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 위하여 사랑을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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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기 위하여 사랑을 받다
  • 한상봉
  • 승인 2019.12.30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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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테 죌레, [사랑과 노동-창조의 신학], 분도출판사, 2018-두번째 리뷰

하느님은 우리를 노동자로, 사랑하는 자로 창조하셨다. 도로테 죌레(Dorothee Soelle, 1929-2003)는 <사랑과 노동>에서,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의미를 우리도 그분처럼 “노동하고 사랑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전했다. 물론 이 사랑 안에는 성적 사랑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영원한 봄도, 독일의 가을도, 핵겨울도 아닌 ‘여름’에 하느님을 찬양하고자 한다.

죌레는 ‘성탄절’처럼 어린아이들이나 ‘사순절’처럼 늙은 사람에게만 의미있는 제도로 교회가 남아 있는 게 아닌가 염려한다. 그래서 한참 살아가고 있는 성인(成人)들의 성(性)과 노동에 대해 말하려 한다. 우리는 노동과 사랑을 통해 하느님 창조의 동역자로 지금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과 상품은 분리되지 않는다

도로테 죌레는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이 임금노동으로 퇴색되고 왜곡되었다면 성의 행태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교환가치를 위해, 곧 ‘돈’을 벌기위해 일하고, 대가를 기대하며 업무를 보고, 그렇게 동료와 관계를 맺는 사람들은 사적인 영역에서도 인간적인 방식으로 타인을 대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관계는 상품이다. 대가를 바라며 서비스하고, 값을 치른 만큼 좋은 상품을 기대한다. 사실상 교회 안에서도 이런 논리가 그대로 관철된다. 하느님과 거래하는 신앙인의 모습과 참 닮아있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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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주가 노동자의 시간을 임금을 주고 사듯이, 이성과의 관계 역시 물건처럼 소유하거나 살 수 있는 성적 상품이 된다. 감각적 흥분은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적 교류에서 떨어져 나오고, 인간의 각 신체부분(다리, 생식기, 가슴, 엉덩이 등)은 사고팔 수 있는 성적 물신(物神)이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과 상품은 분리되지 않는다.

상품광고도 그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사람들은 환상이나 아름다움, 또는 관능적 느낌을 상품에 덧씌워 판매한다. 자동차나 담배, 음료수 광고가 성욕을 자극하며, 그 갈증은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광고는 구매자의 욕망을 계속 새롭게 자극하는데, 선전 했던 상품을 한번 소유하는 것으로는 광고에서 약속했던 쾌락을 온전히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소비주의 상품세계에서는 사랑도 사고팔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애인이란 사랑에 빠진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사랑이란 최고급 와인과 세단을 제공할 수 있는 경제력 있는 사람에게 끌리는 것이다. 이런 체제는 다른 이와 맺는 관계를 ‘거래관계’로 변질시키며, 참으로 관계 맺는 능력을 위축시킨다. 이런 새로운 계급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계급의 사람과 자연스럽게 우정을 나눌 수 없다. 중부 유럽인들은 인종차별적 사회에서 터키인 형제자매들과 터놓고 손을 잡을 수 없다. 성차별적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존중과 연대감을 기대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도로테 죌레는 대부분의 광고는 “문화적 억압의 도구”라고 말한다. 그것은 다른 어떤 대중교육 수단보다 더 효과적으로 인간이 가진 참된 가치를 파괴한다. 참된 가치란 가령 노인에 대한 존경, 가난한 사람이나 장애인을 도우려는 마음, 소수자에 대한 관용 등이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광고의 목적이 특정 상품을 많이 팔려고 애쓴다는데 있지 않다. 광고는 사람들이 판매와 구매, 거래와 부의 축적이 인간 활동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투자정보를 제공하는 잡지 <아메리칸 비즈니스> 광고에는 커다란 여자 사진 아래에 필기체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쓰여 있다고 한다.

