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날아오를만한 그분의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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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날아오를만한 그분의 품
  • 한상봉
  • 승인 2016.06.21 12: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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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여덟 단계-9 (죽음, 두번째 이야기)
ⓒ한상봉

헨리 나웬은 생의 마지막 수년 동안 ‘본향’(죽음)에 대하여 많이 묵상했다.

“내가 얼마나 더 오래 살 것인가?... 한가지 사실은 분명한 것 같다. 매일 매일을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단순한 진리인가! 그런데도 나의 노력은 아직도 부족하다. 나는 오늘 평화를 주었는가? 어떤 사람의 얼굴에 웃음을 띄게 했는가? 치유의 말들을 했는가? 내가 지닌 분노와 회한을 놓았는가? 용서했는가? 사랑했는가? 이런 것들이 진실한 질문들이다! 내가 지금 심는 작은 사랑의 씨앗이 지금 이 세계에서, 또한 앞으로 다가올 삶에서 많은 열매들을 맺을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결국 죽음에 직면하면서, 우리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가”가 아니라, “우리의 죽어 가는 모습이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 그리고 우리를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우리 자신과 하느님의 성령을 보내는 새로운 길이 되도록” 어떻게 죽음을 준비할 것인가, 이다.

나웬은 새벽공동체에 살 때 교통사고로 죽음을 경험하면서 매우 혹독한 고통을 겪었지만 한편으로 인생에서 가장 편안한 시간을 가졌다고 고백했다.

“죽음은 그 권세를 잃었다. 그리고 나를 너무나 친밀하게 둘러싸고 있던 생명과 사랑 속에 소멸하고 말았다. 마치도 바다를 걷고 있는데 파도들이 멀리 사라져버리는 것 같았다. 나는 다른 편 해안가로 안전하게 가고 있었다. 모든 질투, 회한, 그리고 분노가 부드럽게 사라져 갔고, 지금까지 내가 걱정했던 그 어떤 권세보다 사랑과 생명이 더 크게, 더 깊게, 더 강하게 나타났다.”

타고 나기를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던 헨리 나웬이 한 말이라서 이 말은 더 귀하다. 그는 이런 경험을 “평화의 선물”이라고 했는데, “우리들의 생명이 우리에게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웬은 “우리가 죄책감, 수치감, 분노, 회한을 갖고 죽는다면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세상에 남기는 유산이 되어 우리가족과 친구들의 삶을 옭죄고 무겁게 만들 것이다. 또 다른 한편, 죽음을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느끼는 평화를 다른 이웃에게 전해주는 선물이요 기회라고 여기며 이승을 떠날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그 유명한 서커스 이야기를 해야 한다. 한 공중곡예사가 “날으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를 붙잡는 사람이 모든 것을 한다.”고 말했을 때, 나웬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곡예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내가 밑에서 붙잡는 사람에게 날아갈 때, 난 그저 내 팔과 손을 그를 향해 뻗칠 뿐이지요. 그러면 그는 나를 붙잡아서 밑의 착지대 안에 안전하게 내리도록 끌어당깁니다... 날으는 사람은 날아야 하고, 붙잡는 사람은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날으는 사람은 팔을 뻗으면서 붙잡는 사람이 그를 위해 밑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 곡예사의 말은 나웬처럼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얼마나 모든 것을 잘 통제하며 다스릴 수 있는가에 따라 성공여부를 판단하지만, 사실 우리 삶의 최종적 의미는 “우리가 얼마나 다른 존재의 손에 우리자신을 맡길 수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는 게 신앙이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도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당신의 손에 제 영을 맡깁니다.” 나웬은 “죽는 것은 붙잡는 이를 믿는 것”이라고 성찰했다.

이런 체험은 아담의 죽음에 대한 나웬의 성찰에서 더욱 깊어진다. 아담은 나웬이 새벽공동체에서 돌보던 중증장애인 청년이었는데, 그에게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가 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진정으로 깨달았다. 아담은 보통 사람들이 당연히 알고 하는 일을 하지 못했다. 먹고 말하고 입는 것 등을 혼자서 전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흔히 세상의 눈으로 보면, “왜 그런 사람이 죽어야 하는가?” 질문하기 전에 “왜 하느님이 그런 사람을 살게 했는가?” 질문하기 쉽다. 그러나 나웬은 이렇게 말한다.

“아담은 매우 단순하게, 조용히, 그러나 파문을 일으키며 그곳에 있었다. 그는 단지 그의 삶 자체로서 우리 하느님의 놀라운 신비를 선포하였다. ‘나는 소중하고 사랑 받는 존재, 온전하며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난 존재입니다.’ 아담은 침묵으로 이 신비를 증언하였다. 그 신비는 그가 말을 하거나 못하거나, 걷거나 못 걷거나, 자신을 표현하거나 못 표현하거나 상관없이 존재하는 신비였다. 그 신비는 다만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와 상관있는 신비이다. 아담은 하느님의 사랑 받는 아이였고, 사랑 받는 아이로 존재한다. 그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선포했던 소식과 같은 소식이다... 삶은 선물이다. 우리 각자는 고유하며 이름으로 알려지고 우리를 만들어 내신 존재에 의해 사랑 받고 있다.”

나웬 역시 아담처럼 “팔을 뻗쳐 자신의 비상을 준비해야 한다”는 초대를 느꼈던 것 같다. 중력으로부터, 육체와 정신의 온갖 뒤틀림으로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는, 붙잡는 존재의 품안으로 스며들어가는 비상을 말이다. 나웬은 마치 아담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고 썼다. “헨리! 두려워하지 말아요. 나의 죽음으로 인해 당신이 죽음을 맞아들이는 것을 돕도록 해 주세요. 당신이 더 이상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당신은 충만하게, 자유롭게, 그리고 가득 찬 즐거움으로 살 수 있어요.”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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