이를 두고 틱낫한은 마틴 루서 킹 목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1963년 베트남 스님의 소신공양은 서구의 기독교 사회가 가진 도덕관념과는 아무래도 좀 다릅니다. 언론들은 그때 자살이라고 했지만 그 본질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극단적 저항행위도 아닙니다. 소신공양 전에 남긴 유서에서 스님은 오로지 제자들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고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베트남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을 뿐입니다.”

스님의 시신은 화염에 휩싸였지만 심장은 타지 않고 남아서 지금도 하노이 국립은행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틱낫한은 “누군가 자기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칠 때 생겨나는 자비심은 그가 머문 곳을 성지로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비록 그곳에 불상이나 불탑이 없어도, 그곳은 진정한 성지이며, 참배를 드릴만한 가치가 있는 장소라는 것이다. 인간의 품격이란 ‘그 이상의 것을 꿈꾸고 실행하는데’ 있다. 시류를 거슬러, 나를 넘어서 행동하는데 있다. 어떻게? 데이비드 브룩스가 쓴 <인간의 품격>(부키, 2015)이라는 책에서 조언을 들을 수 있다.

삶이란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투쟁이다

브룩스는 “이력서에 들어갈 나의 덕목과 조문(弔文)에 들어갈 덕목에 어떤 차이가 있을지 생각해 보라”고 제안한다. 이력서 덕목은 일자리를 구하고 외적인 성공을 이루는 데 필요한 기술들을 말하지만, 조문에 들어갈 덕목은 사뭇 다르다.

“장례식장에 찾아온 조문객들이 고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오는 덕목들은, 한 존재의 가장 중심을 이루는 성격이다. 그이가 용감하고, 정직하고, 신의가 두터운 사람이었는지, 어떤 인간관계를 이루고 살아간 사람이었는지 하는 것들이다.”

랍비 조셉 솔로베이치크는 <고독한 신앙인>(Lonely Man of Faith, 1965)에서 아담Ⅰ과 아담Ⅱ라고 이름붙힌 서로 다른 인간의 본성을 전한다. 아담Ⅰ은 이력서에 담길만한 덕목을 중시하는 ‘외적인 아담’이다. 아담Ⅱ는 특정한 도덕적 자질을 구현하고 싶어 하는 ‘내적인 아담’이다.

내적인 아담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내적 인격을 갖추길 원하며, 옳고 그름에 대한 차분하지만 굳건한 분별력을 갖고 싶어 한다. 그는 선한 행동을 하는데 그치지 않고 선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는 친밀한 사랑을 원하고,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길 원하고, 초월적 진리에 순응하며 살길 원하고, 창조적 가능성을 귀하게 여기고, 내적 단단하게 결합된 영혼을 갖기를 열망한다.

아담Ⅰ은 세상을 정복하고 싶어 하지만, 아담Ⅱ는 세상을 섬기라는 소명에 순응하고 싶어 한다. 아담Ⅰ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며 자신의 성취를 만끽하는 반면, 아담Ⅱ는 거룩한 목적을 위해 세속적인 성공이나 사회적 지위를 포기하기도 한다. 아담Ⅰ은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의문을 가지지만, 아담Ⅱ는 그것이 왜 존재하고 우리가 존재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한다. 아담Ⅰ은 길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지만, 아담Ⅱ는 자신의 뿌리로 돌아가기를 원하며, 가족들과 먹는 따뜻한 밥 한 끼에 감사한다. 아담Ⅰ의 좌우명이 ‘성공’이라면, 아담Ⅱ의 좌우명은 ‘박애, 사랑, 구원’이다.

위풍당한 외적 아담과 겸손한 내적 아담이 내 안에서 갈등한다. 우리가 이 두 페르소나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다면 좋겠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담Ⅰ이 이익을 추구하며 효용성을 극대화하려고 애쓸 때 아담Ⅱ는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망부터 정복하라고 타이른다. 성공은 가장 큰 실패이며, 실패는 가장 큰 성공이다. 겸손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를 찾으려면 자기를 잃어야 한다고 말하는 아담Ⅱ를 선택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브룩스는 삶이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투쟁’이라고 말한다. 목소리가 큰 아담Ⅰ과 다르게 아담Ⅱ의 목소리는 사실상 거의 들리지 않는다. 고통을 모두 맛본 사람들한테서만 볼 수 있는 덕을 지닌 아담Ⅱ에게는 도덕적 희열이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다.