“헬로 달링! 나는 돈을 좋아하고 돈을 벌 줄도 쓸 줄도 아는 남자를 좋아합니다. 당신은 틀림없이 그런 사람일 거예요. 나는 당신을 이 잡지에 초대하고 싶어요. 이 잡지는 당신을 죄가 될 정도로 큰 부자로 만들어 줄 거예요. ... 기다리게 하지 마세요. 빨리 오세요!”

대부분 핵가족에서 남자는 돈을 벌고 여자는 쇼핑계획을 세우고 실행한다. 그래서 여성은 ‘소비자’로서 광고에서 대중조작의 목표가 된다. 좀 다르게 살고, 더 아름답고, 더 낫게, 더 현명하고 행복하게 되려는 우리의 깊은 욕구를 다른 것을 소유하고 소비하려는 욕구로 변형시킨다. 원래 우리의 희망과 꿈은 우리 존재의 변화와 관련 있지만, 광고는 상품소비에서 대안을 찾으라고 강요한다. ‘크라이스트’(Christ)라는 특별한 이름을 가진 보석회사는 이렇게 광고한다.

“크라이스트는 사랑과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크라이스트는 연인입니다. 크라이스트는 연인을 위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크라이스트는 크라이스트러브라인(Christ-Love-Line)을 출시했습니다. 크라이스트러브라인은 사랑하는 마음을 매력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상적인 선물입니다. 말로 하는 것보다 훨씬 좋고 이름다운 선물입니다. 크라이스트러브라인은 모두 금 750캐럿으로 만든 제품입니다. 크라이스트러브라인은 사랑을 위한 금입니다.”

이 문구 옆에는 입을 반쯤 벌린 젊은 여자가 얼어붙은 미소를 띠고 가면을 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그리고 금으로 치장한 그녀의 손 위로 한 남자가 키스를 하려고 몸을 굽히고 있다. 이 광고는 복음서 구절을 절묘하게 반영하고 있다. “사실 당신의 보물이 있는 곳, 거기에 당신의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마태 6,21) 어느 난방기 광고는 “완전한 삶을 위한 따스함”을 약속한다. 이처럼 소비주의는 인간적 친밀함과 인격적 관계에 대한 모든 욕구가 상품에 대한 욕구로 뒤바뀐 사회의 종교이다.

그래서 광고업계 종사자들은 새로운 종교의 사제들이다. 그들은 새로운 자동차 모델을 만들기 전에 그들(소비자/신도)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간파한다. 그리고 “우리를 믿으라.”고 격려한다. 광고의 하느님은 여성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일에 시달리는 남자들도 배려한다. 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상품을 해결책으로 내어놓고 “지금 당장 결정하라.”고 한다. 개종은 빠를수록 좋기 때문이다. 덧붙여 이 상품은 “당신만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고 추켜세운다.

이 종교에서는, 이 물건을 사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이 법칙을 따르지 않고 몸에서 악취가 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고독의 형벌이, 구식 인테리어 집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비웃음이 형벌로 내린다. 그러나 탁월한 취향을 선택한 여인들에게는 축복이 있다. 도로테 죌레는 이런 종교는 나쁜 종교라고 말한다. 생각해보자. 우리가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소통과 교제이며,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것이다.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하느님은 물질적인 우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인간을 통해서만 활동하신다. 하느님은 나의 세상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자동장치가 아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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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자기초월의 의지

도로테 죌레는 세상에서 사랑을 가로막는 적이 둘 있는데, 하나는 늙은 가부장이고, 또 하나는 약삭빠른 젊은 남자라고 한다. 가부장들은 “너는 그렇게 하면 안 돼”라는 말로 모든 말을 시작한다. 가부장들은 모든 것을, 그중에서도 여성들을 자신의 지배 아래 두려고 한다. 그들은 전통적인 종교와 가족의 가치를 옹호하며, 혼전성교, 여성의 자기결정권, 동성애에 반대한다. 이들은 억압적인 아버지나 여성혐오적인 엄격한 성직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약삭빠른 젊은 남자에게 성은 결코 ‘죄’가 아니라 상품이다. 도덕주의라면 무조건 싫어하는 이 사랑의 적은 ‘죄’라는 말을 결코 입에 담지 않는다. 그는 관계에 대한 욕구를 소비주의로 해결한다. 그는 “난 내 감정에 솔직해!” 하면서, 어떤 경우에도 자기감정을 억누를 생각이 없고, 타인의 감정을 착취한다. 그는 성적인 관계를 사소한 것으로 만들고, 성을 상품으로 전락시킨다. 이들은 정말 사랑이 뭔지 모르기 때문에, 정작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느님이 사랑하는 분이듯 우리도 사랑하는 자가 되도록 창조되었음을 의미한다. 죌레는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존재론적 과업이며, 이제 그것을 역사적 과업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생텍쥐베리는 사랑이란 “서로 마주보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3의 것을 함께 바라보는” 데서 이루어진다고 했다.

