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일꾼운동의 목표와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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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일꾼운동의 목표와 방식
  • 서민호 미카엘
  • 승인 2020.01.13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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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일꾼운동에 관한 글 - 네번째」 가톨릭일꾼운동의 목표와 방식

가톨릭일꾼운동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의와 사랑에 따라 사는 것이다. 우리(가톨릭일꾼운동)의 원천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안에 전승되어 온 구약과 신약성서에 있으며,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을 삶으로 증거하고 거룩함으로 뛰어난 남성과 여성들”(성찬기도 중에서)인 성인들의 삶에서 영감을 받고 있다.

이러한 목표는 우리에게 처음부터 다른 방식으로 살도록 요청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창립자들의 말씀을 상기하고 있다. 도로시 데이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것보다 세상을 훨씬 더 단순하게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피터 모린은 “사람들이 선하게 살기가 더 쉬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흔히 자본주의 사회(생산방식과 부의 지배방식에 의하여)로, 부르주아 사회(소유와 물질적 이익에 대한 강한 집착, 그리고 겉모양새 꾸미기와 안정에 대한 강조 때문에)로 불리는 우리사회를 진단해 볼 때에 하느님의 정의로부터 꽤 멀다는 평가가 나온다.

우리 주변의 상황 그리고 우리 자신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공동선」 원리는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안에서 각자의 선함이 모든 사람의 선에 기여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의 비전을 보여주고 있다. 모린이 언급한 것처럼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사람은 개인적 권리만을 갖고 있는 개인 이상의 존재이다. 그는 하느님과 자기 자신 그리고 동료 인간들에 대한 인격적인(고유한) 의무를 갖고 있는 인격체이다. 인격체로서 사람은 공동선에 봉사함이 없이 하느님을 섬길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원리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실제 생활화 되었고 이 사실이 사도행전에(사도행전 2,42-47)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다. 이 원리에는 충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말, 행동과 비전이 전 사회의 안녕, 특히 가장 혜택을 못받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사회의 어떤 한 계층의 행동이 한 체제 안에서 또다른 계층의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억압을 가하였다 하더라도 그 체제는 공동선을 위한 것이라고 간주될 수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가 비록 국가의 일반적인 부의 증가에 기여했다 하더라도 이 부를 창출하기 위하여 다수를 억압하고 착취하였다면 그 체제는 근본적으로 불의한 체제일 수밖에 없다.

 

가톨릭일꾼운동의 목표

예수의 가르침을 보다 진실하게 따른 방식을 모색하고 있는 오늘날의 가톨릭신자들에게 피터 모린은 그의 <쉬운 글들>에서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에겐 새로운 원리가 필요없다. 우리는 오래된 기술이 필요할 뿐이다. 우리에겐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오랜 기술이 필요하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충분히 좋았던 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좋은 것이 되어야 한다.”

현재의 불의하고 소유 지향적인 낡은 질서보다 보다 정의롭고 기능적인 사회질서를 건설하는 것이 가톨릭일꾼운동의 목표이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가톨릭일꾼들은 다음을 옹호한다:

인격주의 : 각 인격체의 자유와 존엄성을 모든 철학과 도덕의 기초요 핵심이며 목표라고 생각하는 철학이다. 이러한 지혜를 따르면서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개인주의로부터 이웃의 선을 향해 나아간다. 이 일은 국가나 혹은 다른 단체들에게 비인격적인 “애덕” 활동을 기대하는 대신 조건을 변화시키는 인격적인 책임감을 받아들임으로써 가능하다. 우리는 교회가 이런 철학에 의하여 쇄신되고, 참여로부터 소외되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피터 모린이 가르친 관대한 인격주의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환영받는 때가 오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인격주의를 정의하면서, 모린은 사고할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인류는 동물의 세계와 다르다고 설명한다. 이성의 작용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실존을 느낀다. 이성의 사용으로 인격체는 개인과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권리와 책임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권리와 책임감은 우리에게 이성의 선물을 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차적인 의무는 하느님의 뜻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다스리기 위하여 인류가 필요한 것은 단순히 이성만이 아니라 신앙도 필요하다고 모린은 말한다:

"신앙은
이성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성을 뛰어넘는 것이다.
이성의 사용은
신앙으로 이끄나,
이성은
신앙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신앙의 진리를
우리는 신앙의 신비라고 부른다."

모린의 공생주의적 인격주의는 한 개인과 사회의 변화를 가져오거나 영향을 미치는 데 있어 힘이나 정치적 권력을 선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생적 인격주의자는 사상과 실천의 힘을 통하여 변화를 가져온다. 모범을 통하여 복음서에서 발견되는 사상(신앙)을 따름으로써 우리는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알게 된다. 우리 각자가 그리고 모두가 이웃에 대한 책임(루카 10,29-37)을 지고, 그럼으로써 가난하고 집없는 사람들이 국가나 기관의 비인격적인 배려를 통해서가 아니라 동료인간들의 인격적인 사랑에 의하여 보호되는 것이다.