“그들은 거친 도전을 받아도 온화하게 응답한다.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침묵한다. 모욕을 받아도 위엄을 잃지 않는다.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때도 일용품을 사러 장에 가듯 눈에 띄지 않는 겸손한 태도로 그 일을 해낸다. 자신이 하는 행동이 얼마나 인상적인 것인지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에 대하여 아예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결함투성이인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기쁨을 찾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해야 할 일을 인식하고 그냥 그 일을 실행에 옮긴다.”

그렇다고 아담Ⅱ에 속한 사람들이 평온한 삶을 살았겠지, 속단하면 안 된다고 브룩스는 말한다. 이들은 오히려 숱한 갈등과 분투하면서 성숙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간 사람들이다. 그들은 삶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어떻게든 나아간 사람들이다. 그래서 알렉산드로 솔제니친은 이렇게 말했다. “선과 악을 가로지르는 경계는 국가나 계급, 혹은 정치적 당파를 가로질러 나 있지 않다. 바로 우리 각자의 심장을 가로지르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인생의 어느 순간에 성공을 향해 오르던 발걸음을 멈추고, 영혼의 깊이를 더하기 위한 투쟁 앞에 무릎을 꿇었던 사람들이다. 삶의 균형을 찾으려는 평생의 노력 끝에, 마침내 아담Ⅰ이 아담Ⅱ 앞에 머리를 숙인다. 더 소중한 무엇을 보았기 때문이다.

 

도로시 데이, 빈민의 어머니

데이비드 브룩스는 아담Ⅱ를 살아간 사람들 가운데서 도로시 데이(Dorothy Day, 1897-1980)를 주목한다. 도로시 데이는 일리노이 주립대학에 입학해 숙식비를 충당하기 위해 청소와 다림질을 하며 평범한 생활을 했지만, 뭔가 영웅적인 삶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희망으로 싫든 좋든 여러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3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경험에 관해 에세이를 쓰고 작가 클럽에 가입했으며, 사회당에 가입해서 활동했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녀는 작가가 되기 위해 뉴욕으로 이사했지만 그곳에선 절박한 고독감에 시달렸다.

“700만 명이 사는 그 커다란 도시에서 단 한 명의 친구도 만들 수 없었다. 일자리도 없었고, 친구들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도시의 소음 한가운데 느껴지는 침묵이 나를 압박했다. 나 자신의 침묵, 그리고 이야기할 상대가 아무도 없다는 느낌이 목구멍을 조여 올 만큼 나를 압도했다. 말로 옮기지 못한 생각들로 내 가슴이 무겁게 짓눌렸다. 눈물로 내 고독을 씻어내고 싶었다.”

이 뉴욕에서 발견한 것은 빈곤이었고, 그녀는 거기서 ‘사회적 실천’이라는 삶의 방향성을 얻게 되었다고 말한다. “어떤 사상이나 사고방식, 욕망, 꿈, 비전으로의 전향을 겪어야 한다. 비전이 없으면 사람들은 말라 죽고 만다. 나는 10대 때 업튼 싱클레어의 <정글>과 잭 런던의 <길>을 읽고 생각의 전향을 겪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세상의 모든 노동자들-에 대한 사랑, 그들과 늘 함께 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전향한 것이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메시아적 사명이라는 신념으로의 전향이었다”

1917년 도로시는 러시아혁명을 경축하는 시위에 참가했다. 그녀는 너무나 커다란 기쁨을 느꼈다. 민중의 승리가 손에 잡히는 것 같았다. 러시아 작가들이 영적 상상력을 북돋았고, 러시아혁명은 젊은 급진주의자들의 미래에 불을 붙였다. 도로시는 마침내 <더 콜>(The Call)이라는 급진주의 신문에서 주급 5달러짜리 일자리를 구했다. 그녀는 한편으로 기사를 쓰면서 한편으로 보헤미안처럼 사는 작가들을 만났다. 그중 극작가 유진 오닐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오닐은 종종 술에 취해 공포에 떠는 도로시를 안아 주었다. 그러나 잠자리를 같이 하자는 오닐의 제안은 도로시가 거절했다.

