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주의'가 영적 자유를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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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주의'가 영적 자유를 주지 않는다
  • 토머스 머튼
  • 승인 2019.12.30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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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머튼의 삶과 거룩함/시험 당하는 이상들-5: 영적 생활에서의 현실주의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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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타올로는 한 설교 중에 하느님이 우리의 영혼을 찾으시는 것은 마치 복음서의 한 예화에 나오는, 여인이 잃어버린 은화를 찾기 위해 온 집을 뒤집어 엎는 것과 같다고 했다. 우리의 영적인 삶을 이렇듯 “뒤집어 놓는 것”은 성장을 위해 필수적인데,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영적인 완전함에 대한 환상을 품은 채 편안히 안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교리에 이는 수동적인 정화를 뜻하는 “어두운 밤”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과 그분의 일에 대해 갖고 있던 지나치게 인간적인 관점들을 버리게 되며 사막으로 인도되어 그 곳에서 우리는 빵 뿐만 아니라 오직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양식으로 자라나게 된다.

현대 신학자들은 오랫동안 그리스도적 거룩함이 완전히 성숙하기 위해 수동적이며 신비적인 정화의 필요성에 대해 공방을 벌였다. 여기서 공방의 내용을 굳이 거론할 필요성은 못 느끼나, 진정한 거룩함은 우리 삶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온전히 표출하는 것이며, 이 십자가가 우리에게 익숙하고 정상적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죽이며, 매일의 일상 속에서 자신을 죽이는 것으로써 우리가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이 새로운 차원의 삶이 옛날, 우리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부활하는 것은 익숙한 자아(自我)다. “새로운 인간”은 완전히 변화되었지만, 여전히 같은 사람으로 남아 있다. 그는 영적으로 변했고 하늘의 아버지는 그를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졌다”고 인정하실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불만족스럽게 느끼고 증오하는 자신의 모습으로부터 도망치게 만드는 “이상들”을 간직하는 것이 쓸데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경고한다. 완전해지려면 도망쳐서는 안된다. 우리는 자신을 직시하고 있는 그대로의 우리 삶에 대해 온전히 책임지며 그 모든 장애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구원자의 정화와 변화의 손길에 자신을 온전히 의탁해야 한다.

이런 기초적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선한 의도를 지니고 있지만 잘못 인도되고 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절망과 파멸에 압도당하는 것을 봐야 한다는 것은 비극이다. 그런 젊은이들에게 현실적으로 종교에 대한 진지한 헌신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어떤 면에서는, 완전함을 제일 갈구하는 이들처럼 보인다. 자신이 스스로에게 씌운 철창을 부수기 위한 그들의 진지함과 열성은 그들을 도우려는 사람 모두에게 연민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가끔 영적 지도자들은 이 불쌍한 수난자들이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는 대신 모든 문제의 원천이 된 거짓 이상을 북돋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간혹 겸손으로 오인되기도 하는 자신에 대한 병적인 증오심은 좋지 않다. 몸과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마니교도적 미움으로 얼룩진 영적인 이상은 희망이 없다. 유치한 자아 사랑을 개조한 천사주의 역시 우리를 영적인 자유나 거룩함으로 이끌 수는 없다.

우리는 자신의 격정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하며, 깊은 겸손과 극기 안에서 우리의 정신을 평정하고, 자신의 터무니없는 욕구에 대해서는 분명하고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며, 원칙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자신의 합법적인 욕구마저 희생해야 한다.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세상을 거부하는 것은 타협을 용납치 않는 매우 진지한 일이다. 희생, 기도, 그리고 세속에 대한 거부를 포함한 완전함으로의 길을 묵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우리는 실제로 단식하고 기도하며 자신을 부인하고 내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

오로지 현실적인 작업에서만 완전함을 추구하려는 것, 규칙과 순종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부과된 의무들로 우리의 삶 전체를 그리스도께 속한 것으로 능히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한다. 하느님을 위해 외적으로 “일하는” 사람은 진정한 완전함을 위해 필요한 내적인 사랑이 결핍되어 있을 수 있다. 사랑은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을 알고 기도 안에서 그분과 대화하며 명상 속에서 자신을 그분께 봉헌하는 것을 말한다.

 

[원문출처] <Life and Holiness>, 토머스 머튼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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