다시 피터 모린은 이렇게 말한다:

"인격주의자는 가서 얻는 사람이 아니라
가서 주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주려고 하며
다른 동료가 가진 것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동료인간에게 선을 행함으로써
자신이 선해지려고 한다.
그는 이웃중심이며 자기중심적이지 않다.
그는 공동선의 사회적 가르침을 알고 있다.
그는 말과 행동으로
공동선의 사회적 가르침을 퍼뜨린다.
그는 말로서뿐 아니라
행동을 통하여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행동이 말보다
더 크게 울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말과 행동을 통하여
일치의 개념을 보여주며
공동체의 일치를 가져온다."

 

 

분권적인 사회 : 현재의 거대한 정부, 산업, 교육, 보건 그리고 농업체제에 비하여 대조적으로 분권화 된 사회를 지향한다. 우리는 가족농, 농촌과 도시의 토지 공유제(땅이 아무의 소유도 아니며 법에 의하여 정해진 목적, 보통은 지역공동체의 공동목적에만 이용되도록 정한 제도), 중소기업의 노동자 소유권과 운영권, 식량창고(지역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식량저장 장소), 협동조합 그리고 화폐가 오로지 교환의 수단만이 되고 인간존재가 더 이상 소모품이 되지 않도록 하는 모든 형태의 노력들을 격려한다.

가톨릭일꾼운동은 정부와 그 모든 서비스가 비인격적이고 집중된 형태가 아니라 지역차원에서 또한 인격적인 차원에서 관리되고 수행되기를 주장한다. 한국에서의 지방자치제도 같은 것도 지방분권화를 위한 노력이라 할 수 있지만 시민들이 공동체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있어 지역에서 선출된 관리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면 아무리 이론적으로 훌륭한 지자제라 할지라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지방분권적인 사회의 목표는 사람들이 적극적인 동기를 갖고 지역차원에서 지역공동체와 모든 사람들의 공동선을 위하여 행동할 수 있는 힘을 주려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공장을 소유하고 운영하는 것과 협동조합 결성은 중요한 과제이다. 왜냐하면 정의로운 사회를 다시 건설하려면 화폐(돈)가 단순히 교환의 수단으로서만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사회에서 부자들은 돈을 빌려주거나 투자할 수 있으며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이자로부터 다시 돈을 만들고 있다. 그 결과로, 부자들은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이들은 더욱 더 가난해지고 있다. 이러한 체제는 고대 이스라엘과 초기교회시대에는 본질적으로 사악한 체제라고 간주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땀흘리는 방식 이외의 다른 모든 방식으로 돈을 버는 것은 좋지 않으며 법에 저촉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모린은 그의 저서 <쉬운 글들>에서 돈의 역사를 추적하고 있다. 그리고 중간계층이 확립되고 새로운 시장이 뚜렷이 출현하는 15세기로부터 돈의 이용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처럼 물건들이 사용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윤을 위하여 생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모린은 계속하여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과
교회의 교부들은
이익을 취하고자 돈을 빌려주는 것을 금하였다.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을
고리대금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예언자들과
교회의 교부들에게 귀 기울였을 때
그들은 살기 위하여
땀흘려 일하는 것 이상으로
좋은 방식을 발견할 수 없었다.
죤 칼빈이
고리대금을 합법화했을 때
그는 가치의 기준을 돈의 축적이라고 정했다.
돈의 축적이 가치관의 기준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사용하기 위한 생산을 중단하고
이윤을 위한 생산을 시작하였다."

녹색(푸른)혁명 : 그럼으로서 노동의 올바른 의미 그리고 땅과 우리와의 참다운 관계를 재발견하는 것이 가능하다. 분배적 공생주의, 농경과 수공예 그리고 올바른 기술로 이루어지는 자급자족, 사람들이 자신의 노고와 노동의 열매로 살아가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회, 상호적인 단체들, 그리고 갈등해결에 있어 공평한 사고방식과 감지 등이 녹색사고와 실천으로 표현되는 형태들이다.