그녀는 예전보다 더 책을 탐독하게 되었는데, 특히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에 열렬히 빠져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술가를 예언자로, 소설을 묵시록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도로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 “내 존재의 가장 깊은 곳까지 감동을 받는” 경험을 했다. <죄와 벌>의 젊은 창녀와 라스콜리니코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글귀는 복음서와 다를 바 없었다. 대심문관 이야기와 조시마 장로는 각별한 메시지를 주었다.

도로시는 그냥 러시아 소설을 읽는데 그치지 않고, 소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깡마랐던 그녀는 엄청나게 술을 먹고, 아예 술집에 붙어살다시피 했다. 이런 요란하고 거친 삶이 비극을 맛보게도 했다. 홀로데이라는 친구가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그녀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1918년 치명적인 독감이 뉴욕시와 전 세계를 휩쓸었을 때, 도로시는 킹스 카운티 병원에 간호사로 자원했다. 그곳에서 만난 라이어널 모이스라는 신문기자와 육체적 관계를 맺기도 했다. 그때 편지에서 도로시는 “당신과 사랑에 빠진 건 당신이 단단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 그녀는 스키드 로에 있는 아파트에서 마약중독자와 함께 살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들은 도로시도 자서전에 도저히 쓸 수 없었다. 그저 그 시절을 “죄의 슬픔, 형언할 수 없는 죄의 황량함과 쓸쓸함”이라고 적었다.

 

도로시 데이의 회심과 가톨릭일꾼운동

도로시 데이에게 결정적인 순간은 아이의 임신과 함께 찾아왔다. 당시 도로시는 자신의 문란했던 생활을 묘사한 소설 <열한 번째 처녀>(The Eleventh Virgin)를 써서 인세로 스태튼 아일랜드에 집에 사서 지냈으며, 포스터 배터햄과 사랑에 빠졌다. 해변을 산책하면서 도로시는 자신이 다른 무언가를 더 원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물여덟 살이 된 1925년, 그녀는 임신했음을 알고 뛸 듯이 기뻐했다. 누군가에게 감사할 일이었다. “아무리 위대한 책을 썼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정교한 조각품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내 아이를 품에 안은 그 순간의 기쁨보다 크지 않았으리라.” 그 감사의 대상이 하느님이었고, 그녀는 가톨릭교회를 선택했다.

도로시가 가톨릭교회에 관심을 가진 것은 가톨릭 역사나 교황의 권위, 교리나 교회의 정치적 입장 등과는 상관이 없다. 그녀는 교회 자체는 시대에 역행하는 정치적 반동 세력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를 잡아 끈 것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그동안 봉사해 왔던 가톨릭 이민자들이다. 그들의 가난함, 존엄성, 공동체 정신, 그리고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대하는 관대함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비록 가난했지만 교회 전례력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었으며, 축일에는 모여서 함께 기뻐하였다. 도로시는 아이에게도 안정된 삶의 질서를 선물하고 싶었다. 도로시는 날마다 미사에 참여했다. 동틀 무렵에 일어나 수도원 일과에 따라 기도하고, 매일 성서를 읽고, 단식도 하고, 고해성사도 하였다. 이 의식들은 마치 연주자가 음계연습을 하듯 일상적인 일이 되었으며, 이 일상이 지루하더라도 꼭 필요한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종교생활이 그녀의 삶에 영적 중심을 만들어 주었다.

