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가 과거를 다시 만든다"_새해 달력을 걸며
상태바
"미래가 과거를 다시 만든다"_새해 달력을 걸며
  • 박철
  • 승인 2020.01.05 21: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철 칼럼

새로운 달력을 벽에다 갖다 걸고, 지난 달력을 떼어 냈다. 작년 달력을 보니 여기저기에 쓰여 진 메모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한 해 동안 일어났던 일들, 만났던 사람들이 영화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이제는 다 잃어버린 시간들이다. 새 달력을 한 장씩 넘기니 다가올 사건들이 떠오른다.

작년의 시간은 이미 사라졌고 새해의 시간은 이제 막 시작되는데, 사라진 시간은 기억 속에 여전히 남아 있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은 부푼 기대 속에 이미 와 있다. 삶의 시간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구분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는 지나간 시간이지만 아직 지나가지 않았고, 미래는 오지 않은 시간이지만 이미 와 있기 때문이다.

지나간 과거가 내 기억과 삶의 구석구석에 살아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어떤 과거는 맑은 샘물처럼 감사를 만들어 내고, 어떤 과거는 독초처럼 아픔과 고통의 열매를 계속 만들어 낸다. 특히 잊고 싶은 과거는 더 강하게 내 삶을 붙들면서 현재 속에 집요하게 남아 있다.

이제 세월이 더 흐르면 과거에 대한 기억들은 점차 사라지겠지만, 과거의 사실들은 어떤 형태로든 내 현재 속에 남아 계속 영향을 미치면서 내 삶을 만들어 갈 것이다. “과거가 미래를 만든다”는 이 평범한 사실이 새삼 절실하게 느껴진다. 이것을 좀 더 제대로 깨달았다면 순간순간을 좀 더 충실하게 살았을 것을… 지난 달력을 보면서 이런 아쉬움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이런 생각이 든다. 과거가 현재 속에 남아 내 미래를 만드는데, 만약 그 과거가 부정적 것이라면 어떻게 그것을 떨쳐버릴 수 있을까? 그것이 미치는 영향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과거는 언제나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것일까? 나의 미래가 언제나 과거에 붙들려 있을 수밖에 없다면, 새롭게 주어진 시간의 의미, 새해의 의미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과거의 사실은 누구도 바꾸지 못하지만, 누구도 바꿀 수 없는 그 과거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과거의 의미를 바꾸는 것이다. 만약 내가 과거의 실패를 통해서 오늘과 내일을 위한 지혜를 얻고 삶의 방향을 바르게 정하게 되었다면, 나는 그 과거를 매우 의미 있는 과거로 만든 셈이다. 과거의 사실 그 자체는 바꾸지 못했지만 그 과거가 나에게 주는 의미를 바꿈으로 과거를 나에게 꼭 필요했던 과거로 다시 창조한 것이다.

이처럼 과거의 사실은 고정되어 있지만, 그 의미는 미래의 선택과 행동에 의해서 계속해서 새롭게 태어난다. 그러므로 과거는 바꿀 수 없도록 닫힌 운명과 같은 것이 아니라, 미래에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계속해서 새롭게 창조될 수 있는 열린 가능성이다. 미래가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새로운 시간과 일을 주기 때문만이 아니라, 과거를 끝없이 다시 창조하기 때문이다.

과거는 완결된 그림이 아니라, 계속 그려나가야 할 미완성의 그림으로 존재한다. 검은 색과 진홍색의 과거가 있었다고 하자. 만약 미래를 하느님과 함께 그려간다면, 하느님께서는 과거의 어두운 색들을 미래를 위해 필요한 색이 되도록 만드신다. 하느님은 내 인생의 그림을 위해서 초록색과 하늘색과 흰색도 사용하시지만, 종종 검은 색도 꼭 필요한 색으로 사용하신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해를 주신 것은 작년을 잊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작년을 다시 창조할 기회로 주신 것이다. 하느님은 미래를 가지고 과거를 다시 만들어 내시는 섭리의 하느님이시다. 이것을 두고 성경은 “하느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게 해서 선을 이루시는 분”이라고 했고(로마서 8,28), 또 “메뚜기가 먹어버린 수확물을 그 먹은 햇수만큼 갚아주시는 분”(요엘 2,25)이라고 했다.

새해를 인도하실 하느님은 바로 이런 섭리의 하느님이시다. 만약 당신이 새해에 하느님과 함께 동행한다면, 새해는 계속해서 당신이 살았던 작년의 의미를 새롭게 다시 창조하는 순간순간들이 될 것이다. 고통스러웠고 어두웠던 순간들도 꼭 필요했고 소중했던 순간들로 의미가 바뀔 것이다.

이제 새해가 시작되었다. 새해를 살아가는 의미는 백지 위에 새로운 역사를 써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써왔던 과거의 역사를 다시 써 가는데 있다. 시인 T. S. 엘리엇이 이런 말을 했다. “시간은 시간을 통해서만 정복된다” 그렇다. 어떠한 고통스러운 과거도 하느님과 함께 하는 미래가 있다면, 정복되고 회복될 수 있다. 우리는 “과거가 미래를 만든다”는 운명적 진리보다 “미래가 과거를 다시 만든다”는 섭리적 진리를 믿고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다. 새해를 섭리의 하느님과 동행하길 바란다. 새해 간절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기도를 바친다.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 이제 저는 더 이상 저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저를 어디에 두시든지,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일과 제가 견딜 수 있는 모든 일 가운데서와, 그곳에 저를 위한 것이 있을 때나 전혀 없을 때나, 제가 괴로울 때나 평안할 때나, 모든 일 가운데서 제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제가 존귀할 때나 비천할 때나, 제가 넉넉할 때나 궁핍할 때나, 제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을 때나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나,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저의 모든 것과 제 자신까지도 주님이 택하신다면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기꺼이 주님을 섬기는데 드리기를 원하나이다. 존귀와 영광을 성부 성자 성령님께 돌려드립니다. 주님은 저의 것이며, 저는 주님의 것입니다. 이것이 이렇게 영원하기를 원합니다. 2020년 한해를 예수를 몸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합니다. 지금 이 땅에서 한 이 언약이 하늘에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아멘.

 

박철
샘터교회 동사목사. 시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