비폭력 :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울 것이다”(마태 5,9). 오직 비폭력의 행동을 통하여 인격적 혁명이 달성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혁명에 의하여 하나의 악이 또다른 악으로 대체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어떤 이유에서건 생명을 의도적으로 빼앗는 것을 반대하며 모든 억압을 하느님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는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지우지 말고 우리 자신이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으며 기도라는 영적인 무기, 단식 그리고 악과의 비타협으로 폭력과 싸워야 한다고 가르쳤다. 전쟁에 사용되는 세금의 거부, 징병거부, 불의한 법에 대한 불복종, 비폭력의 파업과 불매운동 참여, 항의와 철야 기도, 독재체제, 금전투기, 고리대금 체제에 대한 거부등은 모두 평화를 이룩하는 훌륭한 수단들이다.

대부분의 가톨릭인들은 비폭력의 시민불복종운동이 그리스도교 역사에 있어 얼마나 오랫동안 풍부한 전통 안에서 지속되어 왔는가를 모르고 있다. 예수의 행동으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쟁과 핵무기에 반대하는 항의시위 등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불행하게도, 교회는 예수의 비폭력을 수동적인 평화주의로 그리고 있으며 오늘날의 비폭력 행동가들을 위험스런 급진파로 간주하고 있다.

성전에서 상인들을 내쫓으신 것(마태 21,12-15), 이삭을 줏는 것(루가 6,1-5) 그리고 안식일에 아픈 이를 고치신 것(요한 5,1-18)등은 시민불복종운동의 비폭력 행위이며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뿌리를 내리는 불의한 체제의 본질을 알아보도록 억압자의 마음을 일깨웠다고 할 수 있다.

시민불복종과 비폭력에 대한 레오 톨스토이의 저서들 그리고 19세기말의 노동운동가인 유진 뎁스 등의 가르침으로부터 일찌기 영향을 받은 도로시 데이의 1차 2차 세계대전에 대한 공적항의는, 모든 형태의 폭력 전쟁을 거부해왔던 평화운동가들의 오랜 전통과 일치되는 것이었다. 20세기에 와서도 우리는 간디와 마르틴 루터 킹 목사의 삶에서 그와 같은 위대한 모범들을 발견하였다.

가톨릭일꾼운동의 비폭력은 단순히 정치적 시위를 위한 한가지 방법론이 아니다. 많은 환대의 집에서 가톨릭일꾼들은 일상생활을 통하여 문자 그대로 길에서 사는 사람들, 약물에 중독된 사람들, 알콜 중독자 등등, 사회 구조악에 의하여 폭력의 희생자가 된 사람들 그리고 여기에 폭력으로 응답한 사람들과 한데 어울려야 한다.

환대의 집에서 살고 일하는 공동체의 일원들은 찾아오는 손님들한테 야단맞고 얻어터진 얘기들을 한다. 공동체의 이상은 폭력을 폭력으로 맞서지 않는 것 뿐 아니라 대화를 통하여 문제를 풀어나감으로써 폭력의 악순환을 깨뜨리는 것이다. 때로 그 방법이 성공하지만 실패할 때도 있다. 그러나 악을 악으로 갚지 않겠다는 사명(마태 5,38-48)은 분명하다.

결과가 어떻든지간에, 또한 가톨릭일꾼 공동체 집이나 구성원들에게 어떤 해가 있든지 경찰에는 절대로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경찰과 사법체제는 그들 자체가 체계적인 폭력기구로서, 이것들은 소위 “범죄”의 폭력을 사회로부터 차단시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잘못이 있다. 폭력의 근원과 이유들은 결코 믿을만하게 밝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개인적으로 우리 안에 그리고 전체적으로 우리 사회 안에 뿌리를 두고 있는 폭력에 대하여 깊이 관찰하도록 격려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폭력의 참 주제를 받아들이는 대신 시민들은 비인격적이고 중앙집권적인 정부기구들에게 이러한 문제들을 위임시켜버리는 것이다.

by fritz eichenberg
by Fritz Eichenberg

애덕의 행위(마태 25,31-46절과 같음) : 사랑실천은 복음의 핵심에 있으며 “가장 보잘 것 없는 우리의 형제자매들”에게 하는 우리 응답의 분명한 지침서이다. 환대의 집들은 이러한 사랑의 행위를 배우는 기지로서 가난한 사람들은 정의로 따진다면, 그들의 몫을 가져가는 것이다. 우리 벽장 안의 두 번째 외투는, 우리 집의 빈방은, 우리 식탁의 빈자리는 가난한 사람의 것이다. 우리가 즉각적으로 필요로 하지 않는 것들은 그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이다.