1933년 도로시 데이가 <가톨릭일꾼>(The Catholic Worker) 신문을 창간했을 때, 이 운동은 자기 삶의 많은 부분을 통합시켰다. 그것은 신문인 동시에 구호활동을 위한 사회운동 조직이었다. 종교 출판물이었지만 동시에 경제적 변화를 지지했다. 내적인 삶에 관한 신문이지만 동시에 정치적 급진주의 정신을 담았다. 이 신문을 통해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소통했다. 신학과 경제학, 물질적 관심과 영적 관심, 육체와 영혼을 결합시켰다.

도로시는 신앙인이란 단순한 삶을 살고, 형제자매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돌보고, 그들이 경험하는 행복과 고통을 함께 나눌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도로시 데이는 사교적인 사람이 아니었지만, 날마다 거의 하루 종일 강제로라도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환대의 집을 시작했을 때, 무례하고 불쾌하고 입버릇이 나쁜 사람들도 많았다. 그래도 그녀는 억지로라도 테이블에 앉아서 자기 앞에 앉아 있는 바로 그 사람에게 정신을 집중했다. 그 사람이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녀는 존중하는 태도로 앉아서 그 말을 경청했다.

그녀는 항상 공책을 가지고 다니면서 시간이 조금이라도 나면 글을 썼다. 일기를 쓰기도 하고, 칼럼, 에세이, 그리고 다른 신문에 게재할 기사들을 끊임없이 써 내려갔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신이 선한 일을 한다는 이유로 영적으로 자만하거나 독선적이 되는 것을 경계했다.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급히 누비고 다니면서 연달아 수프를 나눠 주고 빵을 건네며 배고픈 사람들이 전하는 감사의 소리가 내 귀를 가득 채우도록 허락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내 귀는 다른 사람들의 배만큼 허기질 때가 있다. 감사의 말을 듣는 즐거움을 찾는 허기 말이다.”

도로시는 모퉁이를 돌 때마다 자만심이라는 죄를 만나게 되고, 빈민들을 위한 숙소에도 수많은 모퉁이가 있다고 믿었다. 다른 사람들을 돕는다는 것은 커다란 유혹 속에서 사는 일이다.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것

가톨릭일꾼운동은 노숙인들을 위한 환대의 집 활동 때문에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자는 운동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것은 이 운동의 주 목적도, 조직의 구성 원칙도 아니었다. 주된 개념은 그리스도인들이 정말로 복음의 원칙과 사랑으로 가득한 삶을 영위했을 때 세상이 어떤 모습을 보이게 될지 모델을 제공하자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뿐 아니라 봉사하는 사람들의 불완전함을 다루는 것도 목표 중 하나였다. 도로시 데이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씻지 않은 몸에서 나는 악취가 풍기는 곳에서 잠이 든다. 사생활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구유에서 태어나셨고, 마구간은 쉬이 더러워지고 냄새 나는 곳이다. 성모님이 참을 수 있었다면, 나도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다.”

도로시 데이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섭리와 연관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입을 옷을 찾아줄 때마다 그것은 기도하는 행위와 같았다. 그녀는 ‘자선을 베푼다’는 개념에 혐오감을 느꼈다. 가난한 사람을 폄하하고 무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봉사 행위 하나하나는 가난한 사람을 섬기며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었고, 자신의 영적 요구를 충족하는 행위였다. 도로시는 다른 사람과 교감하면서 하느님께 다가가기 위해서는 가난을 포용해야 하며, ‘빈곤을 개인적인 덕목으로 내면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도로시 데이의 일기를 읽다보면, 그녀가 세상에서 찾을 수 있는 기쁨을 너무 많이 포기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의 일기와 글을 통해서만 도로시 데이를 알려고 하면 오해가 생길 수 있다. 도로시는 행복할 때는 일기를 쓰지 않았다.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을 하느라고 바빴기 때문이다. 뭔가를 곱씹을 때, 고통의 원인이 무언지 생각하고자 할 때 일기를 쓰곤 했다. 그래서 일기는 고뇌에 찬 도로시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그녀는 사실 일상 속에서 아이들과 친구들, 그녀를 존경하는 사람들과 친밀한 공동체에 둘러싸여 있었다.

