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이 닭을 키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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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닭을 키우기로 했다
  • 한상봉
  • 승인 2020.01.05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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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23

시골에 살면서 아내와 뜻을 모은 게 하나 있었다. 짐승은 키우지 말자는 것이었다. 다만 서울에서 이사오던 날 한식구가 되어버린 고양이 한 마리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 두 사람도 제대로 산다고 장담할 수 없기에 다른 생명을 양육한다는 것은 어림없는 짓이라고 여겼다. 더군다나 짐승을 키우면 집을 비우기도 어렵고, 짐승의 먹이를 이웃에게 매번 부탁하기도 미안한 일이었다. 그런데 시골생활 1년 만에 우리 삶 한가운데로 진입해 온 아기의 등장은 또 다른 생명을 받아들이도록 부추겼다. 아기가 이유식을 먹게 되면서 달걀이 필요했던 것이다.

두 해 전에 닭똥을 거름으로 쓸 요량으로 양계장에 간 적이 있었는데 집단으로 사육되는 닭의 처지가 가련했다. 로마 함대의 배 밑바닥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구령에 맞춰 노를 젓고 있는 노예들이 연상되었다. 사람들은 밤에도 양계장에 불을 밝히고 알을 낳도록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물론 거기서 생산되는 달걀은 무정란(無精卵)이다. 그 달걀이 온전한 생명일 수 없다는 것은 달걀을 깨보면 안다. 껍질이 깨지는 순간 노른자가 맥없이 퍼져버린다. 아기에게 그런 달걀을 먹일 순 없었다. 그렇다고 닭을 키우는 이웃들에게 마냥 얻어먹을 수도 없고, 유정란(有精卵)을 구하자고 한살림에 주문하거나 함양이나 전주에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이번 겨울에 닭장을 지었다.

아랫마을에서 수탉 한 마리와 암탉 두 마리를 얻어왔고, 닭들은 하루에 알을 하나씩 낳아 주었다. 우리 딸내미는 그놈을 잘도 받아먹었다. 찐계란이든 국에 풀어놓은 것이든 아기가 좋아하는 걸 보고 흐뭇해하는 내 모습을 보니, 때때로 부모란 참 무서운 존재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제 자식을 거두어 먹이기 위해 다른 생명의 알을 둥지에서 들어내는 손길이 처음엔 꺼림칙했으나 반복하다 보니 그런 마음도 없어졌다. 처음엔 아침마다 닭장을 들여다보았는데, 닭은 밤새 알을 낳는 게 아니란 걸 알고 점심나절을 보내고 나서 닭장을 기웃거린다. 말은 안 해도 닭들이 얼마나 얄미웠을까? 그래도 나는 올봄에 암탉을 서너 마리 더 들여놓을 생각을 하고 있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닭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 식구가 된 며칠 뒤, 모이를 주러 닭장에 들어갔다가 실수를 했다. 깜빡 닭장 문을 열어놓은 틈에 수탉이 호기있게 날아가 버린 것이다. 이 녀석이 토종닭이라서 그런지 닭장 아래 비탈을 훌쩍 날아서 고목에 올라앉았다. 녀석은 자리에서 한동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쫓아가서 장대로 나무를 툭툭 치니까, 이번엔 아랫녘으로 더 멀리 날아가 버렸다. 있을 만한 곳을 뒤져보았으나 닭이 보이지 않았다. 입에선 연신 한숨만 나오는데, 아내는 매사에 조심스럽지 않은 내 행동을 타박했다.

하아, 어찌해야 한담. 문제를 만들어 놓고 해결을 보지 못했으니 껄렁껄렁 집에 들어갈 수도 없고, 주변을 맴돌아 보아야 닭은 보이지 않고 난감했다. 나중에 마을 사람 이야기를 듣고, 암탉의 다리를 끈으로 묶어 놓고 수탉이 돌아올 때까지 문을 열어두기로 했다. 허어, 신기하게도 저녁이 되어 땅거미가 지자 수탉이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더니 아랫집 닭장에 가서 그 집 수탉과 한바탕 싸움을 하고는 제 집으로 들어갔다. 멀리서 이 꼴을 지켜보다가 살그머니 닭장 문을 잠그는 순간 저절로 하느님께, 자연의 이치에 감사드리는 마음이 일었다.