피터 모린은 이렇게 썼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초기에
배고픈 사람은 개인적인 희생에 의하여 밥을 먹었고
헐벗은 사람은 개인적인 희생에 의하여 옷을 입었다.
집이 없는 사람들은
개인적인 희생에 의하여 집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옷을 입고 피난처가 주어졌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들이 서로를 어떻게 사랑하는가 알아보자”

오늘날에 와서 가난한 사람들은 더 이상
개인의 희생에 의하여
먹고 입고 있을 곳이 주어지지 않으며,
세금과 관련기구의 주선으로
먹고 입고 있게 되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개인의 희생에 의하여
더 이상 먹을 수 없고 입을 수도 없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어떻게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지 알아보자”

사랑의 실천은 모든 신자들의 기본적 책임으로 교회의 가르침 안에 자리잡아 왔으며 가톨릭일꾼운동의 근거로 채택되었다.

폰 케틀러 주교는 19세기 말에 살았던 사람으로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교부들의 모범을 받아들였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넘치는 재화를 갖고도 도움이 필요한 형제자매의 고통스러움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죽음에 이르는 죄(대죄)를 짓는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신앙의 기준에 의하면 대부분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주위의 사람들이 집없고 굶주리는데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안락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잉여분을 축적하는 대죄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가톨릭일꾼운동은 예수의 명령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첫 번째로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이웃의 고통을 구제함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웠다고 확신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더 이상 이것을 강조하고 있지 않다. 오늘날 한국의 교회는 대다수 가톨릭인들의 냉장고가 점점 커져가고 그들의 옷장이 더 꽉꽉 차고 있으며 지하철, 청량리역 혹은 종로의 종묘에서 매일 자는 집없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가는 사실에 대하여 아무런 말이 없다. 우리는 정부나 자선단체가 이러한 사람들을 책임져야 한다면서 우리의 죄책감을 합리화시킨다. 이러한 합리화는 가톨릭의 전통과 어긋나며 예수의 가르침이 아닌 것은 더더욱 분명하다.

육체 노동 : 사회는 육체 노동을 경시하며 열등하게 생각한다. “협력을 권장하고 장애물을 극복하며 형제애의 정신을 형성하는 것(그저 일을 하는 것) 이외에도, 육체 노동은 우리의 몸과 손, 정신까지 이용할 수 있게 해준다”(도로시 데이). 분도 수도원의 좌우명인 “기도와 노동”은 우리에게 인간이 하는 노동은 세계의 변화와 하느님의 영광에 필요한 선물이라고 상기시켜 준다.

인간의 필요가 더이상 노동의 이유가 되지 않는 세상이다. 대신 기술의 무한한 팽창은 자본주의에 필요한 것, 소위 “발전”으로 생각되어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직종은 생산성의 향상, “고급 기술”에 대한 관리, 전쟁관련 사업, 소비자 위주의 일회용 물품생산 등에 치중되어 있으며, 따라서 노동자들도 인간복지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일에 갇혀 있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직종들이 점점 전문화되어감으로 많은 사람들은 의미있는 일로부터 제외되거나 자신의 노동의 산물로부터도 격리되어 버리는 것이다. 농경에 있어서도, 대농기업이 농사짓는 일을 대체하였으며 다른 모든 분야에서 도덕적인 제한이 무너졌고 자연법에 대한 무시는 이 지구라는 행성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by Fritz Eichenberg
by Fritz Eichenberg

자발적 가난 : “가난의 신비는 참으로 놀랍다. 즉 우리는 가난을 나눔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줌으로써 우리 자신을 가난하게 만들지만 대신 사랑에 관한 우리의 지식과 믿음은 증가되는 것이다”(도로시 데이). 자발적인 가난을 끌어안음은, 다시 말하자면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과 기꺼이 함께 한다는 것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선택이 아니므로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 자신을 내어맡길 수 있도록 은총을 강구해야 한다. 자발적 가난은 교회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육화시키는 길 위에 우리를 제대로 서게 만들 것이다.

피터 모린은 이렇게 말했다:

"프란치스꼬 성인은 생각했다.
가난해지기로 선택하는 것은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처녀와
결혼하는 것과 같이 좋은 것이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하느님의 대사들(代使)이 아니라
사회적인 골치 덩어리들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우리는 아씨시의 프란치스꼬 성인이 생각했던 것처럼

가난의 부인이 아름다운 아가씨가 아니라,
못생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넘치는 재화를 갖고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기를 거절하는 것이 아닌가..."

※ 여기에서의 가난은 궁핍으로서의 가난, 강요된 가난이 아니라 예수의 육화로 표현되는 하느님의 자발적인 가난을 기꺼이 따르는 가난이다. (도로시 데이)

우리는 이러한 목표를 이루어가는 데 있어 실패들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희생과 고통은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결정하는 성공은 우리 삶을 판정하는 데 있어 마지막 기준이 되지 못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어떻게 그분의 진실을 살아가는가 하는 문제이다.

 

서민호 미카엘
미국인으로, 메리놀외방선교회 평신도 선교사였다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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