메리 라스럽은 이렇게 전한다. “그녀는 친밀한 우정을 나눌 무한한 역량을 지닌 사람이었다. 친구들과 맺는 우정은 모두 특별하고 유일무이했다. 그녀는 그런 친구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가 사랑한 사람들 말이다.” 아울러 도로시는 음악과 세상의 감각적인 것들에 대한 치열한 사랑을 나누고 살았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오페라를 들으며 마치 황홀경에 빠진 사람처럼 넋을 놓기도 했다. 도로시 데이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기억해야 해.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할 거라고 했잖아.”

 

도로시데이와 종교적 현실주의

도로시 데이는 가난한 이들을 직접 돌보아 주었을 뿐 아니라, 당대의 평화운동과 정치적 실천에도 열심이었다. 그러나 태도는 다른 급진주의자들과 달랐다. 급진주의자들은 해방, 자유, 자율을 외친 데 반해 그녀는 순종, 섬김, 자기포기를 역설했다.

그녀는 가톨릭교회의 결함을 잘 알고 있었지만, 교회도 일정한 체계와 틀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주변에 있는 급진주의자들은 교회의 결함을 지적하며 교회를 버리고 싶어 했다. 이를 두고 도로시는 “마치 사춘기 청소년들이 자기 부모가 오류를 저지르기 쉬운 사람이란 걸 알게 되자마자 나무 충격을 받아 가정이라는 제도를 버리고 그들만의 ‘공동체’로 가출하려는 것 같은 느낌이다. ... 그들을 ‘나이어린 성인’(young adults)라고 부르지만, 내게는 사춘기에나 어울릴 법한 낭만적인 환상을 하나도 버리지 못한 채 뒤늦은 사춘기를 치르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도로시는 스스로 ‘나는 종교적 현실주의를 원한다’고 했다. 그녀는 안이한 신앙을 지적하며, 영적 성장조차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말한다. “내게 그리스도는 은전 30냥에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 심장에 흐르는 피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제값을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이런 점에서, 도로시는 자연인이란 타락한 존재이며, 자연적 욕구를 억제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성장하려면 삶의 가지치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가지치기는 자연적인 인간을 아프게 한다. 그러나 타락한 존재가 깨끗하게 되려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인간이 되려면 이런저런 아픔을 피할 수가 없다. 우리의 아둔함과 무기력함에도 불구하고 영적 삶 안에서 성장을 한다는 사실은 생각만 해도 기쁘지 않을 수 없다.”

도로시 데이가 마지막까지 성인다운 평온함과 자기만족을 느꼈는지는 모르겠다. 그녀가 마지막 숨을 거두던 날, 그녀의 일기 마지막 장에 카드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시리아인 성 에프라임의 참회 기도가 적힌 카드였다. “오, 내 생명의 주인이신 주여, 제 영혼에서 게으름과 비겁함, 권력에 대한 욕망, 부질없는 말을 거두어 가시옵소서. 그리고 주님의 종인 제 영혼에 순결함과 겸손, 인내, 사랑을 주시옵소서.”

그래도 역시 그녀는 자신이 묘비에 새겨질 말로 고른 “DEO GRATIAS”(하느님께 감사를)처럼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승을 떠났다. 다음은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며, 벗이었던 로버트 콜스에게 도로시가 남긴 말이다.

“과거 일을 회상하려고 애썼어요. 주님이 내게 주신 이 삶을 기억하려고 노력했지요. 며칠 전 나는 ‘삶을 기억하다’라고 써 내려갔어요. 그러고는 내 인생을 요약하려고 했지요. 그런데 할 수가 없었어요. 난 그냥 자리에 앉아서 우리 주님과, 수백 년 전 주님이 이 땅을 방문하셨던 것에 대해서만 계속 생각했지요. 그러다가 나 자신에게 말했어요. 내 삶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마음속에 그분을 간직했다는 게 얼마나 운이 좋은가!”

 

*이 글은 격월간 <공동선> 2020년 1-2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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