성관계를 나누는 연인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사랑은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하고, 세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발견하도록 촉구한다. 사랑은 그렇게 자기를 넘어서려는 노력이며, 아이를 출산하는 것조차 그 자기초월적 사랑의 여러 가지 가능성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더 이상 확장되지 않고 부부나 가족 안에만 머물 때는 그 사랑조차 부패한다. 제임스 넬슨은 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성(性)은 우리가 소통하는 존재이며 공동체적 존재라는 표징이자 상징이고 수단이다. 성의 비밀은 다른 사람을 향해 다가가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들을 품에 안으려는 욕구에 있다. 성은 하느님의 뜻을 표현해서 우리가 다른 사람과 관계하면서 우리의 참된 인간성을 발견하게 해준다.”

이처럼 모든 친밀한 관계는 함께 있는 것뿐만 아니라 ‘함께 무슨 일을 하려는’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신앙인에게 그 일은 ‘하느님 나라’운동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죌레는 하느님 나라의 의로움에 대한 굶주림이 사랑의 에너지며, 이 에너지는 온전한 성적 관계에서 방출된다고 믿었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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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상호적인 신뢰관계

하느님은 인간을 성적 자기 정체성을 지닌 존재로 창조하셨다. 우리는 성적 엑스터시(Ecstasy)를 통해 삶의 엑스터시를 체험할 수 있다. 인간은 이런 행복에 도취해 망아적이 될 수도 있고, 황홀경을 체험하고 마치 옷을 벗듯이 ‘옛 나’를 벗어던질 수도 있다. 성적 체험은 우리가 자기를 초월하여 생명의 창조적 힘에 참여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엑스타시를 경험할 때, 이 오르가슴 상태는 우리가 어머니의 몸에서 나올 때, 낙원에서 쫓겨났을 때 느꼈던 최초의 분리 감정을 극복하게 해준다. 분리의 추운 시간은 지나가고 새로운 시간이 동터 온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 우리에게 부족할 것이 없다고 느끼는 순간이다. 이 엑스타시를 경험하지 못할 때, 우리는 고독하고 두려움에 휩싸인다.

그래서 하느님은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창세 2,18)고 하셨다. 아담이 하와를 처음 발견했을 때, 그녀가 자신과 비슷하다는 사실에 기뻐 탄성을 울린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 이 말은 남녀 인간의 하나됨과 연대성, 상호성과 평등성을 드러낸다. 그래서 강간은 우리가 상호적 사랑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끔찍한 부정이다.

성폭력 자체도 문제거니와, 강간하는 남자를 가장 사나이다운 남자로 신화화 하고, 여성을 이른바 성폭력을 갈망하는 유혹자로 만드는 태도는 파시즘의 정신상태를 닮았다. 이혼담당 판사가 언제 남편과 성관계를 가졌느냐고 질문하였을 때, 한 여성은 이렇게 답했다. “그는 저와 삼 주 전에 성관계를 가졌고, 저는 그와 이 년 전에 성관계를 가졌습니다.” 상호성이 없는 관계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상처받을 용기를 지닌 이런 상호성을 성경에서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세 2,25)고 표현한다. 정말 사랑하면 아무런 보호 없이 벌거벗어도 좋다. 늙고 뚱뚱한, 때로는 흉터로 일그러진 몸에 쏟아질 외부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처럼 벌거벗었다는 것은 무방비 상태, 비무장 상태다. 상호적 관계는 나를 방어할 ‘무기’를 던져버리게 한다. 나의 신용카드나 박사 학위, 내 재산과 외모 등, 이것들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이다. 이것들은 내가 사랑할 수 있기 위해 벗어버려야 할 ‘옷’이다. 사랑 안에서 나는 더 이상 나를 방어할 필요가 없으며, 이 때문에 상처받을 용의도 있다. 이런 모험에 뛰어들게 하는 것이 사랑이고, 상호성이다.