며칠 뒤에는 흉한 일이 생겼다. 내가 장에 간 사이 몸집이 비교적 작은 암탉 두 마리가 땅을 파고 닭장 밖으로 탈출했다는 이야기를 아내에게 듣고 서둘러 집에 돌아왔는데, 닭장이 텅 비어 있었다. 탈출했던 암탉들이 다시 닭장으로 들어가려고 왔다가, 한 마리는 윗집 개 왈순이가 물어가고 한 마리는 혼비백산 밭으로 달아났는데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윗집 아저씨가 일러준대로 하기로 했다. 수탉을 풀어놓으면 그 녀석이 암탉을 데려온다는 것이다.

과연 저녁이 되자 암탉이 닭장이 바라다보이는 언덕 위에 나타났다. 이놈은 그 자리에서 서성거리며 한참 동안 뜸을 들이면서 닭장 쪽을 바라보곤 했는데, 개에게 혼쭐이 난 까닭에 조심하는 눈치였다. 옆구리 깃털이 좀 빠진 것 같았는데, 그 눈빛이 왠지 애잔해 보였다. 결국 암탉이 집으로 들어와 횃대에 올라앉자, 수탉이 이번에도 아랫집 닭장에 들러 그 집 수탉한테 한바탕 싸움을 걸고 나서 닭장 문을 들어섰다.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지만 그뒤로 사나흘 동안은 잘 먹지도 않고 알도 낳지 않았다.

요즘 우리 부부는 날마다 음식물 찌꺼기며 쌀겨를 듬뿍듬뿍 닭장에 넣어준다. 상실감을 그만 잊고 잘 먹고 알도 잘 낳으라는 성의 표시다. 순전히 사람의 입장만 헤아리는 것이지만 어찌하겠는가? 사람은 사람이고 닭은 닭인데. 이런 생각을 하면 자꾸 치사해진다. 짐승을 키운다는 게 영 개운치 않다. 나중에 소 한 마리쯤은 키우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 또 짐승들에게 못된 짓을 하게 되는 건 아닐까 싶다.

언젠가 <녹색평론>에서 짐승을 키우지 않는다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모든 목숨 가진 것들이 제 생긴 대로 제 기운대로 자유롭게 산야를 누비면서 살아야 하는데, 사람들 이익 때문에 가두어 놓고 묶어놓고 길들이는 게 영 마뜩찮아서 아예 짐승을 키우지 않는다고 했다. 그분은 아예 고기란 걸 먹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주장에 선뜻 맞장구칠 생각은 아직 없지만, 짐승에 대해서 그만큼 섬세한 감수성을 느낀다는 것은 본받을 만하다고 여긴다.

수탉이 멋지게 날아오르던 장면이 눈에 삼삼하다. 그 불그죽죽한 날개를 접고 나무에 앉아있던 수탉이 참 장해 보이기도 했다. 새색시처럼 수굿한 암탉. 그들에게 온전한 자유를 줄 수는 없지만, 그들도 아기나 고양이처럼 이제 진짜 우리 식구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지면 닭들은 횃대 위에서 항상 서로 날개를 기대어 앉아 있다. 아침이 될 때까지 겨울밤 내내 서로의 체온을 나란히 느끼며 잠을 청한다. 이 닭들이야말로 서로가 서로에게 참으로 식구(食口)인 셈이다.

식구가 늘어날 때마다 우린 좀더 수선스러워지고 에너지를 더 키워야겠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모두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겠다고 말했던 예수는 참 통이 크고 품이 넓은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고양이는 고양이대로, 아기는 아기대로, 닭은 닭대로 먹는 것도 기질도 생활 양식도 다를 텐데, 그 미묘한 삶의 갈피를 살피고 도닥거리며, 사는 동안 쾌적하고 주어진 생명을 한껏 누릴 수 있도록 곁에 식구로 서 있는다는 건 고단하지만 즐거운 일이다.

새로운 목숨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다른 생명을 우리 삶 안으로 초대한다는 것은 단순히 밥상 위에 밥그릇 하나 더 올리는 일이 아님을 닭을 통하여 배운다. 그 사람, 그 짐승의 흐름을 더불어 탈 줄 알아야 후회를 줄일 수 있다. 다른 목숨의 생리(生理)를 헤아리고 조화롭게 처신해야 상처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그렇지만 그게 뭐 그리 쉽겠나, 싶은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오늘은 갔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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