그래서 함께 잔다는 것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 신뢰하고 의지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냥 자신의 약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싶을 때가 있다. 부족한 그대로 안심하고 사랑받고 싶어 한다. 우리는 두려움이나 굴종이 없는 관계에서만, 누군가가 우리를 지배하거나 악용할지 모른다는 염려가 없어야 무장해제가 가능하다. 그래야 약한 모습을 보여주어도 두려움이 없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오히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1요한 4,18) 이런 신뢰 안에 머물 때 우리는 서로 위로하며, 서로에게 배우고, 상대방을 도울 수 있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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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에서 아가페까지 확장되는 사랑

성은 일종의 성사이며, 육체를 통해 드러나는 은총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랑을 일반화 하지 않고 다양하게 표현했다. 에피튀미아(epithymia)는 성적 긴장완화를 바라는 생물학적 욕구이며, 에로스(eros)는 사랑받는 존재를 향한 강한 열망이다. 필리아(philia)는 상호성과 우정을 의미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공동체성을 표현하기 위해 아가페(agape)라는 말을 선택했다. 요한1서 4장 8절에 따르면 하느님은 아가페다. 이타적이며 거저 주어지고 결코 소유하거나 강요하지 않는 사랑의 힘이다.

사랑은 정신적, 심미적, 정치적 영역 모두를 통합하는 힘이 있다. 사랑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함께 결합시킨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과거를 이야기하며, 그 과거를 찾아가는 길 위에서 미래를 약속한다. 사랑은 현재/순간에만 몰두하지 않는다. 또한 너만 있으면 되고, 너 외에 아무도,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경증적 의존관계이지 사랑이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 마음보다 더 크시다”(1요한 3,20)는 말처럼, 사랑에 대한 우리의 비전은 우리가 이제까지 경험한 것보다 더 크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이러한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문헌이 아가(雅歌)였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정열은 저승처럼 억센 것.
그 열기는 불의 열기, 더할 나위 없이 격렬한 불길이랍니다.
큰 물도 사랑을 끌 수 없고
강물도 휩쓸어 가지 못한답니다.”(아가 8,6-7)

아가는 결혼이나 다른 사회제도를 말하지 않는다. 출산과 가족에도 관심이 없다. 아가는 인간의 성에서 완성되는 창조를 찬미하는 노래다. 이 사랑의 동산에서는 오직 사랑하는 사람들이 “맛깔스러운 과일들”(아가 4,16)을 먹도록 서로 초대할 수 있다. 창세기의 타락설화처럼 죽음의 형벌이나 순종과 불순종에 대한 언급이 없다. 아가의 동산에서는 노동과 사랑놀이가 한데 어우러진다.

"나의 연인은 자기 정원으로,
발삼 꽃밭으로 내려갔어요.
정원에서 양을 치며
나리꽃을 따려고 내려갔어요.
나는 내 연인의 것, 내 연인은 나의 것.
그이는 나리꽃 사이에서 양을 친답니다."(아가 6,2-3)

아가는 식물과 동물, 남자와 여자 모두 동산 안에서 넘치는 기쁨과 풍요, 삶의 충만에 참여하고 있다고 전한다. 이것은 연대성이 주는 기쁨이다. 나의 파트너뿐 아니라 모든 인류 가족에게 확장되는 사랑이다. 더 큰 사랑을 낳는 사랑이다. 그래서 도로테 죌레는 “아가페 없이 에로스 없고, 에로스 없이 아가페 없다.”고 말한다. 사랑 안에서 경험하는 엑스터시는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당하는 폭력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돕고, 삶의 풍요로움을 박탈당한 사람들에게 더욱 주의를 기울이게 만든다. “나는 사랑을 하면 할수록 혁명을 하고 싶어진다!”는 68운동의 슬로건처럼.

정의로운 사랑

그래서 사랑은 정의와 떼어놓을 수 없다. 곤궁한 사람들의 외침에 귀를 막을 때 우리는 아가페와 자비만 아니라 에로스까지 죽이게 되는 까닭이다. 사랑의 행복이 사적 영역에 한정될 수 없듯이, 사랑에서 방출되는 에너지를 공적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 코린토 1서 13장에서 바오로 사도는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를 기뻐하는”(13,6) 사랑을 노래한다.

사랑은 우리 자신을 초월하는 것이며,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고난을 당하며, 진리에 따라 살고, 우리 앞에 있는 죽음의 세력에 저항한다. 바오로 사도는 사랑의 찬가 마지막 일곱 절에서 ‘모든 것’(panta)이라는 말을 네 차례나 반복한다.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 그리고 피조세계 전체와 통전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도로테 죌레는 자신을 ‘하느님의 연인’이라고 불렀던 아시시 프란치스코 성인에게서 에로스와 아가페가 함께 녹아있는 삶을 발견하였다. 그는 기도와 격언, 바보 같아 보이는 행동들을 통해 하느님을 향한 열정과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온전한 사랑을 보여 주었다. 그는 나병환자를 끌어안고 입 맞추었다.

프란치스코가 살았던 수도공동체는 다정하고 에로스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들은 모든 소유와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선물까지도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공동체의 약한 형제들의 욕구를 주의깊게 배려하였고, 그들을 위해 엄격한 계율을 깨뜨리는 경우도 많았다. 춤과 울음도 프란치스코와 그 형제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열정 없는 삶, 상처받는 일이 없고, 기쁨도 없는 삶은 죽음과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알다시피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간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1요한 3,14)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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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사랑하는 자가 되도록 사랑받는 존재

도로테 죌레는 “우리는 스스로 창조자가 되도록 창조된 존재이며, 스스로 해방을 위해 힘쓰도록 해방된 존재이고, 스스로 사랑하는 자가 되도록 사랑받는 존재”라고 말한다. 바오로 사도는 믿음, 희망, 사랑 가운데 사랑이 가장 위대하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죌레는 “사랑은 없다”고 외마디를 질러야 할 정도로 절망적인 세계에서 ‘희망’을 가리킨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믿음은 하느님이 존재함을 가르치며, 사랑은 하느님이 선하다는 것을 가르치지만, 희망은 하느님의 뜻이 성취된다는 것을 가르친다.”고 했다. 그러니 예수님과 그의 친구들이 마귀를 쫓아냈듯이, 압제자를 몰아낼 힘을 얻은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있다. 희망이 사라진 상태에서도 저항하는 자는 희망을 믿는 사람이다. 마치 좋은 결과가 있을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니네베의 임박한 파멸에 대한 예언자 요나의 설교를 듣고 백성들에게 참회하고 애도하라 명령했던 왕은 말한다. “하느님께서 다시 마음을 돌리시고 그 타오르는 진노를 거두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요나 3,9) 사랑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 희망이 인간을 구원한다. 누가 알겠는가? 세상이 달라질지.

그러니 우리는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한다. 우리의 낡은 존재,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비정치적인 존재,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옛 사람은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 첫 창조 이래 하느님의 창조는 우리를 통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생명을 사랑하시는 분”(지혜 11,26)이라는 오래된 이름을 갖고 있다. 이 이름은 이제 새로 태어난 우리의 이름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인간은 투사이며 혁명가다. 무엇을 위해 살고 죽을지 아는 여성들이며, 하느님 나라를 위해 싸우는 남성들이다. 새 인간은 공동창조자로서 땅을 쇄신하고, 예속에서 해방되고, 죽음과 죽음을 가져오는 모든 세력에 맞서 투쟁하며 사랑하는 존재다.”

 

*이 글은 종이신문 <가톨릭일꾼> 22호. 2019년 12-2020년 11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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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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